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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심장 속 그님은 누구일까! 계

개성공단 1188일의 기억 연재 중에서.

by 윤석구


[심장 속의 남는 사람, 나의 심장 속 그님은?]<좌충우돌 인생 2막 57호. 2025.8.7>


※ 윤석구의 개성공단 1188일의 기억 신문연재 중에서.



"봉동관에서 들었던 그날의 노래, 언어도 다르고 체제도 다르지만, 아름다운 선율 앞에서는 그 모든 경계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정 과장 환영식 봉동관에서 들었던 '반갑습니다', '아침이슬' 외에 낯선 북측 노래 하나가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월요일 오후, 업무를 마친 뒤 지점에 함께 근무하는 김명옥 북측 행원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지난주 북측식당 봉동관에서 들었던 노래의 선율이 마음에 오래 남아, 그 제목을 적어 온 메모를 보여주며 한 소절만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명옥 행원은 쓱 웃으며 말했다.

"남측 노래나 잘하시라요."

단호하면서도 정중한 거절이었다. 설득해 보았다.

"명옥 동무, 우리가 중국에 가면 '첨밀밀' 같은 중국 노래도 배우고, 일본에 가면 코이비토요 같은 일본 노래도 배우잖아요. 지금은 제가 명옥 동무네 북측 땅에서 근무하고 있으니, 여기 노래 한 소절쯤은 배워야 하지 않겠어요? 게다가 봉동관 종업원들도 '아침이슬' 같은 남측 노래를 참 잘 부르시던데요."


그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명옥 동무는 이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정중한 자세로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 노래의 제목은 '심장 속에 남는 사람'이었다.

'인생의 길에 상봉과 이별
그 얼마나 많으랴
헤어진데도 헤어진데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아 아 그런 사람 나는 못 잊어
오랜 세월을 같이 있어도
기억 속에 남는 이 있고
잠깐 만나도 잠깐 만나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아아 그런 사람
나는 귀중해'

맑고 청아한 목소리였다. 말할 때의 조용한 인상과는 달리, 저음에서 고음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그 선율은 가슴 깊숙한 곳을 울렸다. 이토록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라니 새삼 놀라웠다.

노래를 마친 명옥 동무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서 '심장'은 진심으로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에요."

그 순간, 노래가 가진 힘을 새삼 실감했다. 언어도 다르고 체제도 다르지만, 아름다운 선율 앞에서는 모든 경계가 사라지는 듯했다.

얼마 전 하늘의 달을 보고 별을 보며 트럭 위에서 함께 불렀던 '시골길', 봉동관에서 들었던 '아침이슬', 그리고 지금 김명옥 동무가 들려준 '심장 속에 남는 사람'까지. 노래들은 모두 그리움과 사랑을 노래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아온 우리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 흐르는 감정은 결국 같았다.
노래로 마음을 나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로부터 2년이 흘렀다. 어느 날, 서울 본사의 박해춘 은행장이 격려차 개성공단지점을 방문했다.

김명옥 북측 직원은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단정히 차려입고 후에 입사한 임옥경 행원과 함께 다시 한번 그 노래를 불러주었다.

두 사람의 맑은 목소리가 어우러져 사무실 안을 부드럽게 채웠고, 나는 문득 박해춘 은행장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나 또한 가슴이 뭉클해졌다.

우리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노래는 단순한 가락을 넘어 깊은 의미를 품고 있었다.

분단된 현실 속에서도 함께 일하며 정을 나누었던 사람들,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했던 시간들, 그리고 마음을 건넸던 용기들이 그 선율에 담겨 있었다.

김명옥 북측 직원이 부른 '심장 속에 남는 사람'.

그 노래는 정말로 내 마음속에, 기억 속에, 지금도 따뜻하게 남아 있다.

개성공단에서의 1188일, 그 안에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노래로 마음을 나누던 순간만큼은 여전히 선명하고 따뜻하다.

진짜 나의 심장 속의 남은 그분은 누구인가? (계속)


'심장 속에 남는 사람'이라는 노래 제목은 정치색이 진하게 배어 있었지만, 나는 그 순간 그 말을 내 방식대로 받아들였다. 나에게 '심장 속에 남는 사람'은 곧 나의 어머니였다.

그 노래를 들은 때는 5월의 끝자락 가정의 달이 저물어갈 즈음이었다. 신원 에벤에셀 패션쇼에 초청된 서울 귀빈들을 위한 환전 이동서비스를 잘 마치고, 새로 부임한 정 과장 환영식과 사무실에서 김명옥 북측 행원의 그 노래가 가슴 깊이 남았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얼마 전 뵈었던 어머니가 꿈에 다시 나타나셨다.

북녘 땅에서 근무하는 아들이 안쓰러우셨던 걸까, 어머니는 50대의 고운 모습으로 내 앞에 서 계셨다. 돌아가신 분은 꿈에서 말을 하지 않는다지만 어머니는 "죽는 줄 알았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셨다. 그 말을 들으며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허공의 메아리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8년 동안 몇 번 꿈에 나타나셨지만 늘 말씀이 없으셨던 어머니, 이번만큼은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건만 그 아쉬움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래도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기쁘고 설렜다.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그날 밤 나는 어머니께 전상서를 올렸다.

"어머님의 은혜는 무한하고, 사랑과 존경의 마음은 영원합니다. 파릇파릇한 새싹이 무성한 북한 개성 땅에서, 늦은 봄날 오후 어머님을 그리며…"

며칠 뒤 주말을 맞아 집에 간 김에 백마강이 내려다보이는 반호정사 근처 어머님 산소를 찾았다. 기일에 못 간 송구함을 담아 큰형과 함께 붉은 연산홍 곁에 작은 잣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당시 기록을 연재하며 그 꿈의 한마디 '죽는 줄 알았다'를 다시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렸다. 펜을 잠시 내려놓고 지난 7월 18일 KTX를 타고 어머니 산소를 찾았다. 내 키만큼 자란 잣나무가 올해도 몽실몽실한 잣을 맺고 있었다.

'가을에 잘 익은 잣, 제일 먼저 따서 한산 소곡주와 함께 상석에 올릴게요. 엄마 먼저 잡수세요.'

나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인사드리고 귀경 열차에 올랐다.

어머니는 내 생의 모든 순간을 지탱해 주신 '심장 속 그분'이다. 잣나무처럼 단 한 번도 내 안에서 사라지신 적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도 모습이 바뀌어도 어머니는 여전히 내 마음에 계셨다.

그렇게 어머니가 꿈에 나타난 며칠 뒤, 나는 패밀리마트 앞 벤치에 앉아 늦은 밤 11시 홀로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자전거로 공단 한 바퀴를 돌기로 하고 핸들을 잡았다. 조용히 잠이나 잘 일이지 얼마 전 자중하라 코치까지 들었는데 토지공사, KT 개성지사를 지나 한전 앞 진입도로는 90도로 꺾이도록 되어있음을 알면서도 그 커브 길에서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급브레이크로 자전거가 앞으로 퍽하고 고꾸라졌다.




"으악, 으악, 아이고 다리야, 엄마"



오른쪽 장딴지의 피부가 복숭아 껍질처럼 벗겨지는 큰 상처를 입었다. 벌겋게 피가 맺혔다. 간신히 일어나 자전거를 붙잡는 순간, 하얀 색깔 펜스 너머 5미터 앞 논둑에서 검은 물체가 벌떡 솟구쳤다.

"으악 엄마, 나 살려 줘…"

검푸른 볏 속에서 꿈틀 일어난 것은 산돼지도 도깨비도 아니었다. 바로 인민군 병사였다. 큰 신음 소리에 잠자고 있던 인민군의 코털을 뽑은 것인가, 뽑힌 것일까, 매복 중 잠에서 놀래 깨어난 것인가! 혼비백산 피를 철철 흘리며 자전거를 끌고 메고 들고 숙소 방향으로 36계 줄행랑이 최고였다.

그때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머니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꿈에서 하신 그 말, '죽는 줄 알았다'는 여섯 글자,

어쩌면 예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날 어머니는 하늘에서 나를 지켜주시고 계셨던 것이었다.

다행히 지점 옆에 있던 그린닥터스 병원에서 소독을 하고 거즈를 붙이고 치료를 받아 두 달여 만에 회복할 수 있었다. 새살이 올라오며 상처는 아물었지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한다.

심장 속의 그님을 나는 오늘도 사랑한다./윤석구 한국 열린 사이버대 특임교수(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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