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약이나 상조회처럼 여러 사람이 돈을 모아 공동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통상 계(契)라고 한다. 어릴 적 "계돈 받아 딸 시집보내려 했는데 계주가 먹튀해 계가 깨졌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계는 분명 high risk high return 상품이었다. 언제든 계주의 먹튀가 가능한 고위험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현대판 계돈을 붓고 있다. 과거와 달리 계주의 신뢰성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카카오뱅크의 모임통장이 있어 계원이면 누구나 입출금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혁신을 주제로 탄생한 카카오뱅크의 모임통장은 인터넷 모바일 시대에 가장 적합한 서비스다. 비록 영업점이 없어 모바일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층에게는 어려움이 있지만, '학이지지(學而之知)' 배우고 익혀 앎을 얻는다는 말처럼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 계(契)의 이름은 '우신당(友信黨)'이다. 이름에서 정치적 색채가 느껴질 수 있으나, 실제로는 우정(友情)과 신의(信義)를 바탕으로 한 모임이다. 당원들은 80년대부터 현재까지 공직, 공기업, 은행 등에서 나라와 자신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분들이다. 계돈은 일 년에 한두 번 국내외 여행 경비로 사용한다. 매월 납부일이 다가오면 카톡으로 서로의 입금 상황을 공유하며, 이는 자연스럽게 납부의 책임으로 이어진다.
한편 00회, 00 포럼 등의 모임 명칭이 있음에도 왜 '당(黨)'자를 썼냐는 질문에 대해 우리에게는 당 총재가 있고, 계 규약 같은 당헌이 있으며, 언젠가는 국리민복과 국태민안(國利民福 國泰民案)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장기적인 포부도 담겨있다. 최근에는 갑진년을 보내기 전, 1년간 모은 계돈으로 일본 마쓰야마 여행을 다녀왔다.
사꾸라지마 섬, 쇼와분화구(昭和火口), 아오시마 신사, 사카모토 료마 유적, 심수관 도자기(沈壽管窯) 등을 둘러보았고, 일본 시골의 정취도 만끽했다. 우동으로 점심을 즐기고, 저녁에는 사케와 최고의 궁합을 일컫는 와규를 맛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저녁 자리에서 총재님께서 호(號)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당의 여러 당원들은 이미 각자의 호가 있었다. 방촌(厖村) 황희 선생의 후손다운 온후함과 사려 깊으신 언행의 긍촌(肯村), 서예 사진 예술적 재능과 탁월한 리더십의 용정(龍亭), 투철한 사명감과 지적자산이 뛰어나며 여행기간 운전봉사의 오색(悟索), 지식과 언어 등 글로벌마인드 및 여행 준비와 계돈 관리에 공명정대한 을동(乙冬), 이사로 인해 불가피하게 참석을 못하신 임천(林泉), 그리고 전국을 자전거로 여행하시며 특히 뛰어난 포용력과 영도력으로 금번 미야자키 공항부터 시작된 가고시마 인근지역 여행에 기억이 오랫동안 남을 멋진 여행을 이끈 갈목(渴木) 총재님까지.
호를 갖는 이유는 크게 몇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 자신의 개성과 가치관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이며, 둘째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태도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셋째 예술 활동에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문학적 표현으로 사용되고, 넷째 특정 상황이나 인연에 따라 호를 짓기도 한다.
일찍이 선조님들은 노성(魯城) 뒷 마을 거주를 의미하신 듯 후촌(後村), 계룡산의 서쪽을 의미하여 용서(龍西), 아름다운 호암산아래 병사리 마을을 상징하는 듯 미촌(美村), 잔잔하지만 때로는 소용돌이치는 백마강 호수에 비교한 반호(盤湖), 구름 속의 용이 움직이는 듯 용운(龍雲) 등 다양한 호로 부르셨고, 가까이는 우리은행 은행장을 역임하신 의산(義山) 선생님이 계시다. 의산 호는 지인한테서 받으신것으로 알고 있데 평소 정직과 신뢰와 정도경영으로우리의 가치를 최고로 만드신 義山 선생님의 성품처럼 올바른 산 의미의 의산은 참으로 멋진 호로 생각된다. 한 분 한 분 음미해 보면, 산과 강 등 자연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담았고 넓고 깊은 마음을 가진 이미지를 연상시키려는 호(號)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고향집 삼의당과 백마강 절벽으로 이어진 산수화를 그린 겸재는 그림을 임천고암(林泉鼓岩)이라 했고, 7대조는 반호(盤湖)라 호를 쓰셨다. 선조님에 대한 도리와 예의를 생각하니 감히 반호의 반(盤)은 언감생시, 그럼에도 고향집 언덕을 벗어나지 못하며 번뜩 스치는 영감에 임천고암의 바위 암을 붙여 '선암(盤岩)'이라는 작명 하면 어떠할까 고민에 또 고민한다. 盤(반) 자는 온반 반(盤)과 소용돌이칠 선(盤) 두 가지 음으로 읽힌다. 그 아무리 소용돌이치는 물결이 바위를 친다 해도 바위는 끄떡없이 우직하고 한결같이 수만 년을 이어오고 있다. 그럼에도 사츠마 심수관요의 도공의 갈고 또 닦은 마부작침(磨斧作針)의 모습처럼, 소용돌이치는 물살의 끊임없이 자신을 부스며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미의, 한자는 똑같은 盤이지만 발음은 선으로 호를 만들어볼까 고민하여 본다.
34년 금융인으로서의 우직한 삶과, 앞으로도 이어질 도전과 열정의 의미도 함께 담아 본다. 춘삼월이 오기 전까지 조금 더 고민하며 깊이 있게 생각해보려 한다. 비록 盤자를 선으로 부름에 따라 220년 선조 반호 할아버지께서 盤을 사용하여 기쁘다 하실지 노여워하실지 용인해 주실지, 또한 아직 맏형님도 호를 작명하지 않았는데 '동생, 잘 만들었어'하시며 이해해 주실지.....
2024.12.12-14 日本 사츠마 심수관 도예관에서 마부작침 도공의 그 깊은 손을 바라보며. From sk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