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지도층 인사 자녀들의 국방의무를 바라보며
[오만촉광의 계급장, 그 뒤에 가려진 어머니의 기도] <좌충우돌 인생2막 76호. 2025.12.18>
연말의 차가운 공기는 때로 우리를 가장 뜨거웠던 시절로 데려다 놓는다. 휴대전화 갤러리 깊숙한 곳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내어 본다. 40년 전, 1986년 7월 26일 대한민국 학사장교 8기 임관식. 오만촉광의 계급장을 달아주시는 어머니, 그 옆에서 함께 축복해 주시는 큰형과 가족들의 손길이 담긴 사진이다.
사진 속의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늠름하다. 하지만 한여름 짙푸른 잔디 위에서 형형색색 꽃다발을 든 어머니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사진 속 어머니의 표정에는 자랑스러움보다 차분한 걱정과 깊은 상념이 더 짙게 깃들어 있다.
그날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영천 벌판에서 다섯 달간 고된 훈련을 마치고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로 서 있던 아들의 어깨 위에,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던 계급장. 어머니의 눈에는 그 화려함보다 그 계급장이 상징하는 책임의 무게가 더 크게 보이지 않았을까.
‘장하고 대견하구나, 내 아들아. 이제 대한민국 장교로 첫발을 내딛는구나. 부디 몸 다치지 말고 건강하게 복무하렴. 계급장이 빛날수록 겸손하고, 남보다 앞서기보다 남을 먼저 돌아보는 따뜻한 사람이 되거라. 그것이 진짜 군인의 길이란다.’
어머니는 아들의 영광보다 그 뒤에 가려진 어려움과 고단함을 먼저 헤아리며, 마음속으로 수없이 간절한 기도를 올리셨을 것이다.
그 시절 어머니의 기도를 품고 오늘의 우리 사회를 바라본다. 최근 전해진 사회 지도층 자녀들의 군 입대와 임관 소식은 참으로 고무적이다.
11월 말 기수 대표로 제병을 지휘하며 해군 장교로 임관한 삼성 이재용 회장의 장남 이지호 소위, 지난 12월 초 해병대 수료식에서 관등성명을 외치며 눈시울을 붉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손 박세현 씨, 그리고 몇 해 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여군 장교로 복무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외손녀이자 SK 최태원 회장의 딸 최민정 씨까지.
가장 편안한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음에도 스스로 가장 춥고 고된 자리를 택한 이들의 행보는, 단순한 병역 이행을 넘어 ‘책임’이라는 가치를 행동으로 보여준다.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해군 장교의 길을 택한 이지호 소위의 결단, 미국 유학을 마치고 자원 입대해 미 해병대 장군상까지 받은 박세현 씨의 성실함은, 우리 사회에 조용하지만 분명한 희망의 신호로 다가온다.
특히 국회의원을 비롯한 각계 지도층에 군 미필자가 적지 않은 현실 속에서, 이러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은 더욱 빛을 발한다. 이것이 일회성 화제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의 문화로 스며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진다.
다시 40년 전을 떠올린다. 큰형을 비롯한 가족들이 함께 내 어깨에 계급장을 달아주시던 그 순간, 조용히 지켜보시던 어머니의 손길. 그때 어머니가 올리셨을 그 소박하고도 간절한 기도는, 오늘날 자식을 군문에 보내는 모든 부모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식이 귀할수록 더 단단하게 키우고 싶었던 그 마음들이 모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지탱해 왔다고 믿는다.
한 해를 보내며,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군문에 들어선 모든 젊은이들에게 뜨거운 응원을 보낸다. 그리고 그들을 묵묵히 뒷바라지하며 기도로 지켜낸 이 땅의 모든 부모님들께, 특히 이제는 사진 속에서만 만날 수 있어 더 그리운 나의 어머니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경례를 올린다. 올겨울, 우리 사회가 이들의 헌신으로 조금 더 따뜻하고 든든해지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2025.12.17 꽃우물에서 sk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