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명함, 마음을 두드리다]
《좌충우돌 인생2막 72호. 2025.11.20》
최근 통일부가 개성공단 재개 등 남북경제협력사업을 고민하고 있다. 마침 필자는 지난 6월부터 ‘개성공단 1188일의 기억’ 주제로 계룡일보에 하루 한 편씩 연재해오고 있다. 오늘 현재 152편 중 지난 10월 29일 129편, “북측 땅에서 처음 받은 명함 한 장의 의미”를 쓰며 영업직 시절 무수히 뿌리던 명함과 마주했던 기억이 떠올라 좌충우돌 인생 2막에 옮기지만 마음 한편에 오래 남겼다.
황희정승 반구정에서 바라본 개성공단의 향하는 송접탑
2006년 가을 개성공단 우리은행을 방문한 북한 조선국제보험회사 최광철이 명함을 건넸다. 북측 인사가 남측 아니 우리 대한민국 국민에게 명함을 건넨 사례는 매우 드물었다.
어느 날 최광철과 직원 다섯 명이 지점에 들어왔다. 개성공업지구법 보험 규정에 따라 125사 입주 기업들에게 화재보험, 자동차보험, 영업배상책임보험, 단체상해보험 등을 권유하려 왔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명함을 내밀었다.
북측 사람에게서 받은 이름과 소속이 적힌 명함이었다. ‘나 이런 사람이오’ 하고 자신을 드러냈다.
순간 나는 멈칫했다. 그동안 북측 사람과 만날 때는 이름만 듣고 얼굴만 봤을 뿐 명함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명함에는 이름과 소속, 전화번호, 심지어 전자우편 주소까지 꼼꼼히 적혀 있었다.
자본주의 영업의 기본 도구인 명함이 북측 사람 손에서 내게 건네졌다.
서울에서 금융상품을 팔던 영업사원 나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최광철 북측 영업사원은 정중하게 보험 상품을 설명했다.
화재보험, 자동차보험, 재해보험 등 입주기업이 가입해야 할 보험을 하나씩 짚으며 권유했다.
명함을 돌리고 상품을 설명하고 가입을 권유하는 모습은 여느 보험 영업사원과 같았다.
앞으로 그는 명함을 지참하고 공단 입주기업을 찾아다닐 것이다.
“보험 가입하셨습니까?” 하고 묻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북측에도 ‘영업사원’이 태어나고 있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보험에 가입하면 실제로 사고가 나면 보험금을 제대로 지급할까.
북한의 보험회사는 어떻게 운영될까.
자본과 준비금은 충분할까. 재보험은 가입되어 있을까.
보상 심사는 누가 하고 분쟁이 생기면 어떻게 해결할까.
남측 기업들이 북측 보험사를 믿을 수 있을까.
명함 한 장이 던진 질문은 끝이 없었다. 그러나 변화는 분명했다.
2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북측 사람이 명함을 돌리고 상품을 설명하고 계약을 권유하다니.
제도가 완벽하지 않아도 신뢰가 충분하지 않아도 그들은 배우고 있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기본 도구를 배우고 있었다.
명함 한 장, 작은 종이 속에 담긴 변화의 신호를 보여주었다.
개성공단에서는 그런 작은 변화가 매일 일어났다.
돌이켜보면 직장생활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직급과 포지션을 거치며 새로 손에 쥔 명함마다 감사했다.
명함은 내 정체성을 증명하고 나를 세상에 드러내는 도구였다.
그런데 그 감사의 마음을 북측 보험 영업사원에게서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가로 7cm, 세로 4cm.
손안에 쏙 들어오는 이 작은 종이 한 장이 이름과 소속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새로운 변화를 알렸다.
임기를 마칠 때까지 북측 인사로부터 받은 명함은 그 한 장뿐이었다.
나는 그 한 장을 기념비처럼 명함집에 간직하며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개성공단에서의 기억이 가을 햇살처럼 조용히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날 최광철의 명함 한 장이 내 마음을 두드리며 조용히 빛나는 것을 느꼈다.
윤석구 한국열린사이버대 특임교수 경영학박사
참고. 계룡일보 연재 123호 (
2025.11.19)
http://www.gyeryong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54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