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에서 온 감사편지]<좌충우돌 인생2막 74호. 2025.12.4>
※ 한국디지털문인협회 "내 인생시리즈, 8번째 내 인생 최고의 열정" 공동문집에 "하늘에서 온 감사문자" 주제 한 꼭지 함께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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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10월, W은행 상암동지점의 오후는 늘 분주했지만, 그날은 유난히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어머니와 아들의 얼굴에는 간절함이 어른거렸다. 장기전세임대아파트, 일명 ‘시프트’. 서울 변두리 땅이지만 서민들에게는 인생을 바꿀 기회였다.
“저희 아들 아빠 명의로 시프트에 당첨됐는데요….”
그러나 어머니의 다음 말에 사무실 공기가 잠시 멈췄다.
아들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셔서 거동도 못 하시고, 인지 기능이 거의 없으셔서 서명도 어렵습니다.”
대출약정서는 본인의 직접 서명이 절대 조건이었다. 금융의 철칙이다. 어머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 눈빛은 더욱 절망적이었다. 한 가족의 삶을 바꿀 기회가 단 한 가지 규정 앞에서 멈춰설 수도 있는 순간, 어머니는 아들 옆에서 간절함만 실은 채 말을 이어갔다.
그때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제가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아버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 서명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머니의 눈가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
며칠 뒤였다. 차가운 바람에 흔들리는 한강을 바라보며 성수동으로 향했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골목길을 걸어 작은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침대 곁을 지키고 있던 박정희 사모님이 미소로 맞아주셨다.
“어서 오세요, 지점장님.”
사모님은 10년째 남편을 간병하고 있다고 했다. 눈만 깜빡이시는 남편 곁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온 시간, 피곤이 쌓인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깊고 맑았다.
“그래도 이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저는 행복합니다.”
그 조용한 말은 오랜 믿음의 무게를 품고 있었다.
대출약정서를 펼쳤다. 남편분은 자필 서명이 거의 불가능했다. 사모님은 남편의 손을 조심스레 들어 올리고 자신의 오른손으로 감쌌다. 나는 그 손을 다시 받쳐 종이 위로 살며시 내렸다. 한 획 한 획이 어렵게 내려앉았다.
잉크보다 뜨거운 것은 손끝에서 전해지는 체온이었다. 남편을 바라보는 사모님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혔고, 두 사람의 온 힘이 서류 위에 글자처럼 박혀 내려갔다. 비뚤어졌지만 누구보다 진실한 이름 석 자, 금액 여섯 자. 그 서명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무게를 지닌 것이었다. 방 안에는 고요한 감동이 흘렀다.
그날 이후 나는 다짐했다. 비슷한 상황을 마주칠 때마다 “제가 찾아뵙겠습니다”라고 먼저 말했다. 찾아가는 발걸음에 마음과 정성을 함께 실었다.
지점을 찾아오는 분들께는 작은 선물도 준비했다. 우리은행 시집 한 권, 라면 두 봉지. 친필 사인을 곁들여 건넸다.
“면발은 장수를 뜻한답니다. 새 집에서 복 많이 받으세요.”
웃으며 덕담을 전했다.
“대출받으면서 라면 선물 받기는 처음이에요.”
입주 후 남긴 후기였다.
“名不虛傳. 역시 우리은행 상암동지점과 대원군 지점장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가 큰 용기가 된다는 마음, 잊지 말아주세요….”
“라면처럼 굵고 길게 부자 되라는 뜻으로 알고, 오늘 점심은 라면으로 먹었습니다.”
작은 선물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고, 단순한 대출 건수가 아니라 각자의 사연을 품은 소중한 얼굴들이었다.
지점장으로 일한 6년, 시프트 대출 카페를 만들고 블로그를 운영했다. "장기임대전세대출 2,685건, 서민금융지원 1,299억 원" 숫자는 거대했지만 내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2,600번의 상담과 악수, 2,000권의 시집, 2,000봉지의 라면.
‘어려운 이웃’은 거창한 말이 아니라 내 앞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상담하던 그 사람이었다.
그 순간순간마다 나는 생각했다.
‘그래, 이게 내가 은행원이 된 이유구나.’
열정과 성심을 쏟는 일이 나의 신명이고 나의 길이었다.
그 뜨거웠던 장면들이 일상에 묻힐 즈음,
2010년 10월의 그날로부터 9년이 흐른 2019년 2월, 휴대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인지능력이 없던 남편의 엄지손가락을 잡고 대출을 해주신 윤 지점장님… 상암동에서 10년간 행복했습니다. 남편과 함께 있는 하늘나라에서도 늘 지점장님의 건투를 기원하겠습니다.”
손이 떨렸다.
하늘나라에서 온 문자였다.
짧은 문장 속에 한 세대의 삶과 사랑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사모님도, 남편분도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그런데도 9년 전 작은 도움을 기억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감사함을 전해주셨다.
눈물이 흐렸다. 슬픔도 기쁨도 아닌 경외감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 진심이 이렇게 오래 남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떨렸다.
2025년 10월. 지금 이 글을 쓰며 다시 생각한다. 열정이란 무엇인가? 거창한 목표나 숫자의 성과일까?
아니다.
진짜 열정은 누군가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마음이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발걸음, 작은 선물에 담긴 세심함, 규정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용기, 그것이 진심 어린 섬김이고, 그것이 열정이다. 그리고 그 열정은 반드시 돌아온다. 9년이 걸려도, 저세상에서라도.
하늘나라에서 온 문자 한 통이 그 사실을 말해주었다. 2010년 10월 성수동의 작은 집에서 나는 한 사람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떨렸으나 따뜻했고, 그 온기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내 안에 살아 있다.
2,600번의 악수 중 가장 깊이 남은 단 한 번의 악수, 그것이 내 인생의 열정이었다.
‘박정희 사모님, 그리고 아드님. 긴 겨울을 지나 다시 돌아오는 봄처럼, 그날의 감정과 사랑의 기억은 지금도 내 가슴에 살아 있습니다. 그 소중한 마음을 대했기에 나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갑니다.’
나는 앞으로도 누군가의 곁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살아온 방식이며, 앞으로도 지킬 방식이다.
“진정한 열정은 누군가의 삶에 작은 온기 하나를 보태는 것. 그 온기는 시간을 건너 하늘을 넘어 반드시 돌아온다.”
2025년 동짓달 초순에 꽃우물에서..
Profile skyoon
삼성물산, 우리은행, 우리종합금융 근무.
저서: 《내 마음의 은행나무》 경영학박사.
연재: 계룡일보 개성공단 1188일의 기억 171편 (2025.6.27-2025.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