"AI 공부하고 있어?"-휴직자에게 온 사장님의 전화

안식년 37일째 기록

by 고도

오늘은 안식년 37일째 되는 날이다.


폭락 속의 평안

아침 9시 반, 주식 앱을 켰다. 내 주식은 -7%. 시장 전체가 폭락 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했다. 오히려 주가가 급등할 때보다 이 느낌이 좋다. 안식년 동안 나는 주식보다 책과 생각에 집중하고 싶었다. 주가가 오르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차라리 조용히 가라앉는 편이 낫다.


장님의 전화

그런데 오전 10시 즈음, 갑자기 사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감기 기운에 목이 잠긴 상태여서 통화하기가 힘들었다. 잘 쉬고 있냐고 안부를 물으시곤, 대뜸 AI 공부를 하고 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AI를 종종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최근엔 따로 공부는 하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회장님은 AX(AI Transformation)를 준비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오늘 모종의 이유로 어디선가 AX 관련 이야기를 많이 듣고 계신 듯했다.


나 역시 모르는건 마찬가지였다. 요즘 시대 기업인들의 고민이 다 이것일 것이다.

10분 넘게 사장님의 고민을 들어드렸다. 어제 연습했던 대화법이 도움이 되었다.

"상대방의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게 하라."


전화를 끊고 나니 심란했다. 아니, 정확히는 사장님의 심란함이 전염됐다. 와이프가 놀라며 말했다. "당신 대체가 가능한 사람이라며? 사장님이 휴직자한테도 전화를 하시네." 나도 신기하게 생각하긴 했다. 그러나 그건 여전히 맞다. 나는 대체 가능한 사람이고, AX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잠깐 생각해 봤지만 답이 없다. 잠정적인 가설들을 세우고, 논박을 통해 가장 적절한 가설을 남기는 것—그 방법밖에는 없다.


1억과 12척의 배

점심 무렵, 이번엔 아내에게 장모님이 전화하셨다. 최근 암 수술 후 받은 보험금 1억으로 빌라 건물을 사는 게 어떨까 물어보셨다. 딸 명의로 사려고 물어보신 것이다. 장인장모님은 예전 파산 이력 때문에 본인 명의로는 건물을 살 수 없다.


아내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명의도 빌려줄 수 없고, 건물 투자는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차라리 배당주 같은 걸 추천했다. 그 말에 장모님은 "내가 주식에 대해 뭘 아냐" 하신 것 같고, 아내는 차라리 사위한테 맡기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멈칫했다.


워런 버핏도 남의 돈으로는 투자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오늘따라 갑자기 고민거리들이 몰려온다.


점심을 먹으며 통화 내용에 관해 아내와 이야기를 나눴다. 생각해 보면 장모님에게 이 돈은 이순신의 마지막 12척처럼 소중한 돈이다. 투자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동의한다. 1억이란 돈도 인플레에 녹아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돈이 된다. 아껴 써도 몇 년이면 바닥나는 금액이다.


문득 이 1억이 어제 읽은 《마션》의 마크 와트니의 감자처럼 느껴졌다. 화성에 홀로 남은 그는 지구로 떠나기까지 먹을 수 있는 감자의 개수를 세며 '이 정도면 버틸 수 있을까' 가늠했다. 장모님의 1억 도 마찬가지다. 생존을 위한 마지막 자원.


피트니스 센터, 그리고 주식 종가

오후 2시, 오랜만에 아파트 피트니스 센터로 걸으러 갔다. 걷다 보니 브라운 아이즈의 「벌써 일 년」이 나왔다. 어릴 때 무지 좋아했던 노래. 노래가 좋다고 느껴진다. 번아웃일 때는 노래를 들어도 좋지 않고, 감상에 빠지는 일도 없었다. 나아지고 있음은 명백하다.


3km를 걸으며 사장님의 고민을 떠올렸다. 굳이 AI에 대한 답이 없다면 큰돈 쓰지 말고 지주 회사로 전환하는 것도 답이다. 워런 버핏도 방직 회사 버크셔 해서웨이로 땅을 쳤지만, 추가 투자를 멈추고 잘하는 다른 길을 찾았다. 그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다.


오늘 종가는 -1퍼센트. 아침에 -7퍼센트였던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주식을 들여다보며 불안해하나, 관심 끄고 살다가 종가를 보나 결과가 같다면 심리적 비용을 쓰지 않은 내가 승리자다.


7살에게 진 게임, 그리고 30분의 법칙

저녁, 첫째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왔다. 티니핑 놀이를 시작했지만 내가 집중하지 못해 금세 끝났다. 첫째와 놀고 있으면 둘째가 와서 같이 놀자고 난리를 치고, 나는 둘 사이에서 집중할 수 없게 된다.


밤에 첫째와 도블 게임을 했다. 그림 맞추는 단순한 게임이다. 몇 판은 살살하다가 한 판은 진심으로 했다. 그런데 7살짜리에게 졌다. 살짝 열이 받았다. 진심으로 했는데 7살에게 지다니. 근데 이런 걸로 승부욕을 내는 내 자신도 한심하고. 이 역시 나를 잠시동안 심란하게 했다. 그러다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모든 걸 잘하는 영웅 같은 아빠는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 오히려 이게 나에게 더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내가 회사에서 번아웃에 빠져버린 것도 돼봐야 의미도 없는 영웅이 되고자 한 게 원인이었겠다 싶다. 안식년에 꼭 해야 할 일은 영웅의 가면을 벗어던지는 것이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생각했다. 오늘 하루 심란했던 여러 주제—사장님의 AI 고민, 장모님의 1억, 7살에게 진 게임—에 너무 깊이 빠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안식년 동안 배운 것이 있다면, 30분 이상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오는 것은 당장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낮잠을 자는 게 더 낫다. 당장 해답이 안 나오는 문제는 마치 씨앗을 심고 기다리듯, 의식 속에 두고 시간을 지내면 된다.


생존의 법칙

결국 《마션》의 주제가 마크 와트니의 '생존'이었듯, 우리 삶의 주제도 결국 '생존'으로 수렴한다.


장모님이 1억을 갖고 어떻게든 수익을 내려는 마음이나, 사장님이 중소기업의 약한 인프라로 어떻게든 AI 전환을 준비하려는 마음이나 결국 같은 마음이다. 생존에 유리한 지점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가려는 것. 나도 이것들에 대한 뾰족한 답은 없다. 다만 틀린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조언은 찰리 멍거의 '뒤집어 생각하기'다. 확실히 망하는 방법을 먼저 생각하는 것. 아무리 큰 수가 있어도 0을 곱하면 0이다. 즉, 다양한 시도를 해도 되지만 우리를 완전히 망하게 할 일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원수가 있다면 빌라 투자를 권하면 될 것이다. AI 전환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장점과 고객의 수요에 대한 정의 없는 무분별한 투자는 원수에게 권할 만한 일이다.



안식년 37일째를 마무리한다.


장님의 AI 전환 고민도, 장모님의 1억 투자 고민도, 결국 생존에 관한 문제다. 하지만 이런 생존의 문제조차 너무 깊이 빠져 있을 필요는 없다.


30분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오면, 그건 당장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씨앗을 심듯 의식 속에 두고, 잠재의식이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시간을 주면 된다. 그 사이에 책을 읽고, 걷고, 아이들과 놀면 된다.


오늘도 그렇게 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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