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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반맨 Dec 04. 2022

가족주의

49금 인문학 사전 06.

40여 년 전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나는 은퇴할 때까지 여러 번 '가족'을 바꾸는 패륜적(?) 경험을 했다. 처음에는 'L 기업 가족'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몇 번의 손바뀜 끝에 'D 기업 가족'으로서 사회적 career를 마쳤다.
(이건 순전히 그들이 자꾸 가족이라고 우기는 바람에 그렇게 된 사정이 있지만..)
내가 가족을 자주 바꾼 탓일까?
이제는 은퇴를 하여 명실상부한 가족의 품에 안기는가 싶었는데 가족들이 반겨주지 않는 눈치다.
때늦었지만 이제야 나는 어떤 경우에 '가족'이란 단어가 사용되는지를 알게 된다.
즉 '경제적, 심리적 보상은 작더라도 무한의 의무감과 충성심으로 희생을 감내할 의지와 능력을 갖춘 구성원' 그것이 그들이(회사 조직이든 호적상의 가족이든) 내게 적용했던 가족의 개념이다.
그러니 이제는 써먹을 데 없이 살림만 축내는, 부담스러운 존재로 돌아온 왕년의 가족이 달가울 리가 없다.


euenio zampighi(italian), A happy family

글을 시작하자마자 큰 주제에서 벗어나는 얘기를 하는 것이 거시기 하지만, 가장들이 가족 내에서 소외되는 현상이 주위에 만연하다.
자업자득이지만 가족들에게 평생을 희생했다고 주장(!) 하는 가장들의 입장에선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대략 상황은 이러하다.
아이들과 아내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물론 나도 바로 옆에서 오가는 얘기를 듣고 있긴 한데, 문제는 그 주제가 대체로 내가 관여할 여지가 없거나 또는 관여하길 바라지 않을 내용의 것들이다.
문득 나는 그들과 시공간만 함께 할 뿐, 삶을 함께 하는 공동운명체는 아니라는 소외감에 젖게 된다.

몇 년 전에 내가 읽은 소설 중에 이런 상황을 소재로 삼은 것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 실직을 하고 아내와 자식들에게서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는 수모를 견디다 못해 아예 주도적으로 투명인간 행세를 하여 문제를 일으킨다는(가족들이 자기를 볼 수 없다고 전제하고 제멋대로 거림낌 없이 행동하는 등) 내용의 소설이다.
직장을 핑계로 가정을 등한시하다가 집에 들어앉게 되는 은퇴 가장들의 애환과 소외감을 잘 묘사했다고 생각하며 읽었던 기억이 있다. 


다시 큰 주제로 돌아간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라고 할 때 그 '사회적'의 가장 근원적이고 기본 되는 단위가 바로 '가족'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가족한테로 '내던져지는즉 披投性의 존재'다.
(피투성이의 존재가 아니라ㅎㅎ)
나의 선택은 당연히 아니고, 누구의 선택도 아닌 오로지 하늘의 선택으로 한 가정에 태어나서 그 구성원이 되는 게 인간이다.
하여 가족이란 것은 애초부터 정해진 관계로 설정되며, 선택하거나 기피할 수 없는 환경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강조했다.
물론 수신이 앞에 오지만 인간 사회의 기본적 구성체인 가족을 잘 꾸려내는 것이 천하를 이롭게 하는 바탕이라고 생각했다.
내리사랑(慈愛)과 치사랑(孝行)이 순환하는 사랑의 장소로서 '가정'을 사회를 유지하는 정치 행위의 기본으로 본 것이다.
게다가 치사랑은 오직 인간만의 행위이다. (개. 돼지가 자기의 선대 즉 부모 개돼지를 모시는 것 봤는가?) 그래서 공자는 孝行을 유독 강조했고 인간다움의 근본으로 삼았다. 이런 연유로 유교사상은 한국이나 동아시아 국가들이 예외 없이 가족주의에 집착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동양 사람 공자만 그랬던 건 아닌 듯하다.
서양 사람 가브리엘 마르셀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던 게 아니라) 관계가 있었다'라는 신념으로 '가족'이라는 상호적 관계의 개념이 '나'라는 주관적 개념보다 앞선다고 했다.
내가 있어서 가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이며, '나'의 의미와 가치는 '가정'으로부터 비롯되며, 가족이란 '나의 존재적 확장'이며 '긍지의 산실'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님을 뛰어넘는, 서양을 대표하는 어마 무시한 가족주의자가 분명하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으로서 당연해 보이는 '가족주의'를 엄청 까댄 사람도 많다.
엥겔스는 가족이야말로 가장 불평등한 조직이며 또한 '관계'로서, 필히 해체되어야 할 대상이라고까지 했다.
(혹시 마피아가 조직을 'family'라고 하니까 '가족'을 조폭 조직으로 착각을 한 건 아닐까ㅎㅎ).
플라톤께서도 모든 불평등이 가족에서 비롯되며, 사유재산 등 개인적 이익을 만들어내는 핵심 요소라고 봤다.
말하자면 DNA, 재산, 교육의 3대 불평등이 유발되는 곳이 가족이라고 본 것이다.


대한민국의 누군가는 '가족'을 세상에 몹쓸 관계로 비판한다.
인용해 본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적인 제도, 가장 부패한 제도, 가장 비인간적인 제도는 가족이다. 가족은 곧 계급이다.
교육 문제, 부동산 문제, 성차별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富 뿐만 아니라 문화 자본, 인맥, 건강, 외모, 성격까지 세습되는 도구다. 간단히 말해, 萬惡의 근원이다." 맞는 말씀이긴 한데, 혹시 이분이 요즘 가족 때문에 엄청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연예인 누구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가족'을 문제시한다.  

추가로 '개인의 서사가 상실된 장소'라는 글을 인용한다.
"온전하고 이상적인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행복을 향한다기보다는 불행을 불사하는 쪽으로 기울곤 한다.(중략)
가족은 형식을 완성하기 위하여 강조되어 왔으며, 가족 구성원은 그 역할극에 심취해 있다.
가족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에게 개입하며 그 개입을 정당한 충고라 자부한다.
개입이 난무할수록 애정으로 똘똘 뭉쳤다는 자부심도 커져간다.
서로를 선택할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에, 좋아할 수 없는 사람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가 가족에게는 있다." 
구구절절 동감이다.

특히 부모 자식 간은 일방적이고 상하적이며, 도덕과 윤리가 가치의 잣대가 되면서 이성과 합리성을 잃기 쉽다.
대체로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종종 비이성적이고 무조건적이고 폭력적인 관계가 되기도 한다. 내리사랑과 치사랑은 방향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양과 기대치가 다르니(사랑도 양으로 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주 반목과 갈등의 원인이 된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상대에게 무조건적이고 무한정한 사랑과 희생을 요구한다. 형제자매 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부모 자식 간은 전생에 악덕 채권자와 채무자 관계였다 하고, 형제자매간은 둘도 없는 라이벌 사이였다는 말이 생기게 된다.  


가족주의의 문제는 '가족 자아 family ego'에서 비롯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족을 자신의 자아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기러기 아빠들이 자식들을 자아실현의 대상으로 삼아 연봉을 탈탈 털다 못해 대출까지 받아서 자식들 유학 보내며 올인하다 결국 '빈 둥지 증후군 empty nest syndrome', '닭 쫓던 개 증후군'에 시달리며 불행한 노후를 맞는 것이 극단적인 형태의 '가족 자아'의 문제이다.
빠듯한 살림에 자식새끼는 제대로 키워보자며 파출부로 이집 저집 전전하는 엄마들 또한 자식의 출세를 자신의 자아실현 과제로 생각하며 고달픈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이런 현상이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문제뿐만 아니라 '인구 절벽'의 시대를 만들어낸 것이다. 

또 하나 가족과 관련된 새로운 문제로 '가정의 비즈니스화'를 꼽는다.
가정이 비즈니스 모델을 따라 변화해가는 현상을 말하는데,
전자레인지로 조리된 '밀키트'와 배달 음식이 집에서 손수 만든 '집 밥'을 밀어내고,
엄마 아빠가 읽어주던 동화책은 '동영상'으로,
엄마품에서 이뤄지던 유아교육은 일찌감치 '어린이집'에서 처리가 되며,
아빠와 하던 공차기조차 동네 학부모 모임에서 전문강사들을 불러서 해결하는,
말하자면 부모가 직접 감당하던 가정 내의 활동들이  외부 네트워크를 통해 극도의 효율을 추구하며 돈으로 해결되는 방식을 말한다.  

어찌 됐든 가족은 누구에게나 삶의 기원이며, 모든 활동의 기반이 되는 곳이다.
태어나서 성인이 되기까지도 그러하지만, 배우자를 만나 자기만의 가정을 꾸리게 되면 더욱더 중요한 삶의 터전이 바로 가정이고 가족이다.
그 가족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임은 '가족주의'에 대한 그 어떤 비평에도 불구하고 진리라고 생각한다.
외국의 어떤 늙은 신부님(?)께서 했던 기도 말씀을 소개한다.
"저는 우리 집이, 신이 주신 생의 꽃밭에서 내가 누구인가, 나를 '여보'라고 부르는 아내는 누구인가,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이들은 과연 무엇인가, 그들 속에 어떤 신성이 자리 잡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가정이기를 바랍니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하나 덧붙인다.
"부모로서 가장 우매한 일은 자식을 자신의 자랑스러운 사람으로 키우려 하는 것이다."
현명한 부모는 자신이 자식들의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려 한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자식들에게 자랑스러운 부모였는지 되돌아보며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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