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차 11열, 역방향 좌석에서 더 잘 보이는 것들]
<좌충우돌 인생2막 89호. 2026.3.19>
'삶을 가꾸는 인문학' 교양학부생 대상 강의 녹화를 위해 올라탄 행신역발 대전역행 7시 1분 KTX 1호차 11열 D석. 오늘은 역방향 좌석이다.
운동경기 중 오직 전진만 허용되는 종목이 있다면 단연 골프일 것이다. 그린을 오버해 잠시 뒤를 향하는 예외는 있지만, 골프의 본질은 늘 앞을 향한다. 그런데 오늘 나는 역방향으로 앉아 있다. 골프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KTX 안에서는 일상처럼 펼쳐진다.
좌석 예매 시 넓은 창가의 정방향 D석을 고집하는 나름의 철칙이 있다. 봄날 연한 새순부터 소나기 내리는 여름날 창가를 때리는 빗방울, 가을날 황금들녘 및 한겨울 설경까지, 창밖 사계절이 선사하는 풍경의 호강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하지만 오늘은 모든 것이 거꾸로 흐른다. 대전으로 향하고 있으나 시선은 자꾸만 지나온 한강 광명으로 달아난다. 문득, 삶을 살다 보면 때로는 이렇게 강제로라도 뒤를 돌아보는 시간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했던가, 옛것을 돌아봐야 새것을 안다 했으니, 삶을 가꾸는 인문학 강의를 하러 가는 길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자리가 또 있을까.
KTX 열차의 진동을 느끼면 20년 전, 3년 3개월 동안 근무했던 북녘땅에서의 기억이 밀려오곤 한다. 남북 경제협력사업이 활기를 띠며 원자재와 완제품을 실어 나르던 화물열차가 DMZ를 오가던 시절이다.
군사분계선 통문이 열리고 비무장지대 4km를 통과하는 그 팽팽한 긴장과 설렘은 오직 기관사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오전에 개성역에 도착한 기관사가 오후 서울행 귀환 전까지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아, 우리 사무실 (지점) 응접실을 내어드려 편히 쉬게 해드리곤 했다. 그 소박한 배려가 인연의 꼬리를 물었다.
훗날 옛 직장 대전충청본부장으로 부임하고 보니, 공교롭게도 대전역 옆 코레일 본사 건물 안에 우리 지점이 있었다. 월 1회 재경팀을 방문할 때마다 개성에서의 무용담을 풀어놓으면, 그 시절의 정을 잊지 않은 그분들이 다른 은행으로 예치할 자금까지 더 우리에게 맡겨주곤 했다.
대전으로 향하는 창밖으로 오래된 이야기들이 비로소 제 방향을 찾아 돌아오는 듯하다.
열차 탑승 전 'Storyway' 편의점에서 꼭 챙기는 의식이 있다. 삼다수 물 한 병과 '레쓰비' 커피 한 캔이다. 가끔 스타벅스의 세련된 유리병에 눈길이 가기도 하지만, 결국 손이 먼저 가는 건 '레쓰비'가 주는 묘한 설렘 때문이다.
1,100원이라는 합리적인 가격도 매력적이지만, 'Let's Be(함께)'와 'Let it be(흘러가는 대로)' 사이의 한 끗 차이가 역방향 좌석의 정서와 참 잘 어우러진다. D석에 앉아 유리창 너머 사계절의 맛을 음미하며 레쓰비 한 모금을 적시는 것, 이만한 소확행이 또 어디 있을까.
하지만 오늘 진짜 기록하고 싶은 주인공은 행신역 편의점 Storyway 사장님이다. 아마도 전직 철도 공무원이 아니었을까 짐작케 하는 그분은, 대한민국 어떤 영업직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품격 있는 판매원이다. 매번 느끼는 감정이지만 고객을 맞이하는 응대, 계산하며 건네는 짧은 한마디, 정중한 배웅까지. 이는 교육으로 완성된 서비스가 아니라 삶에 깊이 배어든 인격의 발현이다. 욕심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우리 학생들에게 보여줄 서비스직 연수원의 강사로 모시고 싶을 정도다.
물 한 병과 레쓰비, 그리고 아침 대용 호떡 하나를 사고 계산을 마쳤다. "봉투 필요하세요?"라는 물음에 여벌 셔츠를 담아 온 조그만 쇼핑백에 여유가 있어 괜찮다고 답했다. 그러나 1분도 채 안 되어 그 쇼핑백 끈이 툭 끊어지는 걸 목격한 사장님이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편의점 봉투를 건네신다. "그냥 쓰세요." 찰나를 놓치지 않는 관찰력과 마음을 담은 언어. 사람의 발길을 머물게 하고 손을 한 번 더 가게 만드는 것은 결국 이런 사소하지만 깊은 배려다. 사람은 말로써 평가받고, 그 말 위에 신뢰의 집을 짓는다.
학교 강의장을 향해 1호차 11열 D석에 앉아 레쓰비 한 모금에 미소를 지어본다.
역방향이어서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사람도, 풍경도, 삶도.
2026. 3. 17. 강의장으로 향하는 KTX 안에서 by sk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