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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말함 Mar 27. 2022

솔직히 결혼은 하고 싶다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내가 결혼에 대한 단상을 읊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감도 있지만, 결코 경험하지 못한 이의 조바심과 기대감을 담아서, 때로는 기혼자의 코웃음을 유발하는 오해를 필연적으로 내포한 채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결혼이라 함은 수많은 사람 중에 나에게 꼭 맞는 상대를 단 한 명을 골라 평생을 함께 한다는 의무가 주어지는 시작점이며 그에 응당하는 책임감을 담보로 한다. 물론 누군가는 '단 한 명'과 '평생'이라는 개념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결혼 생활은 이혼과 재혼이라는 과정을 쳐 간헐적으로 유지될 수도 있기에 시기상으로만 겹치지 않는다면 '단 한 명'이 '여러 명'으로, '평생'이 '일정 기간'으로 교체 가능하며 현행 법을 통해 그 근거를 구체적으로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나의 입장에서는 한 번의 결혼 생활만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한 번도 어려운데 두 번 혹은 그 이상 씩이나! 이러한 마음가짐에 더하여, 주변에서 하나둘씩 결혼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늘면서 나 스스로 결혼에 대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


  내 경우, 결혼에 대한 압박감이 나를 괴롭게 하는 이유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의무 사항 때문은 아니다. 혼자서도 잘 놀고 혼자서도 편안한 나로서는 오히려 결혼을 해야 할 결정적 이유를 찾지 못했는데, 내 친구들에게도 있는 법적 남편-소울메이트, 평생의 친구, 내 편,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도 있으면 좋겠다는 다소 유치한 발상이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의 근거이다. 결혼을 할 만큼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어떤 기분이며 어떤 삶일지 정말 궁금하고, 알기도 전에 미처 갖고 싶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인데 이렇게 유치한 결혼관을 가진 나로서도 나름의 고충을 겪고 있다. 평생을 함께 살 수 있을 정도로 '어떠한' 상대를 만나야 한다는 부담감과 그 '어떠한'이 도대체 어떠한 것이냐는 고민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어떠한'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나로서는 결혼에 대한 압박과는 반비례하게 결혼 상대를 고르는 나의 안목에 대한 신뢰가 급감하고 있기에 연애도 어렵고 때로는 퇴행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내가 직전에 만났던 남자 친구는 참 자상하고 많은 부분에서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나도 그 남자 친구를 정말 사랑해서 이렇게 만나다보면 자연스레 결혼을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는데, 애석하게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헤어지게 되었다. 나의 어머니는 나에게 크게 간섭을 하지 않는 대신에 본인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정말로 아닌 몇 가지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강력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분이다. 그런 어머니가 내 남자 친구에 대해 어떤 점을 지적하셨고, 만약 결혼을 할 생각이라면 절대 반대할 수 밖에 없다고 입장을 밝힌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데다가 어머니의 지적에 별다른 반박을 할 수 없었던 나로서는, 몇 개월 간 고민하고 또 (어머니, 당시의 남자친구와도) 대화를 나눈 끝에 이별하게 되었다. 결혼이 다소 먼 인생의 미래였을 어린 시절의 나였다면 과연 이렇게 이별하게 되었을까? 생각할 때마다 씁쓸했다. 30대가 되고 보니, 이별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연애는 결혼을 향한 하나의 과정처럼 기능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연애를 할 때에도 결혼과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게 참 어려웠다. 일단은 만나다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내 연애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어머니가 결혼에의 가능성을 먼저 제시하며 반대를 하는 장면을 실제로 경험한 이후에는 만남 앞에 다소 소극적인 자세가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두 번째 고민이 이어진다. 도대체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가? 그의 '어떠한' 점에 내가 반응해야 하는가? 아직도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나 자신이 솔직히 한심하다. 그러나 좋은 감정만으로 연애를 섣불리 시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부모님이 상대를 보았을 때 탐탁치 않아 할 정도가 아니라-물론 자식 가진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자식이 어여쁜 나머지 대개 탐탁치 않은 반응이 대부분일 것이라 예상한다.- 적어도 안된다고 반대하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나?    


  세상에 100%의 사람은 없다. 나도 그렇고 훗날 내 옆에 있을 그도 그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상대의 부족한 점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덕목이 요구된다. 이를 전제로 한 사람을 이루는 특성을, 몹시 주관적인 기준에 근거하여 3개의 집합으로 분류해보자. A는 내 마음에 드는 그 사람의 특성, B는 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그 사람의 특성, C는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도저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없는 그 사람의 특성이다. 아주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A≥#B이고 C={}인 경우에라야 만남이 성사될 것이다.


  앞서 말한 '어떠한'의 문제는 각자의 기준에 따라 상대의 영역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나는 다년간의 연애 경험을 통해 A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겠으나-정직하고 대화가 잘 통함, 선하고 따뜻함 등 인격적인 면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짐- B와 C가 상당히 헷갈린다. B와 C 모두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지만 그것을 내가 이해하고 그 사람의 일부로 수용할 수 있는지, 혹은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냥 인내하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실제로 내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던 이유도 단순히 어머니의 반대 때문이라기보다는 B로 인지한 부분이 C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인 것도 있다.


  연애 침체기의 나는 도리어 옛날 어른들처럼 얼굴도 모르는 채 중매를 서서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부모님이 연애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것은 아마도 내가 적당한 상대를 알아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과, 혹시라도 정말 결혼 상대를 제대로 고르지 못했을 경우에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게 주어진 특별한 선택의 기회와 엄청난 자유를 허비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조금은 기쁜 마음으로, 내 곁에 올 그 사람을 기다리고 맞이할 수 있도록 나부터도 '어떠한' 사람이 되고자 열심히 하루 하루를 살아내자. 그리고 만약 '어떠한' 사람이 없으면 또 어떠한가. ABC의 버뮤다 삼각지대에 빠져 용기를 잃기엔 지금 여기 혼자서도 충분히 즐겁고 넉넉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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