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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말함 Apr 03. 2022

안전한 사회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자신이 서 있는 공간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 때의 안전이란 어떤 재해나 위급 상황으로부터 신체가 보전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존재가 함부로 부정당하지 않고 무심결에 어떠한 공포를 느끼지 않아야한다는 의미이다. 즉, 한 개인이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내보이더라도-물론 그것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타인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 한- 어떠한 위협과 부정을 당하지 않고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음과 실제로 그러함이 모두 필요한 것인데 이는 헌법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명시된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현재, 안전한가?  


 

1. 위협하는 사회  

  얼마 전, 운동을 마치고 늦은 밤 혼자서 집으로 걸어가던 도중 한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핸드폰을 보며 걸어가던 한 여자를 발견하고는 그녀를 뒤따라 가서 끌어 안아버렸다.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나 역시 너무나 놀란 나머지 소리 조차 지를 수 없었는데 사실 잘 살펴보니 그 남자는 그녀의 남편/남자친구였다. 나의 공포심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임 당했던 이른바 강남역 살인 사건 때 희생자를 추모하는 포스트잇 중 하나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우리는 운이 좋아 살아 남았다.' 나는 이 글귀를 접한 이후로 종종 피해 여성을 떠올렸다. 내가 운이 나빴더라면, 내가 그 순간 화장실을 이용했더라면, 가정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또 최근에는 거리를 걷던 100여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비비탄 총을 발사하여 상해를 입힌 사건도 있었다. 범죄의 가해자가 주로 남성이고, 피해자는 여성이므로 남성은 잠재적인 범죄자라는 식으로 남성에게 또다른 혐오를 되돌려주는 식의 논리 전개는 하고 싶지 않다. 물론 홍성수 교수는 본인의 저서 <말이 칼이 될 때>에서 여성 혐오는 남성 혐오와 달리 공포와 불안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여성에 대한 일상적 폭력이 뿌리 깊 존재해왔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회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는 점이다. 성별을 넘어 각각의 개인으로서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사회에서 자꾸만 편을 가르고 본질을 흐려 서로를 미워하게 만드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다. 여성은 남성이 아니고 남성은 여성이 아니기에, 여성 혹은 남성 당사자로서 느끼는 경험과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만큼 서로의 경험과 감정에 대해 알아가며 건강한 공존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다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되고 나아가 물리적인 위협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인 일련의 경험 속에서 여성으로서의 무기력함과 여성으로 사는 것의 위험성을 학습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지금의 사실이다.  

 


2. 부정하는 사회   

  최근에 영화 <윤희에게>를 보았다. 김희애를 비롯한 배우들의 호연과 섬세한 연출이 돋보이는 수작이었다. 특히 윤희가, 사랑하는 사람인 쥰과 우연히-사실은 철저한 계획에 의거하여- 마주치는 순간부터 나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윤희와 쥰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지극히 당연하고 오묘한 일이다. 그런데 윤희의 가족은 윤희가 쥰을 사랑한다고 말하자 윤희를 병에 걸린 것처럼 취급하여 급기야는 정신병원에 가두고 만다. 왜 제3자가 윤희의 사랑을 감히 판단하고 또 감히 부정하는가. 그 결과 윤희는 자신에게 주어진 여분의 삶을 '벌'처럼 느끼며 살아왔다. 윤희는 스스로에 대해 쥰 만큼 용기가 있지는 않은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사랑에 필요한 용기는 다른 사람들의 부정을 극복할 용기가 아니라 내가 사랑에 최선을 다하기 위한 용기인 것이다.  


  2017년 대선 후보들이 벌인 TV 토론에서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동성애에 반대하느냐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의 질문에 대해 반대한다고 답변했다. 이 대화는 아주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맴돌았는데 제3자가 다른 누군가의 사랑에 대해서 그 사랑에 찬성한다거나 반대한다거나 하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가? 우리 누구에게라도 다른 이의 사랑에 관여할 권리가 과연 있을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당신의 사랑은 잘못되었다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성적 지향에 대한 이견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부정이고 심각한 기본권 침해이다.   


  나아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과연 성별이 중요한가 하는 의문이 든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는 내가 여자인데 저 사람이 남자라서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떠한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성별도 매력으로 여겨질 수 있는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점에 매력을 느끼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런데 여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윤희의 사랑은 전면적으로 부정당했고 박탈당했다.   

 


  내가 나의 모든 정체성과 지향을 드러내고 살아도 거리낄 것이 없는 사회를 꿈꾼다. 한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다른 이의 존엄한 삶을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지점에서 나 자신의 언행에 대해서도 되돌아본다.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느낌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사회에서 배제되어 안전히 살아갈 수 없다는 걱정을 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정의롭지 못한 위협 행위이자 폭력 그 자체일 것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타자를 배워야 한다. 나와 다른 이들을 존중하는 방법을, 그래서 공존의 조건을 마련하는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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