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은 몸이 보내는 신호란다

30년 뒤의 딸들에게 전하는 아빠의 타임캡슐

by 고도

나의 사랑하는 두 딸들에게.

오늘은 2026년 2월 19일 목요일, 설 연휴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날이다. 연휴 동안 우리는 할아버지 댁이 있는 대전에 다녀왔지. 슬이와 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무척 좋아한단다. 종종 만나는데도 하나도 어색해하지 않고, 이번에도 참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특히 진이가 할아버지와 유달리 더 친해진 것 같아서 아빠도 내심 뿌듯했단다.

보통 너희 할머니는 건강하신 편이라 명절 때 아픈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몸이 좀 안 좋으시다고 해서 아빠도 많이 걱정됐어. 게다가 최근 건강검진에서 골감소증으로 관리가 필요하다는 결과를 받으셨더구나. 그래서 아빠는 오늘 할머니께 챙겨 드실 영양제를 선물했어.

이번 연휴 동안에는 기억에 남는 일들이 몇 가지 있었단다. 아빠와 엄마의 대학교 후배 부부를 슬이와 함께 할아버지 댁 근처에서 만났어. 슬이는 오랜만에 본 상훈 삼촌과도 빠르게 친해지더구나. 요즘 슬이가 가끔 아빠 휴대폰으로 하는 '탕후루의 달인' 게임을 삼촌이랑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는 모습이 어찌나 재밌던지. 덕분에 아빠와 엄마는 나라 이모와 오랜만에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단다. 아빠가 너희에게 썼던 지난 편지에도 나왔던 그 '가면'에 관한 이야기를 깊이 있게 나누었지. 나라 이모도 그 주제에 푹 빠져들어 많은 속마음을 꺼내어 놓았고, 참 좋은 시간이었어.


할아버지와의 대화, 그리고 자서전

할아버지와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어. 안식년을 보내며 아빠 스스로 성찰했던 과거에 대한 반성들을 말씀드릴 수 있었단다. 최근 이렇게 글을 쓰면서 생각이 잘 정리되어 있었기에, 정돈된 말로 차분히 설명할 수 있었지. 그 이야기를 들으시며 할아버지도 옛날 생각이 나셨는지, 직장생활을 하며 상처받았던 일들을 많이 털어놓으셨어. 아빠도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었고, 할아버지 스스로도 누구에게도—심지어 할머니에게조차—하지 못했던 말씀이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대우'라는 회사에서 일하셨는데 당시엔 잘나가던 대기업이었단다. 어쨌든 할아버지는 운이 좋게도 일찍부터 사장님의 눈에 들어 최측근이 되셨다고 해. 그래서 지금 아빠 나이쯤에 소위 '끗발' 날리는 아주 잘나가는 자리에 계셨지. 그런데 IMF를 맞아 대우가 휘청이면서 할아버지의 신세도 갑자기 꼬이기 시작했단다.

회사가 은행 관리에 들어가자, 회사에는 은행에서 파견된 차장급 인사가 한 명 왔고, 그 분에게 최종 결재를 받아야 했대. 한번은 할아버지는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며 은행에서 파견된 인사와 다투셨다고 해. 회사 구성원들을 위해 소위 '총대'를 메신 거지. 사장까지 결재가 끝난 사안인데도 은행 측에서 태클을 걸며 사인을 해주지 않는 상황이었거든. 거기서 사인을 받아야 회사가 필요한 자금을 쓸 수 있었는데 말이야. 할아버지는 그때 분개하며 화를 냈던 것을 지금은 후회하고 계신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젊었고 나름의 의협심이 있었기에, 구성원들의 이익을 지키려 내셨던 화였던 것 같다.

하지만 어쨌든 그 일로 할아버지는 은행 차장의 눈 밖에 나버렸고, 할아버지를 쳐내기 위한 명분을 찾는 일들이 시작됐어. 할아버지가 아끼고 키워주려 애썼던 부하직원들마저 할아버지에 대해 나쁘게 말했고, 결국 여러 모함을 받아 한직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으셨다고 해. 그때 느끼셨을 그 배신감, 그리고 수치심에 대해 이야기하셨어.

이것 말고도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을 해주셨단다. 그 사건을 계기로 추락한 이후 회사를 나오시고, 회사라는 울타리 없이 처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쳤던 몸부림, 그리고 그때마다 겪어야 했던 것은 좌절과 굴욕의 시간들이었어. 아빠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지금의 아빠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았던 그때의 할아버지가 몹시 측은하게 느껴졌단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자서전을 써달라고 부탁드렸어. 할아버지도 마침 그런 생각을 하신 적이 있다며 한번 써보기로 하셨단다. 아빠가 이런 부탁을 드린 건,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나도 내 아버지에 대해 참 모르는 게 많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야.

우리 모두는 서로의 단편적인 면만을 보며 살아간다. 부모 자식 간에도, 부부 간에도 서로를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사람은 누구나 다차원적인 존재거든. 심지어 우리는 자기 자신조차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잖니. 그래서 문득 아빠는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그 깊은 내면이 너무 궁금해졌단다. 할아버지가 꼭 그 자서전을 완성하실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


기분은 정신이 아니라 신체적인 현상이란다

연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며칠 운동을 쉬어서 그런지 몸이 계속 처지더구나. 잠을 충분히 잤는데도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아 저녁에 피트니스 센터에 다녀왔어. 오랜만에 유산소 운동을 하면 이상하게 왼쪽 윗가슴이 욱신거린단다. 운동을 쉰 시간이 길수록 그 통증이 심해. 혹시 심각한 건 아닐까 싶어 기회가 될 때마다 심장초음파 검사도 받아보았지만, 늘 특별한 문제는 없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신기하게도 이 통증은 매일 운동을 할 때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단다.

아빠가 한창 번아웃과 자율신경계 이상으로 인한 어지럼증이 심했을 때, 정말이지 운동이라곤 하나도 하지 않았어. 점심시간에 바깥을 잠깐, 아주 천천히 걷고 오는 게 전부여서 운동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지.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아파트 피트니스 센터에 갔는데, 그때도 왼쪽 윗가슴이 너무 아프고 어지럼증이 심해서 무척 고생했단다.

그래도 꾹 참고 가볍게 뛰고,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나갔더니 점점 몸이 나아지면서 통증과 어지럼증이 사라져가더구나. 매일 숨이 다소 찰 정도로 운동을 하니 자율신경계 문제도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듯했어. 몇 달 동안 신경정신과 약을 먹고도 효과를 보지 못했는데, 며칠 꾸준히 땀을 흘리니 바로 차도가 생겼다는 게 무척 신기했단다.

그래서 아빠는 "기분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게 아니라 신체적이다"라는 말에 깊이 공감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기분은 신체 활동의 일부일 뿐이란다. 우리 뇌는 아주 잘 속아 넘어가서, 우울한 기분이 들면 그 원인이 될 만한 부정적인 사건을 자연스럽게 떠올려. 그리고는 '그 사건 때문에 내가 우울하구나'라고 착각하게 만들지.

하지만 이건 앞뒤가 바뀐 거란다. 우리 신체가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몸을 움직이지 않아 에너지가 처지기 때문에, 뇌가 이 우울한 기분을 합리화할 핑곗거리를 찾아내는 것뿐이야. 그러니 마음이 우울하고 처진다면 일단 몸을 움직여 운동을 하렴. 아주 심하게 할 필요도 없어. 적당히 숨이 찰 정도로 30분 정도면 충분하단다. 오히려 과도한 운동은 신체를 소모하는 거라고 생각해. 건강을 위해서는 '적당한 강도'가 가장 중요해. 그리고 이 적당한 운동을 마치 매일 하는 양치질처럼 너희의 루틴으로, 단단한 습관으로 만들길 바란다.

활기찬 강아지들을 떠올려 보렴. 에너지가 넘치는 강아지들은 매일 충분한 산책이 필요해. 운동량이 부족하면 스트레스를 받아 우울증에 걸린 것처럼 이상 행동을 하기도 하지. 사람도 마찬가지야. 저마다 필요한 운동량은 다르겠지만, 내 몸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활동량은 매일 반드시 채워줘야 한단다. 아빠는 이 강아지 비유가 참 마음에 와닿더구나.


피로를 경계하고 거리를 두는 법

마지막으로, 최근에 읽은 세네카의 <분노에 대하여>에 수록된 글귀가 아빠의 마음에 깊이 남아 너희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 아빠는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면 유독 화를 잘 내는 기질이 있단다. 가만 보면 우리 슬이가 아빠의 이런 예민한 기질을 다소 물려받은 것 같아서, 이 부분을 미리 주의하면 좋을 것 같아.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어.

"분노하기 쉬운 사람은 어떤 일에도 지나치게 몰두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피곤하고 지칠 정도로 몰두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마음의 악덕을 악화시키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하며, 몸이 피로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피로는 우리 안의 유순함과 온화함을 고갈시키고, 우리를 예민하고 날카롭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이 문장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단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원래 성격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저 '피로한 상태'일 확률이 높다는 거야. 피로는 마치 몸속의 염증과 같아서 실제로 우리를 아프게 해. 염증이 난 곳을 누군가 툭 건드리면 펄쩍 뛸 만큼 아프듯이, 내가 피로할 때 누군가 던진 말 한마디나 거슬리는 행동이 엄청난 통증으로 느껴지는 거지. 그러니 자연스럽게 짜증이 나고 화가 폭발하지 않겠니?

그러니 슬이야, 진이야. 세네카의 이 교훈을 마음 깊이 새겨두렴. 무슨 일이든 나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너무 깊이 빠져들지 않도록, 항상 약간의 거리를 둘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단다.

아빠가 지난 직장생활에서 겪었던 뼈아픈 실패의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 같아. 아빠는 일에 맹목적으로 몰입하고 자신을 갈아 넣는 것이 권장할 만한 미덕이라고 굳게 믿었거든.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것은 오히려 피해야 할 위험한 행동이야.

어떤 성취를 위해서라도 너희 자신을 피곤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몰아붙이지 말아라. 극도의 피로 속에서는 오히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할 확률이 훨씬 높아지기 때문이란다.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다정하게 돌보며 나아가길 바란다.


오늘은 이만 줄일게.

사랑을 담아서,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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