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오년 타이완 첫날 - 故宮에서 鼎을 만나다]
<좌충우돌 인생2막 81호. 2026.1.22>
병오년 새해 우신당(友信黨) 회원들과 타이완 여행길에 올랐다.
우신당은 우리은행과 신보 출신들로 구성된 모임이다. 조직은 다르지만 이런저런 사연으로 만난 인연들이다. 해마다 네 차례 정도 식사와 운동과 여행을 함께하며 옛이야기꽃을 피운다. 좌충우돌 인생 2막을 살아가며 붕우(朋友)로 교분을 쌓고 선배들의 지혜를 나누며 후배들의 용기를 경청하는 사이 우정은 자연스레 깊어졌다.
이번 타이완 여행은 싱가포르에서 오랫동안 주재원으로 근무했던 C 대인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그의 싱가포르 친구 밀리언(Million)과의 조율을 거쳐 우리는 병오년 첫 해외여행을 타이완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 타이완의 역사
타이베이로 향하는 기내에서 나는 타이완의 역사를 되짚어 보았다. 타이완은 원주민 문화 위에 17세기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유럽 식민 지배가 겹쳐졌고 이후 청나라 통치를 거쳤다. 1895년 청일전쟁 패배로 일본에 할양되면서 50년간 식민 통치를 받았고 이 시기 철도와 행정과 교육 체계가 근대적으로 정비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1949년 국공내전 패배로 장제스 국민정부가 이전해 오며 오늘의 타이완이 형성되었다. 중국과 분리된 정치 현실 속에서도 민주주의와 개방경제와 강한 시민의식으로 독자적 정체성을 구축해 왔다. 복잡한 역사의 켜가 쌓인 땅. 우리가 마주할 타이완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역사의 교차로였다.
* 兆豊銀行의 품격
타이베이 공항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공항 내 兆豊銀行(자오펑은행) 간판이었다. '억조를 풍요롭게 한다'는 뜻의 상호로 영문으로는 MEGA BANK로 의미가 단정하면서도 기품이 있었다.
숫자와 자산이 아니라 신뢰와 축적을 상호로 삼다니. 은행인으로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추구했던가. 실적인가 신뢰인가. 성장인가 축적인가. 상호 하나에도 철학이 스며든다.
10여 년 전 대만 관광 경험이 있었던 터라 동탄이나 광교처럼 눈부시게 발전했으리라 기대했지만 시내를 지나 고궁박물관으로 향하는 길에서 그 기대는 차분히 가라앉았다. 화려함보다 절제가 속도보다 균형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타이완이 선택한 길인가.
* 이동 중 역사 담론
이동 중 黨 총재께서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간판 좀 보십시오."
나도 고개를 돌렸다. 한 간판에 '公共汽車'라고 쓰여 있었다. 버스 정류장이었다. 汽자가 米 부분이 빠진 중국 간자체였다.
일본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총재님은 거리의 문자들을 예리하게 읽어냈다. "저쪽엔 일본식 표기도 섞여 있고요. 여러 시대가 겹쳐 있는 겁니다."
일행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는 간판 하나에도 한자 한 획에도 새겨지는구나. 지워지지 않는 것과 지워야 하는 것 그 사이에서 타이완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일본은 50년간 타이완을 지배했고 일본 자체는 영국 문물을 받아들이며 좌측통행을 채택했다. 그런데 왜 타이완은 일본 지배를 받았음에도 한국처럼 우측통행을 하게 되었을까?
50년이면 한 세대가 지나는 시간인데.
黨의 사무총장이 해박한 지식으로 답했다. "옛 마차 시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마부가 오른손으로 채찍질을 하려면 자연스럽게 도로의 어느 쪽에 서야 할까요? 그 관습이 쌓여 각 나라의 통행 방향이 결정되었다고 봅니다."
일동은 감탄했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우측통행을 선택했을까? 영국이 친정집이나 다름없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흥미로운 사실이 있었다. 미국 독립전쟁 때 프랑스가 지원했고 프랑스는 혁명 이후 우측통행을 도입했다. 미국은 독립 후 영국과 다른 방식을 선택했던 것이다. 또 미국식 대형 마차는 마부가 왼쪽 말에 앉아 오른쪽으로 다른 마차를 확인했다고 한다. 반면 영국식 마차는 마부가 오른쪽 앞자리에 앉았고 중세 기사들은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쪽으로 다가오는 적을 대비했다.
도로 하나에도 이토록 긴 역사와 문명의 습속이 스며 있다니. 그렇다면 어떤 것은 쉽게 바뀌고 어떤 것은 오래 남는 것일까.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드는가.
* 고궁정화의 해삼탕
새벽 일찍 출발해 간단한 기내식만으로 버텼던 터라 저녁 만찬까지는 긴 공백이 있었다. 우리는 박물관 내부에 자리한 고궁정화(故宮晶華)를 찾았다. 오래전 배운 중국어는 막상 입 밖에 내기 어려웠다. 다행히 스마트폰 AI 인공지능 앱으로 서로 보여주는 교신 및 짧은 중국말로 기사와 소통하며 도착할 수 있었다.
해삼탕이 상에 올랐다. 일행이 감탄했다. 온갖 해물이 녹아든 국물 한 숟갈에 긴 여정의 피로가 단번에 풀렸다.
식사를 하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이곳은 고궁에 '옛 고(古)'가 아니라 '연고 할 고(故)' 자를 썼을까? 우리나라의 고궁과 고택은 대부분 古자를 사용한다. 내 고향 논산 노성의 명재고택도 故宅이라 불린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 故宮의 의미
그 이유는 역사 속에 있었다. 장제스 정부가 중국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이전하면서 자금성의 핵심 문화재를 함께 옮겼다. 하지만 이곳은 더 이상 실제 황제가 거하던 궁궐이 아니었다.
古는 시간적으로 오래된 것을 가리킨다. 故는 본래 있던 것을 돌아갈 곳을 의미한다. 타이완의 故宮은 '옛 궁'이 아니라 '본래의 궁을 기억하는 장소'였다. 건물 또한 황궁의 재현이 아닌 상실된 문명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故宮, 그 두 글자를 음미했다. 돌아갈 수 없지만 잊을 수 없는 곳, 거기에 타이완 현대사의 비애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금강산도 식후경, 대만의 첫 음식 故宮晶華에서 우리는 너무도 맛있게 배를 채웠다. 이제 그 그릇 안에 담긴 문명을 만나러 갈 차례였다.
* 고궁 박물관에서 먼저 사대천왕에게 예를 갖추다.
고궁박물관에 들어서자 마치 사찰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사대천왕을 만나듯 불법을 수호하는 네 수호신의 조각상이 우리를 맞았다. 나는 천왕 앞에 합장의 예를 갖추었다. 사찰이 아닌데도 왜 그랬을까. 아마도 오랜 습관이었을 것이다. 신앙이 아니라 예의.
사대천왕은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과 한반도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토착 신앙과 결합하며 형상화된 존재들이다. 분노의 얼굴과 무기 혼란의 시대 속에서도 질서를 지키고자 했던 인간의 염원이 만들어낸 상징일까. 예를 갖추고 나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관람이 시작되었다.
* 문명의 축적
박물관에는 수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송나라와 명나라와 청나라로 이어지는 긴 시간 그 속에서 종교와 사상은 끊임없이 변했다. 불교는 융성했다가 억불의 시기를 맞았고 유교는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변화 속에서도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철기문화는 청동을 대신했고 도예는 흙을 예술로 승화시켰으며 옥 문화는 거친 돌을 갈아 군자의 상징으로 재탄생시켰다.
고궁의 유물 곳곳에는 용(龍)의 문양이 살아 있었다. 동양에서 용은 무엇이었을까. 서양의 괴물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잇고 비와 바람을 다스리는 신성한 존재, 황제의 권위이자 백성의 생존을 책임지는 자연 그 자체, 그래서 왕의 의복과 옥새와 도자기와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용은 끊임없이 새겨졌다.
동양인은 권력보다 먼저 조화와 순환의 상징으로서 용을 숭상해 온 것은 아닐까.
* 盤字(반자)와의 인연
전시실을 거닐다 나는 한 글자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盤(반)" 청동기에 새겨진 상형문자였다.
7대 선조 반호(盤湖) 윤광안(尹光顔, 1757-1815) 선생의 호가 바로 이 글자다. 반호 선생은 숙종 때 정약용과 함께 초계문신으로 선발되었고 순조 때 충청도와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분이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백마강변에 낙향하여 삼의당(三宜堂)을 지었다. 밭 갈기 좋고 낚시하기 좋고 책 읽기 좋다는 의미를 담은 당호였다.
수천 년 전 청동기에 새겨진 이 글자를 타이완 고궁에서 마주하다니, 선조의 호를 품고 살아온 후손으로서 우연일까 필연일까. 묘한 감회가 밀려왔다
* 鼎(정)과의 만남
그러나 내 시선은 유독 세 발 달린 솥인 鼎(정) 앞에 오래 머물렀다. 왜였을까. 그 작은 청동 그릇 안에 무엇이 담겨 있기에 투명한 유리 진열장 안에는 여러 鼎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모공정(毛公鼎)이었다.
서주(西周) 시대 말기에 만들어진 이 청동 솥 내부에는 무려 500자에 달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중국 청동기 명문 중 가장 긴 것으로 서주 왕실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설명 패널에 따르면 명문은 "왕이 이르시기를(So declares the King)"이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선왕(宣王)이 즉위 초 숙부인 모공(毛公)에게 국정을 맡기며 후한 포상을 내렸고 모공은 왕에게 감사하며 이 대정(大鼎)을 주조하여 그 영예를 후손들에게 길이 전하고자 했다는 내용이다.
하나의 솥이 단순한 제기(祭器)를 넘어 역사의 증언이 된 것, 그렇다면 鼎은 단지 그릇이 아니었던 것일까.
다른 鼎들도 하나하나 의미가 깊었다. 세 발로 균형을 잡고 서 있는 모습과 손잡이가 달린 형태와 내부와 외부에 새겨진 문양들, 어떤 것은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되었고 어떤 것은 소박하지만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크기도 다양했다. 작은 것은 한 손에 들어올 만했고 큰 것은 성인 남자 키만큼이나 컸다.
* 장인의 손끝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경계는 분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명을 떠받친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거친 옥을 다듬고 부처의 얼굴을 조각하고 솥 하나에 문양을 새기고 수백 자의 명문을 새겨 넣던 무명의 장인들 그리고 도인들의 정신, 그들의 손끝에서 세월을 건너 오늘의 유물이 탄생한 것은 아닐까.
그 문화의 축적 덕분에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후손으로서 그 깊은 시간을 감상하며 경외에 빠질 수 있게 되었다.
이번 고궁 관람에서 아쉬움도 있었다. 용을 형상화한 작품이 유독 눈에 띄지 않아 그 기운을 직접 마주하지 못했다. 대신 맑은 晶(정) 속에 전시된 수많은 鼎을 만났다. 투명한 유리 진열장 안에서 세 발로 묵묵히 서 있는 솥들, 그들은 오히려 더 강한 울림을 전했다.
* 鼎은 무엇인가
鼎은 단순한 조리 도구였을까. 제사를 올리는 신성한 그릇이었고 나라의 정통성과 통치의 책임을 상징했다. 그렇다면 세 발은 무엇을 의미할까.
균형, 어느 하나에 치우치면 솥은 쓰러진다. 공동체 역시 그러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으며 사전 예약된 해변가 식당으로 이동했다.
*그이름 順發活海產(순발활해산), 신선한 꽃게와 해산물 요리가 상에 올랐고 위스키를 곁들인 만찬으로 첫날의 여정의 피로를 풀었다.
"오늘 본 鼎들이 자꾸 눈에 밟힙니다." 내가 말했다. "그 세 발이 균형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이요."
총재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우신당도 그런 게 아닐까요? 서로 다른 경험과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균형을 이루며 함께 서 있는 거죠."
그랬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좌충우돌 선후배 간 우정을 나눌 때 비로소 균형을 이루는 것은 아닐까. 마치 鼎의 세 발처럼.
대만의 밤이 깊어갔다. 서울보다 기온은 높지만 하늘이 재색물감으로 칠해있다. 여행은 즐겁고 배불리 맛집 찾고 쾌청한 날씨도 한몫한다는데 내일 아침 맑음을 희망하며, 그럼에 盤과 鼎의 숭고함, 오늘 하루만으로도 타이완 첫날은 충분히 값진 배움이었다.
2026.1.20 대만여행 1일 차
타이베이에서 by sk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