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은행 을지로동우회 임원진과 유명산 계곡에서
[송사리에게 드린 보시, 을사년 여름 천렵(川獵)] <좌충우돌 인생 2막 58호. 2025.8.14>
을사년 여름 끝자락, 자랑스러운 우리은행 동우회 8월의 이사회는 요즘 말로 'off site'였다. 94년과 95년 근무했던 을지로지점 건물 3층 사무실을 벗어나 유명산 계곡으로 향했다. 그토록 뜨거웠던 7월 말 8월 초를 뒤로 하고, 계곡물에 발 담그고 탁배기에 풋고추 다금바리(멸치) 안주 삼아, 당도 높은 제철 최고 꿀맛 수박도 맛보고…
옛 어른들도 여름철이면 냇가에서 피서를 즐겼다. 일명 천렵(川獵)이라 불렀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풍습으로, 주로 초복·중복 등 무더운 여름날 냇물에서 고기를 잡으며 더위를 식히는 전통 놀이다. 족대나 그물로 물고기를 잡고 매운탕을 끓여 먹으며 이열치열(以熱治熱)의 피서법으로 공동체 유대감을 형성했다고 한다. 특히 북한 개성 지역에서 유행했던 이 풍습이 현대에는 계곡 물놀이로 이어졌다.
이론적 설명이 어쩌면 구구절절 맞는 것일까?
우리가 선택한 동네는 가평 언덕 설악면의 유명산 계곡이었다. 냇물의 물고기 대신 준비해 간 다금바리가 탁배기의 최고 안주였고, 하산하여 오리구이가 특품의 음식이었다. 한 가지, 그물로 물고기를 잡았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오히려 자연보호에 앞장섰고 보시를 해주었다. 발 담근 물속에 송사리들이 나타나 눈호강을 해주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렸다. 다금바리와 더불어 캔참치, 막걸리 안주를 먹이로 송사리에 보시하니 피라미부터 왕초까지 빙글빙글, 아직도 그 여운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리고 멋쟁이 막내이사 용진 나무꾼 손에 등에, 미리 시원한 계곡물에 담갔던 수박은 대전 본부장 시절 인연이었던 선녀 경옥 누이와, 영자의 전성시대 그 영자 선배 손맛으로 꿀꺽꿀꺽 입호강의 그 천렵의 진짜 맛이라, 참으로 오랜만에 천렵다운 천렵의 시간이었다.
누군가 수직 낙하하는 물살 바위 위 9층 돌탑에 마음속 그님을 기도하니 50년 전의 기억과 20년 전의 기억이 살아난다.
(백마강변 고향집 반호정사와 삼의당 고목아래)
내 고향은 부여와 강경 사이 수만 년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변 언덕이고, 1km 하단에는 종조께서 근무한 양수장이 있다. 봄여름 대부뚝 수로를 통해 제공되는 금강의 물은 규암, 임천, 구룡, 양화로 이어진 수로를 통해 가을날 쌀알로 변신하는 귀한 일용의 양식이 되어주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얼음이 얼기 전인 동지 전후, 우리 집 바로 옆을 지나는 수로의 200여 m 굴속은 보물단지였다. 대야와 바케스를 들고 빗자루와 삽을 들고 굴속으로 향한다. 굴 입구에서 1/3 지점에 돌과 흙으로 둔덕을 쌓고, 출구는 물이 잘 빠지도록 작은 수로길을 만든 후 그물망을 양쪽에서 잡고 굴 입구부터 빗자루로, 삽으로 물결을 치며 출구 방향으로 몰이를 하면 손바닥보다도 더 큰 붕어, 메기, 참게들이 대야와 바케스에 차고 넘친다. 5촌 구중 당숙을 비롯한 대여섯 명의 일꾼들의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 개선장군처럼, 그 무거운 시냇가 사냥 획득물 붕어, 메기, 빠가사리는 주방장 대장 엄마표 손길로 한산 소곡주와 함께 입호강 또 입호강. 이보다 더 멋지고 아름다운 천렵이 또 있으랴!
또 하나의 추억은 20년 전 이야기다. 어제 동우회의 유명산 계곡 천렵 시간에 그 무거운 수박을 들고 메고 와서 송사리가 노니는 물길 영역을 침범하는 우를 범했지만, 한 시간여 시원한 내장으로 더위에 지친 심장의 열을 식히는 데 금상첨화였다. 때는 꼭 20년 전 꼭 이맘때, 천렵이 개성에서 유행하였다 하듯 북한 개성공단에서의 이야기 한 토막이다. 지금 그때 일지를 바탕으로 계룡일보 연재 "개성공단 1188일의 기억" 59편 중의 소재이기도 하지만.
격주로 서울집에 와서 일요일 오후 삼다수 물을 사고 제철과일 사과, 배, 복숭아, 참외 등 일주일 비타민 과일을 싣고 가곤 했다. 복날 최고 과일은 역시 수박, 은행 재임 시 지점장들은 거래처에 수박 한 통 선물하며 실질적으로는 '거래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였지만 겉으로는 '情입니다, 情' 하며 한 통씩 나눠드린 그 마음처럼, 함께 입주하여 근무하던 개성공단관리위원회, 토지공사, 현대아산에 한 통씩 나누어드리고, 열악한 환경에 자원봉사하는 그린닥터스 간이병원 부원장과 간호사 및 청원경찰과 한 조각씩 나누어 먹을 목적으로 다섯 통을 렉스턴에 싣고 들어갔는데,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방 한계선과 북측 CIQ에 도착했다.
평소처럼 인원 점검만 할 줄 알았는데, 그날따라 북방한계선 바로 인근에서 개성공단 입경하는 우리 주재원들의 인원체크하는 애칭이 '카리스마'인 북한군인이 트렁크 검사까지 들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그 친구만 보면 기가 죽는데 그 톤 높인 목소리가 들렸다.
"저게 뭡니까?"
"수박입니다."
"세관 신고했습니까?"
아차 싶었다.
"북측 직원들과 함께 나눠 먹으려고 가져왔습니다."
신고는 생각도 못 했다. 평소 일주일치 사과, 배 등은 신고 없이 넘나들었는데, 인원 점검이 주 임무인 군인이 왜 물품까지 확인하는 걸까?
순간 등줄기에 땀이 흘렸다. 다행히 그 북한 군인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세관원이 고개를 갸웃 뚱했다.
"수박이 왜 이렇게 큽니까?
지금이 수박철입니까?
진짜 수박철이 맞습니까?
어, 참 그것 엄청 크네…"
순간 마음이 씁쓸했다. 같은 한반도, 같은 민족인데 제철 과일조차 생소하다니. 북측 여름 식탁엔 수박보다 옥수수가 더 익숙한 듯했다.
간신히 지점에 들어와 수박을 새로 한 식구가 된 임옥경 동무에게 예쁘게 먹기 좋게 잘라 달라고 하니, 잠시 후 난도질당한 채로 돌아왔다. 알고 보니 한 번도 수박을 잘라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울퉁불퉁하게 잘린 조각을 나눠 먹으며, 웃음 속에 묘한 마음이 스쳤다. 풍족한 우리 대한민국과 달리 제철 과일 하나도 귀한 이곳에서, 그 여름의 수박은 그저 달콤하기만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가 그립다. 길을 걷다 수박 판매점을 지나치면 문득 생각이 난다. 그 당시 임 동무의 2살 난 아이도 이제 스무 살이 넘었을 텐데, 혹시 인민군이 되어 군복무를 하며 대남 확성기 철거 임무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을사년 여름, 유명산 계곡의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천렵(川獵), 계곡물속의 송사리 사냥 대신 참치캔을 보양식으로 제공한 것은 보시 중의 최고의 보시가 되지 않았을까. 어찌 보면 송사리 집에 와서 발 담그고 막걸리 나누는 시간을 제공했으니 당연한 사용료 아닌가. 물결 너머 9층 돌탑은 '당연한 사용료 잘 나누어주었다'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그렇게 을사년 여름, 말복 후 나흗 날의 추억이다.
함께 천렵 시간을 이끌어 주신 우리 동우회의 대장들이신 천현주, 이선규 두 분 전임 회장님과 유중근 회장님의 노고로 아름답게 비상하는 동우회이기에 늘 감사의 마음을 함께 싣는다.
2025.8.13. 유명산 계곡에서. from sk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