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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승부" 그리고 소공동의 기억, 바둑판 위의 사랑

우리 동우회 주관 국수 "승부" 영화 관람하고...

by 윤석구

[소공동의 기억 바둑판 위의 승부]

80년대를 거쳐 90년대까지의 명동은 한마디로 한국의 월가였다. 소위 '조상제한서'라 불리던 은행의 서열, 즉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이 반경 700여 m 인근에 본점을 두고 개발자금 금융공급을 통해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한 축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행과 국민은행이 같은 국책은행이 반경 안에 자리했고,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는 삼일빌딩 신축 전까지 산업은행의 전신인 식산은행이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롯데 에버뉴로 바뀐 한일은행 본점 건물은 건축 당시 검은색 외장이었다. IMF 구제금융 시기, 주된 기업대출을 담당하던 한일은행은 결국 인근에 있던 상업은행과 합병하며 건물의 주인도 바뀌었다. 36년 전, 다이아몬드 두 개 반짝이던 푸른 군복을 입고 당당히 면접을 보고 왼쪽 상의 깃에 카네이션 배지를 달았던 두 번째 직장의 그곳.

그 한일은행은 정부 공적자금을 받으며 다행히 3호 터널 입구 회현동에, 당시 대등합병 주체인 상업은행이 매입했던 땅에 건물을 신축하고 본사를 이전했다. 지금은 미끈하고 멋진 남산 입구의 또 다른 시중은행, 우리은행 본점으로 자리 잡았다. 기업부도 속에 은행 또한 정부의 지원이 없었다면 현재 우리은행의 입장도 애매했겠지만, 또 다른 지방은행 등과의 이합집산, 계열사 일부 매각 등 홀로서기 과정을 거쳐 최근에는 보험사 인수 승인을 얻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소공동 롯데 에버뉴로 바뀐 옛정이 물씬 묻어나는 구 한일은행 건물에서, 우리 을지로 동우회의 유중근 회장님 주관 하에 반가운 동우회원들과 함께 국수의 주인공 이야기

영화를 감상했다.


'승부'!
오목밖에 둘 줄 모르던 내게, 대한민국 바둑계의 두 전설인 조훈현 선수와 이창호 선수 두 분의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이었다.

영화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당대 적수가 없었던 조훈현 9단 시대에 시골의 한 조그만 마을에서 이창호라는 어린 소년이 등장했다. 어느 부유한 갑부가 조훈현 선수에게 거금을 줄 테니 자식에게 바둑을 전수해 달라 요청했지만, 조 선수는 이를 당당히 거절하고 오히려 이창호 소년을 자신의 집에 숙식하게 하며 당대 두 번째 호랑이 새끼로 키워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 속에서도 승부의 세계는 사제 관계도 용납하지 않음을, 그럼에도 제자를 키우고 사랑하는 스승으로, 스승을 존경하면서도 냉철한 승부의 세계에서 정상으로 우뚝 올라서는 바둑 세계의 명승부 과정을 그린 것이었다. 진정한 인간의 승부욕과 사랑, 존경을 담아낸 이 작품은 두 인물의 깊은 내면과 승부의 세계를 섬세하게 그려내며, 함께 관람한 동우회원 모두의 심금을 울렸다.



"실전에서는 기세가 8할이야. 설령 승부에서 지더라도, 기세에서는 밀리면 안 돼."

"바둑은 둘이 두는 것이다. 좋은 바둑은 결코 한 명의 천재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반집. 바둑판 위엔 존재하지 않는 승부의 최소 단위. 어쩌면 이 놈은 다른 걸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라는 스승의 지도 말씀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바둑을 찾을 거예요."라는 제자의 조심스럽고 공손한 답변이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자신만의 전술 계획으로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하는 이창호 선수의 집념과 노력이 숨어 있었다.

"내가 언제든 질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너 덕분에 요즘 많이 배운다." 독백처럼 내뱉은 조훈현 선수의 쓰디쓴 말속에는 내가 호랑이 새끼를 만들었다는 후회와 함께 다시금 자신의 왕좌 자리를 찾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정말 이기고 싶었어. 내 방식대로." 드디어 스승을 이기고 우뚝 선 제자의 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으로서 항상 네가 자랑스러웠다. 넌 늘 내 자부심이었어."라는 제자 인정과 "승부의 세계에서 일류(一流)가 못 되면 서글픈 거다"라는 깨달음. 제자를 키워 왕권을 내주었지만 끊임없는 노력 속에 끝내 다시 타이틀을 획득했던 절치부심 속 조훈현 선수의 집념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감동의 눈물 속에 영화 감상을 마치고, 한때 유네스코 건물 내에 있던 한일은행 명동지점 맞은편 골목 안의 그 이름도 예쁜 '미성옥'에서 구수한 설렁탕에 김치국물 말아 소주 석 잔을 나누며 한일은행원들의 옛정은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마침 식탁 맞은편 벽에 장식되어 있는 우리은행이 선정한 전국 명품 맛집 식당 인증패 '우리나라 우리은행, "우리名家"가 더욱 영롱하게 빛났다.


조선 태종의 둘째 딸인 경정공주가 시집을 가서 살던 곳, 즉 '작은 공주골'에서 유래된 소공동의 한일은행. 작은 공주가 밝게 웃으며 거닐었을 소공동과 명동, 젊은 시절의 그 공간과 추억을 불러내준 자랑스러운 우리 동우회. 한 달에 두 번씩 원족 등산과 근거리 트레킹, 그리고 바둑, 당구, 궁 나들이 등의 문화 시간은 오늘도 깊게 익어만 간다.


역사와 전통 깊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제공하는 유중근 회장님 등 집행부의 노고에 늘 감사드리며, 을사년 봄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마음으로 또 하루가 저물어간다.


2025.4.30. 가정의 달 5월을 맞으며 소공동 옛 한일은행 건물에서 from sk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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