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가평에서 만난 세 인물]
전근룡 교수님과 함께한 조선 정치사의 현장을 돌아보며....<좌충우돌 인생2막 63호. 2025.9.18>
고려시대부터 버드나무 뿌리 '양근(楊根)'에서 유래한 양근군, 그리고 지평 막걸리로 유명한 지평현이 1908년 9월 통합되어 오늘의 양평군이 된 양평(楊平)과, 신라 경덕왕 때부터 '아름다운 평야' 혹은 '넓고 평화로운 땅'으로 불린 가평(嘉平/加平). 가을 역사탐방 시리즈로 찾은 고장은 바로 이 두 고장이었다.
이번 역사탐방은 고향 두물머리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덕연인문경영연구원 한영섭 원장님이 주관하였고, 강의는 '역사강의계 공인 2타, 자칭 1타' 전근룡 교수님이 맡으셨다.
아침 9시 정각, 종합운동장에 모인 40명의 탐방객들은 환한 미소와 설렘으로 버스에 올랐다. 서울의 젖줄 한강을 바라보며 첫 답사지로 향하는 동안,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헌신하신 삼성·전경련의 큰 어른, 특히 최근 이승만기념관 설립을 선도하시는 손병두 회장님과 여사님, 재능기부로 멋진 사진을 찍어주시는 백맹기 작가님, 은은한 시 낭송으로 마음을 울려주시는 엄경숙 교수님까지 함께해 여정은 한층 따뜻하고 풍성했다.
이번 탐방에서 특히 마음에 남은 세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보고자 한다. 김육 선생의 대동법 정신, 몽양 여운형 선생의 독립 의지, 그리고 남이장군의 비운의 삶이다.
○ 김육 선생의 개혁정신
첫 답사지는 대동법 김육 선생의 개혁정신이 남아있는 선정비였다.
"김육 선생은 조선 중기 실학자이자 개혁 관료였습니다. 그가 추진한 대동법은 단순한 세제 개혁이 아니라 조선 사회 구조 자체를 바꾸려 한 대혁신이었죠."
전근룡 교수님의 설명이 바람결에 스며들었다. 기존 공납제는 지방에서 토산물을 현물로 바치는 제도였다. 현실과 동떨어진 폐단이 많아, 예를 들어 강원도에서 감귤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처럼 주민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안겼다.
대동법은 이를 쌀이나 베, 돈으로 대신하게 해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김육 선생이 위대한 이유는 단순한 세금 방식 변경이 아니라, 상업 발달과 화폐경제 활성화를 꾀해 조선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했다는 점입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이후 파탄 직전이던 국가 재정을 바로 세우려 했던 그의 고뇌가 비석 앞에서 절절히 다가왔다. 하지만 선정비 앞은 현재 콩과 고추밭으로 쓰이고 있었다. 후손들의 관리와 보존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주차장 버스를 향해 흙길을 밟으며, 교수님과 함께 김육 선생의 정신을 다시 음미했다. "조세정책에 가장 효율성을 창시했다는 측면에서, 재경부 세제실이나 국세청 등 당국에서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선현의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며 선정비 주변을 숭조의 마음으로 관리하면 좋겠습니다."
○ 몽양 여운형의 독립 의지
두 번째 답사지는 몽양 여운형 기념관이었다.
"몽양 여운형을 좌익·우익으로 단순히 나누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일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교수님의 첫마디와 함께 몽양 기념관 관장의 강의를 직접 들으며, 지금까지 상식으로 알고 있던 나의 고정관념이 흔들렸다.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3·1 운동을 국제적 성격으로 확산시키려 노력하며,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도록 한 선생의 국제적 안목.
일제 말기 황민화 정책 속에서도 몽양은 민족을 지키기 위해 위험한 줄타기를 선택했다. 해방 직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해 좌우 합작 통일정부 수립을 꿈꾸었지만, 좌익은 그를 온건하다 비판했고, 우익은 공산주의자라며 공격했다. 결국 1947년 7월 19일, 그는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어제 기념관을 걸으며 몽양에 대해 새로운 인상을 받았다. 그동안 좌익으로만 배웠고 나 또한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 교수님 강의와 기념관 방문을 통해 몽양의 독립투쟁에 고마운 마음이 생겼다. 몽양 선생의 외로운 발걸음과 좌우의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결연한 의지가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하지만 마침 오늘(2025년 9월 13일)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의 '임정자료로 알아본 대한민국 건국' 기사를 보며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1945년 9월 6일 여운형과 박헌영이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설립을 선언했다는 내용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개성공단에서 3년 1개월 근무한 경험자로서, 그리고 현재 '개성공단 1188일 기억'을 연재하고 있는 입장에서, 몽양이 선언한 그 '조선인민공화국'이 지금의 북한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은 의문이 든다. 같은 '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이지만, 몽양이 꿈꾼 통합된 조선과 현재의 분단 현실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을까?
어제 느꼈던 몽양에 대한 좋은 인상과 오늘 신문 내용이 머릿속에서 혼란스럽게 교차한다. 역사 인물을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닫는다.
○ 남이장군의 비운
이항로 선생 생가를 잠시 둘러보고, 우리는 남이장군 묘역으로 향했다. 나룻배를 타고 5분, 남이섬 선착장에는 능소화가 반겼다.
남이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딸 정선공주의 외손으로, 왕실과 깊이 연결된 인물이었다. 스물다섯에 병조판서, 오늘날의 국방부 장관 자리에 올랐고,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며 젊은 나이에 장수로 이름을 떨쳤다.
남이장군의 시 한 수가 그의 뜨거운 포부를 보여준다.
白頭山石 磨刀盡
頭滿江水 飮馬無
男兒二十 未平國
後世誰稱 大丈夫
백수산석 마도진
두만강수 음마무
남아이십 미평국
후세수칭 대장부
익히 알고 있듯이,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라
남아 20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누가 후세에 대장부라 칭하리오
그러나 이 시는 권력의 눈에 걸린 자들에 의해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훈구대신들과 함께 간신 유자광이 '未平國'을 '未得國'으로 왜곡해 역모로 몰았다. 세조 사후 예종이 즉위하며 상황은 더 불리해졌고, 남이는 스물여덟, 꽃다운 나이에 처형당하고 말았다.
전근룡 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묘역 사이 흙길을 조심스레 걸었다. 발밑의 흙과 바람결 속에서 남이장군의 뜨운 포부와 비극적 삶이 교차하며 마음 깊이 울림으로 다가왔다.
○ 역사 앞에서 갖는 성찰
발걸음을 은행나무와 메타세쿼이아 길로 옮기며, 남이나라 공화국 남이섬에서 북한강물 위를 나는 백로 한 쌍을 바라보았다. 김육의 대동법 개혁, 여운형의 통합 의지, 남이장군의 젊은 포부. 시대는 달랐지만 모두 나라를 향한 큰 뜻을 품은 인물들이었다.
과연 태평성대는 어떤 정치 지도자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까? 국민 모두가 행복한 '민복(民福)의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
전근룡 교수님 말씀처럼, "역사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역사 인물들도 그 시대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려 했을 것이다. 완전한 선악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 역사이고, 그래서 더욱 끊임없는 공부와 성찰이 필요하다.
짧지만 깊은 여운을 준 역사탐방이었다.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는 말을 마음에 새기며 돌아온다.
2025.9.13 버들뿌리 양평 아름다운 평야 가평 남이섬에서
윤석구, 한국열린사이버대 특임교수 경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