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후 딸들에게 쓰는 편지
나의 사랑하는 두 딸들에게,
오늘은 2026년 2월 13일 금요일이다. 최근 동네에 큰 키즈카페가 새로 생겼는데, 오픈 이벤트 중이라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더구나. 그래서 오후 2시에 슬이를 조금 일찍 하원시켜 함께 다녀왔다. 며칠 전 진이만 데리고 갔을 때는 한산해서 좋았는데, 오늘은 금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아 그때만큼 여유롭지는 않았어.
입장한 지 10분쯤 지났을까? 슬이가 낯선 친구와 손을 꼭 잡고 다니길래 아는 사이인가 했더니, 엄마 말이 오늘 처음 만난 친구라고 하더구나. 그 친화력이 참 신기하고 웃음이 났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또 있다. 아빠랑 슬이가 <쥬라기 공원> 게임을 함께 했을 때야. 공룡들이 덤벼드는 화면을 향해 총을 쏘는 게임이었는데, 슬이는 무서웠는지 고개를 획 돌려버리고는 허공에다 총을 마구 쏘아대더구나. 결국 우리는 최종 단계 클리어에 실패하고 말았지.
반면 진이는 모든 놀이기구에 5초 이상 집중하는 법이 없다. 잠시 즐기고는 바로 쿨하게 다른 곳으로 향하더구나. 슬이가 새 친구와 노는 동안 아빠는 진이 곁을 지켰단다. 정신없긴 하지만 진이는 혼자서도 꽤 잘 노는 편이야. 문득 밖에서 진이를 바라보니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어. 태어났을 때는 찌그러진 감자처럼 못생겨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갈수록 예뻐지니 이젠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진이가 혼자 잘 놀아준 덕분에 아빠는 잠시 생각에 잠길 수 있었어. 요즘 읽고 있는 에픽테토스의 철학에 대해 다시 곱씹어 보았단다. 에픽테토스는 '내 권한에 속하는 일'과 '속하지 않는 일'을 구분하여, 권한 밖의 일은 바라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라고 했지. 책을 읽을 땐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살아야지"라고 다짐한다. 하지만 실제로 삶에 적용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란다. 아빠 역시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막상 화가 나거나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금세 마음의 평안을 빼앗기곤 하니까.
어제 너희를 재우고 엄마랑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이라는 영화를 봤다. 아주 훌륭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느낀 점은 있었어. 영화 속에 '마일스 브론'이라는 사업가가 나오는데, 세상은 그를 천재라 부르고 본인도 괴짜 천재처럼 행동해. 하지만 실상은 천재가 아니었고, 그저 우연히 만들어진 허상이었지. 그는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는 증거를 없애려고 무리수를 둔단다.
그걸 보며 문득 아빠에게도 저런 가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실체 없는 '천재'나 '영웅'의 자아상 같은 것 말이야. 이번 안식년 동안 아빠가 꼭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영웅의 가면'인 것 같다.
사람들은 누구나 생존에 유리해 보이는 '페르소나(가면)'를 쓰고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아빠는 너희가 너무 무겁고 왜곡된 자아상을 짊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대신 좀 더 가볍고 자연스러운 자아상을 만들면 좋겠어.
가장 좋은 방법은 진화론적인 방법을 쓰는 거야. 페르소나란 결국 나를 보호하기 위한 '가설'이자 '옷'과 같단다. 입었을 때 마음이 괴롭거나 불편하다면, 아무리 남들이 멋지다고 해도 그건 너희에게 맞는 옷이 아니야. 현실에서 내가 화가 나거나 괴로운 느낌이 든다면, 그건 그 옷이 맞지 않는다는 신호란다. 그럴 땐 과감히 그 옷을 벗어 던지렴. 남들 눈에 좀 멋없어 보일지라도 내가 입어서 편안하고,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을 찾아가는 과정. 그게 진짜 나를 찾아가는 진화의 과정이 아닐까?
편지를 쓰다 보니 사실 아빠도 정답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러니 아빠의 말을 율법처럼 받아들이지 말아라. 아빠와 다른 의견이라도 너희가 스스로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라면 그게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란다.
이만 줄이도록 하마.
사랑을 담아서,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