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복즈음에 효자동 토속삼계탕에서..
[삼계탕 한 그릇에 담긴 126년의 정] <좌충우돌 인생2막 55호, 2025.7.24>
세월의 강물이 고요히 흐르고 있다.
1899년 1월 30일, 고종황제의 '화폐융통(貨幣融通)은 상무흥왕(商務興旺)의 본(本)', 즉 '돈을 원활하게 융통하는 것이 국가발전의 근본'이라는 대한천일은행이라는 이름으로 첫걸음을 뗀 우리 은행이다. 거센 IMF의 파도를 넘어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쳐져 오늘날의 굳건한 모습으로 서기까지, 숱한 역사의 굽이를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 2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합쳐진 조직 안에서도 묘하게 나뉘어 존재해 온 두 갈래의 흐름이 있었다. 한일은행 출신들의 든든한 울타리, 을지로의 역사를 함께한 '을지로 동우회' 그리고
상업은행 출신들의 정겨운 보금자리, 경복궁 옆에 사무실이 있어 이름 붙여진 '효자동 동우회'. 마치 오래된 고목의 두 갈래 가지처럼, 각자의 뿌리를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 두 갈래의 흐름이 마침내 하나의 큰 강물로 합쳐지려 한다. 혁신의 리더십으로 돛을 올린 정진완 은행장이 오랜 동우회들의 합병을 힘껏 지원해 주고 있다. 합병으로 입행한 직원들이 이제 지점장, 부장까지 승진하며 그들의 은퇴 시기도 멀지 않은 이 시점에서 더욱 의미 있는 변화인 것이다. 어쩌면 그 합병의 가장 따뜻하고 맛있는 전조는, 을지로 동우회의 오랜 전통인 '삼계탕 모임'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다.
매년 초복 이맘때면, 을지로 동우회 회장 및 이사진들은 함께 근무했던 선배들과 후배들을 향한 깊은 정을 담아 여름철 몸보신 삼계탕집으로 초대한다. 그 장소는 다름 아닌, 효자동 동우회 사무실 바로 옆에 자리한 '토속 삼계탕'집이다. 20여 년 전 노무현 대통령도 이곳을 찾아 맛있게 드셨다는 그곳은 단순히 유명세를 넘어 을지로 동우회와 효자동 동우회의 유구한 정이 서린 공간이다. 오늘은 바로, 그 삼계탕 한 그릇으로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특별한 날이다.
이사진들은 한 시간 전 먼저 도착하여 집행부에서 준비한 우산과 기념 타올을 포장하고, 오시는 분들 맞이 준비를 한다.
삼계탕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문득 오래전 우리은행 강남교보타워센터장으로 근무당시 '닭'에 얽힌 경험이 떠올랐다. 부임 익일 연무대 익산 대전 상주 등 이틀간 하림그룹 계열사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병아리 12마리를 외할머니 집에서 갖고 와 키운 것이 모태가 되어 세계적인 기업을 일군 김홍국 회장의 도전 정신에 감탄하면서도, 내 기억에 깊이 남은 것은 상주에 있는 '올품'이라는 회사의 모습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25톤 트럭에 가득 실려 온 닭들을 가공하는 그곳에서, 나는 예상치 못한 광경을 목격했다. 트럭에서 닭들을 내리기 전, 거대한 트럭의 시동을 끄고 무려 두 시간가량 닭들이 고요히 쉬도록 시간을 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운전기사의 피로를 푸는 시간이려니 했다. 하지만 탁닛산 스님의 '화'라는 책에서 읽었듯이 '화난 닭은 먹지 않는다'는 철학을 그 의미를 깨달았다. 닭장에서 잡힌 그 닭들은 고속도로를 서너 시간 달려오면서 어쩌면 천국인지 형장의 길인지도 모른 채, 좁은 공간에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죽음을 앞둔 닭들에게 마지막 평온을 선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난 상태의 닭고기를 먹으면 우리 몸에도 독소가 쌓인다는 틱낫한 스님의 지론은 단순히 건강을 넘어선 생명에 대한 깊은 존중이었다. 동남아 여러 곳에서 자유롭게 모이를 먹으며 성장한 방생 닭들을 보았지만, 좁은 공간에서 화를 축적한 닭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닭들이 평온한 마음으로 마지막을 맞이해야 그 육신이 우리에게 '화'가 아닌 '정'과 '건강'으로 돌아온다는 그의 철학에 나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인바 있었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손질된 하림그룹 올품 공장에서 보급된 싱싱한 닭들은 4년생 인삼, 찹쌀, 호박씨, 검정깨, 호두, 토종밤, 대추, 은행, 마늘, 해바라기씨 등 수많은 특수 재료와 만나 '토속 삼계탕'으로 다시 태어난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뚝배기 속에서 오묘한 향내와 깊은 미각은 물론, 자양강장의 기운까지 더해진 이 한 그릇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옻닭을 비롯해 연산에서 유명한 임금님 수라상에도 올랐던 오골계까지, 다양한 닭고기를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삼계탕이 30여 년간 희로애락을 함께한 선배와 후배, 그리고 동료들이 한데 모여 서로의 등을 다독이고 격려하며 쌓아온 정(情)의 응집체라는 점이다. 위로는 10년, 20년 선배부터 아래로는 5,6년 후배들까지, 시대를 함께 건너온 이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챙겨주는 우리 은행 을지로 동우회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이 바로 이 삼계탕 한 그릇에 오롯이 담겨 있다. 선배를 존경하고 후배를 챙겨주는 동료를 사랑하는 전통적이고 아름다운 관계인 것이다.
오늘따라 이 삼계탕의 맛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진다. 뜨끈한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몸 전체로 퍼지는 따스함, 젓가락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부드럽게 발라지는 닭살의 부드러움에서 진짜 힘이 솟아나는 것 같다. 이 귀한 자리를 준비해 주신 우리은행 을지로 동우회 유중근 회장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아니 유중근 회장은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오신 동우 한 분 한 분께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나는 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을지로 동우회와 효자동 동우회가 한데 어우러져 함께 '토속 삼계탕'집에 앉아, 반주로 인삼주를 기울이며 지난날의 추억을 나누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두 갈래의 흐름이 만나 더 큰 시너지를 내고, 역사를 넘어선 진정한 화합을 이루어낼 그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이 한 그릇의 삼계탕처럼 따뜻한 정이 영원히 흐르기를 바란다. 그때는 효자동 동우회도, 을지로 동우회도 아닌 자랑스러운 '우리은행 동우회'라는 이름으로...
그런 희망에 인삼주 석 잔 더 마시며 위장을 불태운다.
2025.7.22 초복지절 효자동 토속삼계탕에서 by sk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