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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말함 Apr 24. 2022

라디오와 같이 사연을 읽어줄 수 있다면

   인상 깊게 읽은 기사 내용이다. 프랑스에 체류 중인 난민 청년이 발코니에 매달린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건물 외벽을 타고 올라가 아이를 구조했다. 이에 감명 받은 프랑스 대통령은 청년이 원할 경우, 그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하고 그를 파리의 소방관으로 특채하겠다고 밝혔다. 기사를 읽으며 난간에 매달려 4층까지 올라가는 청년의 근력과 용기에도 놀랐지만, '난민'이라는 단어가 개인의 선의를 얼마나 가리는지 새삼 놀라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난민이라는 단어를 듣고 상상하는 모습은 개별자의 사연보다는 고정된 이미지에 가깝다. 일자리를 빼앗아 경제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랄지, 이슬람 규범에 입각하여 지하드를 위해 언제 어디서든 테러를 가할 수 있는 존재랄지 하는 비합리적인 공포-여기서 비합리적인 것은, 모든 난민을 고정된 이미지로만 바라보는 시선이다.-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기사 속의 난민은 남들보다 측은지심이 발달한, 하여 매달린 어린아이를 보고 직접 나서서 구해야만 하는 용기 있는 청년이다. 이 사건을 통해 사람들은 그가 난민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 남들과 다른 유일무이하고 고유한 존재임을 발견했다. 그의 사연을 듣고 난민의 고정된 이미지를 떨쳤으며, 개별자로서의 그를 발견한 것이다.


   사연은 어디에나 많다. 나의 일터는 매년 부서 개편이 이루어진다. 4년간 이 곳에서 일하는 동안 나와 함께 일해본 사람들이 대부분의 부서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부서간 갈등이 생길 때 비공식적인 루트를 적극 활용하게 된다. 지금은 다른 부서에서 일하지만 예전에는 함께 일하며 안면이 튼 사람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며 오해를 풀고 각 부서의 진의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업무 협조를 요구하는 메시지만 보고도 일처리를 왜 이렇게 하냐, 배려가 너무 부족하다며 불평했던 내 모습에 무척 미안해진다. 사실 상대 부서에서는 어떠한 상황 때문에 협조를 요구할 수 밖에 없었으며, 협조를 구하는 것이 미안한 나머지 해당 업무의 이러한 부분들은 부서 내에서 알아서 처리했으며, 해당 업무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 않으나 상위 기관의 공문에 따른 것이라 어쩔 수가 없었으며 등등... 갖은 사연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듣다 보면 하나 하나 맞는 말이지만 타 부서의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한 나로서는 항상 너무나 빨리, 그리고 많이 화를 내버리곤 했다.


   근무년수가 쌓이면서 나는 업무상 조금 더 큰 책임을 지게 되었으며 그만큼 실수도 하게 되었다. 신입이니까 잘 모를 수도 있다는 변명은 유통기한이 지난 지 이미 오래지만, 내가 실수를 하고 민폐를 끼치게 된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가령 해당 업무의 담당자가 나에게 안내를 잘못 한 나머지, 중간에서 내가 잘못된 내용을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든지 말이다. 같은 부서의 선배들은 내 잘못이 아니라며 따뜻한 말로 마음을 보듬어주었지만, 나의 억울한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다른 부서 사람들을 생각하면 겁이 났다. 내가 사정을 알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화를 내버렸듯이, 누군가도 나의 실수에 대해 쉽게 화를 내고 나를 일 못하는 사람으로 단정지어버릴까 싶어서 무서웠다. 서로의 사연을 공유할 수 있다면 서로에 대한 각자의 이해의 폭이 조금 더 넓어질 테지만 그럴 수가 없었기에 아쉬웠다. 대신 남들을 볼 때 본의 아니게 실수를 했을 거라고, 어떠한 사연이 있을 거라고 너그럽게 여겨준다면 남들도 나를 조금은 더 이해해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타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 나아가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이해받고 싶은 마음은 보편적인 욕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억울하게 죽은 귀신이 지천을 떠돈다는 이야기가 나에게는 무척 현실적으로 느껴지고 또 무섭다.) 상대에 대한 정보가 부재하건 혹은 상대가 고정된 이미지의 전형이건 간에 그들의 사연에 닿을 수 있다면, 그들은 개별자로서 부각된다. 무지의 상대에 대한 억측과 오해가 사라지고, 고정된 이미지가 철폐되며 바로 그 사람만이 남게 된다. 각자의 사연은 상대를 개별적인 존재로서 입체적으로 그려내기 때문에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 깊이 있는 이해의 폭을 선사한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이해를 받으며 살아가고 싶을 거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사연을 알아주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누군가 나의 사연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남들에게 너그러운 태도로 대하면 어떨까? 국민 MC처럼 다른 사람에게서 사연을 이끌어내는 노하우도, 남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신통력도 필요 없다.(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필요와 상관 없이 일단 존재하지 않는다.) 일레인 스캐리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쉽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존재를 전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몹시 떨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도 어떤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과 그 사람 역시 남들과 다른 고유한 존재일 것이라는 상상력을 가진다면 우리는 조금 더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단언하건대 뿌린 대로 거둘 것이다. 김치를 만드신 우리의 빼어난 선조들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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