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rin Aug 26. 2024

내겐 너무 그리운 증조할머니

“할매, 하나님이 소원을 하나 이뤄준다고 하면 이루고 싶은 소원이 뭐야?”

“죽기 전에 고향땅을 한번 밟아보는 거지머"

“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할매 데리고 부산 가주께. 조금만 기다려줘”

“하하하.. 그때까지 내가 몬산다..허허허"

“뭔소리여, 내 시집갈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야지.. 그래도 대학 졸업하는 것은 봐야지 할매.."

대학교 가기 전날, 증조할머니랑 단둘이 침대에 누우면서 나눈 대화였다.


부산광역시 부산사람, 당시 이방 나라에서 9남매를 홀로 키워 억척스러운 삶을 사신 우리 할머니, 그 뿌리를 심어 4세대인 나와 오빠까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키워주셨다. 당시 내 나이는 19살, 집과 대학교거리 기차로 무려 1박 2일, 한번 개학하면 방학기간에만 돌아올 수 있었던 그 시절이었다. 매번 학교 가기 전 잊지 않고 나한테 하는 말이 있다.

“ 공부도 공부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밥 잘 챙겨 묵고 건강 단디 챙기래이. 거기 가서도 기죽지 말고 " 하면서 자기가 아껴먹는 사탕을 몇 개를 손수건에 감싸서 내손에 꼭 쥐어준다.


그렇게 타 지역에서 대학생활을 하면서 나는 스스로 예상치 못한 어려움으로 여러 난관들이 부딪쳤을 때 마음도 데어보고 , 상처도 받아보고 , 무관심도 받아보고 그럴 때마다 늘 우리 할머니가 생각난다.


우리 할머니도 한 번쯤 고향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었을까?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는 이국땅에서 얼마나 버텨왔고 견뎌왔을까?

얼마나 고됐으면 사탕을 습관처럼 복주머니에 잊지 않고 넣어 뒀을까?


대학교 4학년 때, 나를 그렇게 아껴주던 증조할머니가 소천하셨다. 당시, 임용고시준비에 대학졸업준비에 정신없을까 봐 우리 가족은 나에게 비밀로 했고 졸업 후에 오랜만에 집으로 가는데 할머니랑 함께 누워있었던 침대가 빈걸 보니 그때야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인지하고 눈물이 왈칵 내려왔다.

“조금만 더 살다 가시지.. 뭣하러 이리 급했대..”


수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길에서 알사탕이 보이면 증조할머니가 생각난다. 힘들 때 복주머니에 곱게 감싼 손수건으로 꺼내고 펼친 후 알사탕을 하나 집어서 나에게 쥐어주며 “힘든 일 있으면 고매 참지 말고 달디단 사탕 한입 무어봐라.. 기분이 좀 나아진다." 라며 토닥여 주는 모습이 너무 아른거린다.


그러다 얼마 전 어쩌다 기회가 되어 부산여행을 다녀왔다. 정말 화려하고 찬란했었다. 친구랑 바다를 보면서 멍하니 앉아있다가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계속 와보고 싶었던 자기 땅을 밟지 못했던 할머니가 너무 그리웠고 그 꿈을 이루지 못한 게 너무 죄송스러워서 나온 눈물이었다. 할머니 미안해...


나에겐 항상 아픈 손가락이라며 한 숟갈 더 먹이려고 하고, 나에겐 대한민국의 역사와 언어를 잊지 말라며 항상 할머니집에 갈 때마다 가르쳐 주던 그 열정, 그 모습이 지금까지도 생생해서 마음을 억누르면서 속삭인다.


할머니 잘 지내요? 저는 잘 지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