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스승의 날에 돌아본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좌충우돌 인생 2막 46호. 2025.5.22>
삶의 여정에는 저마다의 화양연화(花様年華)가 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 내게는 고향 땅 우리은행 대전충청본부장으로 보냈던 시간이 그러했다. 오랜만에 다시 대전 갑천을 찾았다. 새벽녘마다 오리, 까치, 토끼풀 등 자연의 친구들과 함께했던 소중한 마음의 쉼터, 천중의 으뜸 천을 바라보며 지난 시간을 회상했다.
당시 조직에서의 제1 척도는 영업 성과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귀한 목표는 인재 양성이었다. 대전충청 지역에서 최고라는 생각에 안주하려는 젊은 후배들에게 나는 더 넓은 세상과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KTX로 서울 본사에 출퇴근하며 중앙 무대에서 자신을 키우고 역량을 발휘해 보라고, 더 큰 장터를 만들 용기를 내보라고 나는 끊임없이 '옆구리를 찔렀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젊은 후배들이 하나둘 본사 근무를 시작하고, 심지어 베트남 등 해외 지점으로 발령받는 모습을 보면서 그 수가 점차 늘어나는 것을 목도했다.
그렇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도록, 잠재력을 가진 이들이 용수철처럼 힘껏 튀어 오를 수 있도록 살며시, 때로는 강하게 작동시키는 '옆구리 찌름'. 그것이야말로 조직 리더의 역할이고, 선배의 역할이며, 리더가 제시해야 할 방향이며, 지식과 정보의 터전을 확장시켜 줄 마땅한 의무라 생각했다.
나 역시 초등학교에서 전교 수위였지만 중학교 진학 후 더 넓은 환경에서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도시의 인재들 앞에서 내가 '시골 촌뜨기'였음을 인지했던 경험이 있기에, 환경의 변화와 적응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슴 깊이 알고 있었다.
오늘은 공교롭게도 스승의 날이다. 대전행 열차 안에서 문득 초등학교 4학년 첫 부임지 담임이셨던 김윤희 선생님께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카톡 선물을 보냈다. 마음 같아서는 따뜻한 등심 한 근이라도 보내드리고 싶었지만, 늘 제자의 마음만 받겠다며 부담스러워하시고 반송하셨던 적이 여러 번 있어, 아이스크림의 달콤함만큼이라도 제자의 존경과 사랑이 전해지길 바라며 정성 담은 문안 편지도 함께 보냈다.
늦은 시간까지 확인하지 않으셔서 혹시 편찮으신가 걱정했는데, 밤늦게 "오늘 스승의 날도 잊었네" 하시며 회신 주셔서 안도했다. 아이스크림의 달콤함과 문자의 따뜻함에 마음이 녹으셨는지 하트로 답장해 주셨다.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내게 특별한 분이셨다. 초등학교 3학년 말 전학을 간 후 4학년 신학기, 일주일 만에 반장 선거가 있었다. 당시에는 담임 선생님이 반장을 지명할 수도 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투표함 개봉 없이 다음 날 나를 반장으로 지명하셨다.
기존 반 친구들의 의아함 속에서 반장으로 인정받기까지 질투와 중상과 모략 등 6개월여의 시간이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그때 선생님의 지명은 6학년 때 전교 회장,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까지 역임하며 기초적인 리더십을 배우는 귀한 초석이 되었다.
그러한 선생님은 실로 진짜 팔방미인이셨다. 음악과 무용에 특히 뛰어나셨고, 위인전 등 고전을 읽고 독후감을 쓰게 하시며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셨다. 늘 사랑으로 학생들을 이끌어주셨고, 정직함을 강조하셨으며, 열정과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으셨다. 아니, 선생님 스스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셨고 몸소 늘 실천하셨다.
성인이 되어 세월이 흐를수록 늘 느꼈다. 초등학교 1년간의 담임 선생님 역할이 소년기 학생들에게 그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특히 초등 시절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성을 비롯한 삶의 방향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포지션이 변경될 때마다 그리고 선생님이 그리울 때면 안부를 전했다. 매년 크리스마스에는 연하장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2012년 선생님께서 교직에서 은퇴하실 때, 퇴임식장에 찾아뵙고 깊은 축하의 마음을 전해드렸다. 손가락 세어보니 그 세월이 물경 53년....
그럼에도 선생님께 꼭 여쭙고 싶은 말이 있었다. 용기를 냈다.
"샘, 여쭙고 싶은 말이 있어요. 곤란하시면 말씀하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어떤 질문일까, 걱정되네..."
"샘, 전학 온 지 일주일밖에 안 된 저를, 반장 선거에서 왜 투표함 개봉하지 않고 바로 다음 날 지명하셨어요?"
선생님께서는 잠시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앗, 그것은 비밀인데, 진짜 비밀인데... 음, 세월이 50년이나 흘렀으니 그리고 당시는 선생이 지명권도 있었으니 이제 말해줄까? 음, 전학 온 까만 그 학생, 늘 우수에 젖어 있는 듯 보였지만, 톡 건드려주면 용수철처럼 팍 튀어 오를 그러한 모습을 직감했단다."
선생님의 그 말씀에 가슴이 뭉클하고 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났다. 그런 선생님을 만난 것은 내게 너무도 큰 행운이었고, 오늘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고전 읽기와 독후감 쓰는 습관을 길러주시고, 정직과 책임이 무엇인지 알려주시며, 리더십의 기초를 지도해 주신 모든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대전을 오가는 길에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깊어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라는 노래를 음미한다. 화양연화 시절 야생마처럼 뛰고 또 뛰던 그때, '톡 건드려주면 용수철보다 더 강하게 튀어 오를 것 같았던' 전 직장의 젊은 후배들에게 동기를 부여했던 내 모습은,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러 조직의 First Mover로서 더 큰 역량을 발휘하고 있을 그들에게서 다시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그 은사님의 '톡 건드려주심'을 내가 후배들에게 '옆구리 찔러주었듯이', 그들이 펄펄 날아오를 날개의 원동력을 내가 조금이나마 더해주었기를 희망해 본다.
그런 은사님의 모습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대전도시과학고등학교 장주영 선생님의 열정과 혼신에 뜨거운 응원을 보내며, 교육의 미래는 창의성과 창조성을 발휘하는 인재양성 그 끝이 없음을 느끼며 행신역에 하차한다.
2025.5.15 스승의 날에
한국 열린 사이버대 특임교수 윤석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