煙台 고량酒 석 잔을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고로 선조님들께서 정월 대보름날이면 귀밝이 술이라 하여 한 잔씩 나눠 주시었으니, 새해에도 좋은 일 가득하라는 마음으로 청주 한 잔을 마시면 귀가 밝아지는 것은 물론 한 해 동안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긴다 하였거늘!
대한민국 각계각층의 리더 인문 트레킹 멤버 이십여 분과 함께한 정동길 투어. 국토발전전시관, 이화학당,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이어지는 주옥같은 발걸음 속에서, 눈부신 대한민국 발전의 시초가 이화박물관이 증명하듯 교육의 힘이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국토건설의 기획과 추진이 이루어낸 오늘날의 G7 진입은 오직 탁월한 정치지도자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자연 속의 속삭임이 가득한 시립미술관 박광진 전시회에서 마주한 수많은 그림 중에서도 제주 여인의 삶을 담은 그림이 가장 깊은 울림을 주었다.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했고, 살고자 했던 본능의 강인한 의지가 깃든 우리들의 어머니요, 누나이며, 언니인 그 바닷가 여인의 모습에 마음속 깊은 박수를 보냈다. 특히 거북귀(龜) 자의 꼬리처럼 길게 뻗은 획 ⻱가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어떤 의미로 글씨를 쓰고 전시했는지 의문이 들어 먼발치 있던 스태프에게 물었으나 답을 얻지 못했다. 한자 전문가 전성배 학자께 사진과 함께 해설을 요청해 둔 터라 그 답변이 기다려진다. 물론 장수라는 의미는 알겠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거늘, 이토록 용의주도하게 투어 일정을 기획하고 예약하시니, 누구나 모임의 총장 역할이 쉽지 않음을 안다. 말이 총장이지 그 노고가 너무도 크기에 힘쓸 무(務) 총무에서 길장(長) 총장으로 격상했건만, 늘 김영호 총장님의 코스 동선과 맛집 선정, 결산까지, 그 세심한 배려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새해 첫 트레킹에 귀밝이 술 한 잔은 올려야 하지 않을까 속마음으로 총장님 눈치를 살폈지만, 예산 문제도 있고 한낮이라는 점도 있어서인지 살짝 시그널을 보내봤으나 요지부동이시다.
이제야말로 용기를 발휘할 시점이다. "酒母, 연태 고량주 한 병 대령이요!" 잠시 월권을 저질렀으나, 한영섭 원장님의 멋진 건배사와 화음으로 답한 '사랑해'의 건배 구호는 2025년도 우리가 한배를 타고 순항하리라는 결의를 다지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가던 날이 장날이라더니, 대한문 추녀 너머 시청광장 언덕 위로 눈에 익은 PRESIDENT 글자 아홉 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분명 2022년 3월 8일 저녁 8시의 그 PRESIDENT 글자는 너무도 크고 휘황 찬란 빛나고 또 빛났건만, 2년 9개월이 지난 오늘은 중국집 창문을 넘고 대한문 처마를 거쳐 거리적 요인도 있겠지만 시류의 영향인 듯, 그 글자가 보일 듯 말 듯 밋밋하고 힘이 없다. 마치 盛衰興亡(성쇠흥망)을 한눈에 보는 듯하여 가슴 한편이 무거워진다.
세월 따라 노래 따라 나라가 너무도 하 수상하다. PRESIDENT를 하고 있는 분도 "자유 대한민국을 위해", PRESIDENT에 도전하는 분 또한 "국리민복을 위해" 오직 "for the people, by the people, of the people"을 위한다는 충정뿐인데, 원인이 어디에 있던 국민을 위한다면 법치국가에서 법률에 의거해, 법률의 범위 내에서 법을 준수하며 직무를 수행하기를 간절히 희망해 본다.
대통령이던, 그 직에 도전하던, 의원이던, 헌재재판관이던 오늘 투어 한 이화박물관의 유관순 열사처럼, 어떻게 만든 국가이고 나라인데...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라는 소위 북반부 땅에서 3년 1개월 근무한 경험으로 자유의 소중함, 민주의 가치를 뼈저리게 체험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한반도가 두 개의 나라로 쪼개지고 다시 또 쪼개지는 시류의 울분에 연태주 연거푸 석 잔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기에 월권을 했고 위장을 달랬던 것이다.
새해 귀밝이 酒, 酒卓의 어르신 테이블에도 한두 잔으로는 부족했는지 자비(自費)로 慈悲를 베푸신 임규관 회장님의 너그러움에 경의를 표하며 한 잔 더 입술을 적시니 마음이 두 갈래로 나뉜다.
바로 코앞,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11월 17일 일제의 강요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으로 발걸음을 옮길까, 아니면 세종대왕 동상을 기점으로 대한문까지는 우파가, 동상부터 광화문 좌우로 좌파가 목소리 높이는 광화문으로 향할까... 마음속 기로에서, 다시는 을사늑약과 같은 나라의 주권이 빼앗기는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범죄자들이 이 사회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항거하는 모습보다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 지켜보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태극기를 크게 흔들어본다.
끝으로 올해에도 트레킹에 참가하신 모든 분들의 건승을 기원드리며, 특별히 이화학당을 방문하고 인도해 주신 박미숙 선생님께 두 손 공손히 모아 큰절 올립니다.
2025년 1월 4일 18시 18분 大漢門 너머 PRESIDENT 글자가 보이는 福盛閣에서. skyoon 드림
追記: 위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이 내려보는 동상 아래 태극기 크게 흔든다" 등 부디 정치적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열 빼기 하나는 구(九)의 개인적 마음임에 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