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물건 하나 소개
오늘 제시된 글감을 보자마자 한 권의 책이 떠올랐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1985년, 브라질 작가 J.M. 바스콘셀로스가 쓴 이 책을 처음 만난 건 어린 시절이었다.
애지중지 보관한 것도 아니고, 늘 곁에 두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장 먼저 생각난 이유는 무엇일까.
누렇게 바랜 종이와 빼곡한 작은 글씨는 세월의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감수성 예민했던 다섯 살 꼬마, 제제가 있었다.
몇 번의 이사와 3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이 책은 여전히 내 책장 한켠을 지키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소중했던 것.
그 시절의 나는 제제와 닮아 있었다.
작은 라임오렌지나무에게 ‘밍기뉴’, ‘슈르르까’라 이름 붙여 속삭이던 제제를 보며, 나 역시 어릴 적 사물에게 인사하고 말을 걸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무와 동물에게 “안녕~” 하고 말을 걸던 아이.
엉뚱하지만 사랑받고 싶었던 아이.
그래서였을까. 포르뚜까 아저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제제가 겪은 충격과 변화는 내 일처럼 가슴 아팠다.
그때는 몰랐지만, 제제는 동심을 접고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항상 주목받고 싶었다.
딸 셋 중 둘째였던 나는 이리 치이고 저리 밀렸다.
“나 좀 봐주세요.” 나만의 방식으로 신호를 보냈지만, 가족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말썽꾸러기, 사고뭉치가 되었다.
그렇게라도 내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다.
조금 더 자라면서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는 약하고 안타까운 사람처럼 느껴졌고, 나는 엄마를 지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도 나는 가족들이 이해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사고를 계속 쳤다.
한 번은 몰래 햄스터를 데려왔다.
방에서 탈출한 녀석이 부엌에 나타나자, 엄마는 “쥐다!” 외쳤고, 아빠가 놀란 마음에 쳐내려다 그 생명이 죽을 뻔했다.
또 한 번은 아무 말 없이 강아지를 데려오곤 출근해버렸다.
처음엔 “짖어서 안 돼. 데려다 줘” 하시던 엄마는 내가 없는 동안 밥을 챙기고 산책까지 시켰다.
목줄 없이 산책하다 귀엽다고 불러대는 사람들 소리에 예삐가 쫓아가버렸을 때, 엄마는 “이 똥개 녀석~” 하며 웃으셨다.
그러다 결국, 가장 큰 사고를 쳤다.
스무 살.
고등학교 3학년 취업으로 다니던 회사에서 만난 사람과의 연애, 그리고 임신.
그 사실을 전할 용기가 없어, 출근길 현관 앞에서 한 마디 툭 던졌다.
“엄마, 나 임신했어.”
말을 마치자마자 도망치듯 집을 나섰고, 퇴근 후 아무 말 없는 엄마를 보고 못 들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저녁 식사 후, 엄마는 조용히 물었다.
“아침에 한 이야기… 그게 무슨 말이야?”
하루 종일 아무 일도 못 했다고, 손이 덜덜 떨렸다고 하셨다.
나는 그제야 자세한 이야기를 꺼냈다.
사랑받고 싶었던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보지 못한 채, 나를 예뻐해주는 그 사람에게 빠져 있었다.
엄마는 내 인생을 걱정해 낙태를 권하셨지만, 이미 초음파로 형태를 확인한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울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딸 가진 게 죄’라던 부모님은 사람들의 시선을 걱정하며 빠르게 결혼을 진행하셨고, 나는 결혼 후 4개월 만에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결혼, 이혼, 홀로서기.
만남과 헤어짐, 그 후의 삶.
죽을 것 같은 시간도 있었지만, 살아 있으니 살아졌고,
그러다 보니 웃을 수 있었고,
어느 순간엔 행복도 느껴졌다.
그게 삶이라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제제도 그랬을 것이다.
죽을 것 같은 아픔 속에서도 살아야 했기에, 마음 한켠을 접어두고 어른이 되었겠지.
지금 다시 그 책을 펼친다면, 아마 나는 또 울게 될 것이다.
어린 제제와 어린 내가 그 안에서 다시 만나, 서로의 손을 꼭 잡을 테니까.
제제, 너를 기억해.
언제나 네가 나였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