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년 38일째 기록
안식년 38일째, 토요일이다.
9시 20분까지 푹 잤다. 아이 둘 다 분리 수면을 했기 때문에—새벽에 넘어오지만 않으면—부부가 함께 깊이 잘 수 있다. 어제 3km 걷기를 한 덕분일까. 몸이 가볍다.
첫째가 아침부터 놀자고 조른다. 둘째가 깨기 전에 놀아줘야 한다. 둘이 동시에 깨면 놀이의 난이도가 급격히 올라가기 때문이다.
먼저 도블 게임을 했다. 그림 맞추기 카드 게임인데, 오늘 아침의 나는 집중력이 좋았다. 확실히 압도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가 너무 이기니까 첫째가 재미없어한다. 한 판 만에 끝.
아이와 노는 것도 설계가 필요하다. 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이름하여 '마인크래프트 티니핑 놀이'. 도화지 위에 티니핑 집을 그리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놀이다. 통했다. 첫째가 몰입해서 논다.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나니 내 집중력이 먼저 바닥났다. 이것이 오늘 느낀 첫 번째 한계다.
아이 놀아주는 건 체력 소모가 장난이 아니다. 방에 누워서 쉬고 있는데, 마침 둘째가 일어났다. 체온 37.7도. 정상 범위다. 어제부터 미열이 있어서 신경이 쓰인다.
아내가 커피를 건네며 나를 깨웠다. 둘째 밥을 먹이라는 것이었다.
둘째에게 밥을 먹이면서 《1984》를 계속 읽었다. 윈스턴과 줄리아의 정사 장면으로 넘어갔다. 빅브라더의 감시를 피해 조마조마한 연애를 이어가는 묘미가 있는 작품이다.
읽다 보니 '너절한'이라는 단어가 자꾸 눈에 걸렸다. 너절한 노래, 너절한 커피, 너절한 빵. 오웰은 전체주의 하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이 단어 하나로 요약했다.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면, 경쟁도 사라지고, 경쟁이 사라지면 품질도 사라진다. 생존투쟁이 제거된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너절해진다.
아내가 점심을 준비하며 말했다. "비비고 만두가 맛있더라고, 오늘도 비비고 만두 먹자."
중소기업 제품보다 맛있는데 가격 차이도 별로 안 난단다. 나는 맞장구를 쳤다. "맞아, 나도 제품 생산할 때 보면 규모의 경제가 엄청나더라. 회로기판도 1대만 생산하면 수십만 원씩 들지만, 100만 개를 찍으면 개당 몇백 원이야. 대기업의 효율성은 따라갈 수가 없어."
방금 읽던 《1984》의 너절한 빵이 떠올랐다. 경쟁이 살아 있는 세계에서는 비비고 만두가 태어나고, 경쟁이 죽은 세계에서는 너절한 빵만 남는다. 전체주의의 진짜 오류는 연역적이라는 데 있다. 위에서 정한 '올바른 사상'으로 모든 것을 통제한다. 진화론적이지 않다. 생존투쟁이 없기 때문이다.
밥을 하면서 아내가 대뜸 말했다. "우리 남편이랑 나는솔로 29기 영철이랑 생각이 비슷한 것 같아."
이유를 물었더니 영철은 아내가 밖에서 일하는 것보다 집에서 아이를 보며 따뜻한 가정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란다.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오래된 생각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집에 있는 엄마'가 주는 안정감의 가치를 생각해 보면, 수백만 원 들여 학원을 돌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내 어릴 적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것 같다. 부모님이 내가 초등학교 6학년쯤 장사를 시작하셨는데, 그때부터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 시절이 나에게 썩 좋은 기억이 아니다. 아내도 부모님이 장사를 하셔서 집에 가면 아무도 없는 경우가 많았기에 집에 들어가기 싫어했다고 한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잠시 장모님이 엄지발가락을 다치셔서 몇 개월 집에 계셨는데, 그때 집에 들어가는 게 너무 좋았다고 한다.
물론 커리어 관점에서는 불리하다. 하지만 내가 최근 깨달았듯이, 직장에서의 "자아실현"이란 대부분 허상이다. 피라미드 꼭대기는 자리가 너무 적다. 그걸 모두의 목표로 삼기엔 무리가 있다.
나도 그랬듯, 많은 사람들이 서른다섯을 전후로 생각이 크게 바뀐다. 자서전들을 읽어봐도 서른다섯 전후의 전환이 유독 많다. 왜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즈음이면 기존 방식의 한계가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이 방식으로 계속 갈 수 있을까?' 그 답이 '아니요'일 때, 사람은 비로소 전환을 시도한다.
첫째는 친구네와 놀러 갔고, 나는 집에 둘째와 둘이 남았다.
둘째는 기저귀에 똥을 쌌을 때 특유의 신호를 보낸다. 말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내게 가까이 와서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치우러 가자!" 하면 화장실로 터벅터벅 걸어가 영유아 거치대에 쏙 들어간다. 그럼 내가 기저귀를 갈아준다.
그런데 오늘, 둘째가 빈 과자통을 내밀며 "없어, 없어"라고 말했다. 깜짝 놀랐다. '없다'는 개념을 말로 표현하다니. 아이의 언어는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다.
둘째를 재우려고 한 시 반부터 함께 누웠다. 한 시간째 안 잔다. 나만 한숨 자고 일어났다.
체온 37.8도. 잠은 결국 안 잤다. 어제도 비슷한 실수를 했다. 오후 3시 반에 재웠다가 5시 넘어서 깨는 바람에 밤에 12시가 다 돼서야 잤다. 그 탓에 우리 부부의 유일한 공통 취미—금요일 저녁마다 함께 이혼숙려캠프를 보는 것—도 못 했다.
아이의 수면 패턴을 내 맘대로 조절할 수 없다. 이것도 한계다. 에픽테토스는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그 일의 한계를 반드시 생각해 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둘째 옆에 누워 《1984》를 이어 읽었다. 윈스턴이 줄리아에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 장면만으로도 이 소설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윈스턴은 어린 시절 동생에게서 초콜릿을 빼앗아 먹었다. 배급 사회에서 턱없이 부족한 식량 앞에 본능이 이긴 것이다. 어머니의 야단이 무서워 집 밖으로 나갔고, 돌아왔을 때 어머니와 동생은 사라져 있었다. 그 후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이 기억은 그에게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다. 어머니와 동생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답을 찾고 싶지만, 유추할 만한 정보는 더 이상 없다. 일전에 〈상처를 부검해야 하는 이유〉라는 글을 썼다. 윈스턴 역시 이 기억에서 벗어나려면 상처를 부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스럽지도, 쉬운 일도 아니다.
우리는 아무런 후회 없이 살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앞으로도 후회하고 상처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라는 존재의 한계다.
문득, 같은 교회를 다니는 아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우리 둘째와 동갑인 24년생 남자아이. 한동안 교회에 나오지 않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가열식 가습기를 엎어서 등과 다리에 2도 화상을 입고 입원해 있다고 했다.
아이 엄마는 죄책감과 후회 속에서 날을 보내고 있다고 들었다. 가열식 가습기는 위생적이라서 선택한 것이다. 초음파식은 세균 문제가 있고, 자연 증발식은 냄새가 나고, 가열식은 끓여서 내보내니 깨끗하다. 그 선택은 오로지 아이를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부모의 마음에 대해 안다고 할 수가 없다. 다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우리는 최선의 판단을 내려도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그것이 사람의 한계다.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지혜다.
구슬 수백 개를 동시에 흘렸을 때 장애물 지대를 지나 결국 정규분포 모양으로 내려앉는 영상을 보았다.
그렇다. 우리 인생은 그 구슬과 같다. 이리저리 치이며 내려가는 듯 보이지만, 결국 통계의 지배를 받는다. 내 인생을 수천 번 다시 산다 해도 결과는 매번 다를 것이다. 재산도, 건강도, 관계도 평균치가 있겠지만, 양 끝의 아웃라이어도 반드시 존재한다.
그러니 어떤 사람의 인생이 지금 꼬였다 해도 그것을 필연이라 여길 수 있을까. 우리는 구슬 하나가 어디로 떨어질지조차 모른다. 다만 수백 개가 모이면 종 모양이 된다는 것만 안다. 개인의 삶은 예측 불가능하지만, 삶 전체는 어떤 질서 안에 있다. 그 질서 속에서 내가 어디쯤 내려앉을지—그것은 나의 통제 밖이다.
가수 김장훈이 요즘 유튜브에서 잘 나가고 있다. 성대결절로 예전처럼 노래할 수 없게 된 그를 사람들은 한때 엄청 조롱했다. 억지로 쥐어짜듯 부르는 노래가 우스웠던 것이다.
그런데 김장훈은 그걸 받아들이고 즐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롱이 매력이 됐다. 결점과 실패는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유머의 최고 소재가 되며,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된다.
한계를 부정하면 고통이지만, 한계를 인정하면 유머가 된다. 그것을 기회로 볼 수 있는 눈이 중요하다.
둘째가 4시 40분쯤부터 잠들었다. 5시 30분에 꼭 깨우기로 했다. 어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불을 켰는데도 쌕쌕거리며 계속 잔다.
그냥 방에 불만 켜놓고 나왔다. 오늘도 늦게 잔다면, 내 운명이 그런 것이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것도 나의 한계다.
쓰다 보니 오늘은 유독 '한계'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했다.
아이와 1시간밖에 놀지 못하는 집중력의 한계. 둘째의 수면 패턴을 통제할 수 없는 한계. 완벽한 선택을 해도 막을 수 없는 사고와 후회. 구슬이 어디로 떨어질지 알 수 없는 한계. 예전처럼 노래할 수 없는 목의 한계.
안식년에 가장 많이 생각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한계'다.
젊은 20대에는 자신의 한계가 어디인지 잘 모른다.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인다. "해낸다"라는 말이 멋있게 들린다. 그러나 15년쯤 현실에 부딪히다 보면, 자신의 한계가 점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벽이 보인다. 그래서 이 시기에 삶의 방식을 많이 바꾸는 것 같다.
오늘 하루를 돌아본다. 《1984》를 읽고, 아이들과 놀고, 기저귀를 갈고, 만두를 먹었다. 거대한 이벤트는 없었다. 다만 하루 종일 '한계'라는 단어가 나를 따라다녔다.
우리가 배워야 할 삶의 태도는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되, 그것에 대해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을 갖지 않는 것이다.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는 말은 자신의 한계를 아직 모르는 사람의 치기다.
한계를 부정하면 번아웃이 온다. 한계를 인정하면 유머가 되고, 여유가 되고, 때로는 전환이 된다. 김장훈이 그랬고, 서른다섯의 사람들이 그렇고, 지금의 나도 그렇다.
오늘도 안식년은 조용히 흘러갔다. 그리고 그 조용함 속에서 또 하나를 배웠다. 한계 안에서 사는 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