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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고 나니, 그는 회피형이었다

by 하린

그땐 몰랐다. 그 사람이 말이 없었던 이유를. 늘 덤덤하게 웃고, 조용히 대화를 넘기고, “그런 얘긴 나중에 하자”는 말로 감정을 미뤘던 이유를.
나는 그저, 그런 사람이려니 했다. 감정 표현에 익숙지 않은 사람, 바쁜 사람, 혼자만의 시간이 더 필요한 사람. 그래서 그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하루에 몇 번씩 내 감정을 정리하고, 기대를 낮추고, 나만의 질문을 스스로 덮었다. ‘너무 조르지 말자’, ‘조금 더 기다려보자’,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성격이니까.’ 그를 사랑하는 일은 내 감정을 참고 이해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처음엔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조금만 더 다가가면 마음을 열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지쳐갔다.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더 멀게 느껴지는 사람. 내가 무언가를 말하려 하면 벽처럼 돌아앉는 사람.

그 사람은 싸우는 걸 피했고, 진지한 얘기를 회피했고, 내 감정과 생각을 ‘왜 불안한 생각을 하냐’고 말까지 남겼다. 나는 서서히 그 사람 곁에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감정을 나누는 순간, 그는 문을 닫았고 나는 혼자 문 앞에 서서 서성였다. ‘왜 이 사랑은 말할수록 멀어질까’ ‘내 마음은 왜 항상 과한 게 될까’

그가 떠난 후에야 알았다. 그는 회피형이었다.
감정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불안해지고, 갈등을 감정적으로 해결하기보다 회피로 넘기며, ‘사랑’을 느낄수록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더 멀어지는 사람이었다는 걸.

그리고 나 역시 그 사람 곁에서 내 감정이 지나치다고 믿고 있었다는 걸.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받지 못해도 괜찮은 척했던 걸. 지나보니 알겠다.

그 사람은 사랑을 몰랐던 게 아니라, 사랑이 가까워지는 걸 두려워했던 거라는 걸. 그리고 나는 그 두려움까지 껴안고 버텼던 사람이라는 걸. 다시는 그런 방식의 사랑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이해만 요구하고, 표현은 닫아버리는 사람 옆에서 혼자 말 걸고 혼자 서운해하고 혼자 참는 사랑은 하지 않기로.

나는 말할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내 감정이 부담이 아니라, 함께 나눌 이야기가 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지나보니, 그는 회피형 남자였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너무 오래 용감했던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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