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성산 앞바다 파도소리. 파도 소리가 전하는 속삭임처럼, 지난가을 하순 제주 표선에서 시작된 올레길 여정이 이어졌다.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저녁 무렵, 성산 일출봉이 수채화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미래학당 하루방 TV 고수향 선생님의 성산일출봉에서 바라본 한라산 소감에서, "섬이 곧 한라산이고, 한라산이 곧 제주섬"이란 진리가 가슴 깊이 울렸다.
일출봉 아래 길손의 봇짐을 풀 때쯤, 붉은 노을이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다. 묵은지에 고등어조림, 거기에 한라산 21도의 은은한 주향(酒香)이 더해져 밤바다의 속삭임과 어우러졌다. 광치기 해변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된 그날 밤,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깊이 잠들었다. 으르렁 그르렁 코 고는 소리마저 파도 소리에 섞여 낭만이 되던 밤이었다.
# 올레길이 전하는 풍경들. 구들장에 몸을 지진 다음 날 이른 아침, 성개미역국으로 해장을 하고 제주 올레 2코스와의 첫 만남을 기대하며 발걸음을 떼었다. 광치기 해변에서 오조리로 이어지는 성산포구 입구에 갑문을 세워 호수로 변한 호수 한가운데 올레길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졌다. 잔잔한 호수 우측의 일출봉과 저 멀리 우도를 바라보며, 걸음걸음이 그림이 되어갔다.
올망졸망 호수 소로에서 퐁당퐁당 장난스레 던진 물제비 돌멩이에 놀란 수십 마리 오리들이 하늘로 비상했고, 길가의 빨강 파랑 올레 표시 줄 한쌍은 우리 사회의 정치적 두 빛깔을 닮아 있었다. 10여 km의 올레길 2코스, 내수면 둑방길을 따라 걸으며 마주한 식산봉과 오조리 마을의 풍경은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함께 한라산 배경은 또 다른 새로운 모습을 또다시 선물했다.
# 예술이 담아낸 풍경들. 삼주 후 섣달하고 둘째 날, 인사동 화랑거리에서 마주친 그림 한 점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순간처럼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오조리 마을에서 바라본 성산포구와 일출봉, 광치기 해변의 친숙한 풍경이 화폭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화가는 바다와 호수 사이 갑문을 저 멀리 해수욕장 원근법으로 바꾸어 놓았고 그림을 바라본 성산일출봉 지형을 아는 방문객들은 이구동성 실제 모습과 다른 것 같다는 의문을 제기한다고 했다. 예술가의 상상력으로 현실과 예술의 경계에서, 화가의 그림을 어디까지 용인하는 것인지 그날밤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지만 얼마 전 겸재 산수화에서도 화가의 생각과 의도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되고 그려지고 있음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갑진년이 저물어가던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지난 12월 26일, 코엑스 A관 ART 전시회에서 마주한 예술의 세계는 또 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수백 점의 그림 중 이중섭의 황소는 귀하게도 원본으로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고 변함없는 존재감으로 나 자신을 압도했다. 달 항아리 그림 역시 넉넉한 품새는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하지만 진정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제주 성산항인지 모슬포 항인지 어선을 연결한 3~4m 내외의 동아줄이었다. 오랫동안 바닷물에 잠겨있다 건져 올린 듯한 밧줄에는 진귀한 예술품으로 다가왔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풍경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시간의 깊이와 자연의 섬세함, 바닷물속 긴 시간 동안 또 다른 삶의 공간을 제공한 달개비와의 공생이 예술가의 눈에는 이토록 위대한 순간으로 포착되는구나 역시 예술가의 안목에 감탄사 연발뿐이었다.
# 개성에 남겨진 그림들의 이야기. 스무 해 전 허허벌판이었던 개성공단에 우리은행 개성공단지점이 문을 열었던 날로 기억은 거슬러 올라간다. 컨테이너 간이 숙소에서 전기도 없어 발전기 두 대를 가동하며 근무하던 그때, 통일의 선봉에 섰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2004년 12월 7일 분단 60년 만에 다시 북녘땅에 은행 지점을 만들고 남북의 주요 인사들이 하객으로 참식 개점 테이프 커팅 날, 본사 대기업 다이아몬드클럽 회원사 사장님들의 모임에서 선물로 주신 개점기념 유화 한 점과 포은 정몽주 선생의 선죽교 인근 성균관 현 고려박물관에서 구입한 개성시내 한옥마을 그림, 그 두 점을 개성공단 관리위원회 지원센터 입주 은행 객장에 나란히 걸었었다. 마치 남과 북을 상징하는 형제자매처럼 그림 두 점은 수많은 이야기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남북 구성원 모두 한마음으로 통일의 선구자로 맡은 바 직무에 충실했고, 북한 근로자들과 정을 나누던 초코파이 등 서로의 마음을 열어가던 순간들까지.
그러나 북한의 지속된 핵실험 미사일 도발은 끝내 2016년도 개성공단 폐쇄로 이어졌고 미처 후배들은 달러 시재금과 노트북만 황급히 들고 내려오기 급급했다. 그리고 4년 후 2020년 6월 북한은 개성공단 메인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고 그 여파로 코앞의 우리은행 개성공단지점이 입주한 개성공단 관리위원회 15층 건물의 종합지원센터 또한 유리창이 완전 박살 나는 등 산산조각 폐허의 건물이 되었다.
찬바람 불면 생각난다. 비바람 눈보라 치면 가슴이 미어진다. 남북을 상징하듯 함께 다정히 붙어있던 빨강 파랑 두 줄기 올레길 깃발처럼 바라보고 의지하고 상생과 발전을 묵묵히 지켜보고 지지했던 그 유화의 두 점, 깨지고 부서진 유리창 사이로 스며드는 비눈바람에 그나마 외로이 객장을 지키고 있는지, 아니면 어떤 고약한 북한 관리 참사의 손으로 넘어가 그의 집에서 보관되어 있는지, 아니면 자본주의 냄새나는 남조선 그림이라고 분쇄시켜 불태워 버린 것은 아닌지! 그 어떤 모습 어떤 상태일까. 마치 멈춰버린 남북 관계처럼, 그림들도 시간 속에 멈춰 서 있을 것인데!
해가 넘어가는 지난해 갑진년의 끝자락, 성산항인지 모슬포항인지 바다에서 건져 올린 달개비 핀 밧줄처럼, 언젠가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개성이 開城되면 제일 먼저 찾아볼 제일 먼저 반겨줄 우리은행 개성공단지점 영업점 객장 내의 그림 두 점,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밧줄과 달개비처럼 언젠가 다시 만날 그리움과 그날의 희망으로 꽃처럼 피어나리라는 소망을 나누며 갑진 섣달 스무엿새 개성식구들과 막걸리 석 잔 유튜브 틀어 가수 김연자의 '림진강' 노래 술잔에 담아 보낸다. "림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2024.12.26 코엑스 ART 전시관 그리고 광화문 곰솔에서... From sk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