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컷 새들은 지금도 생존과 번식의 록 발라드를 열창하는 데 여념이 없다. 빛나는 외모와 더불어 특별한 소리를 내는 것은 우성 유전자를 표현하는 가장 즉물적인 수단이다. 암컷 새들은 타고난 평론가로서 좋은 음악가를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인간 역시 언제나 우수한 것과 열등한 것을 가른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도파민 과잉 시대 평론가들의 볼멘소리 뒤로 좋댓구를 구걸하는 리뷰 유튜브 채널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아이돌 팬은 그들의 우상을 위한 마지막 액세서리로 한국대중음악상을 택했다. 우리는 줄 세우기에 환장한다. 그렇게 태어나고 길러졌다.
‘나는 평가받고 싶지 않다’는 거짓말이다. 혹은 미숙함에 대한 변명이다. 평생을 갈고닦은 기술과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음악에 대한 우리의 평가 기준은 너무나도 다양하고 제멋대로다. 오늘 나온 케이팝 아이돌의 신곡에 대해 누군가는 방송에 선보인 안무가 역동적이라 하트 이모티콘으로 공감을 표시하는 와중에 누군가는 소속사 대표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최악이라는 댓글을 남긴다. 음악은 그 수많은 잣대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평가받고 싶지 않다’는 결국 ‘나는 정당하게 평가받고 싶다’라는 말이다. 음악가에 대한 정당한 기준이라면 결국 음악이다. 하지만 음악을 평가하는 데도 수많은 기준이 적용된다. 누군가는 강렬한 고음에 열광하고 누군가는 속삭이는 저음에 감동한다. 속사포 같은 래핑, 전광석화 같은 기타 솔로는 어떤가? 한편으로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현란하고 화려한 음악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통기타 반주 하나로 단순하고 익숙한 선율을 노래하는 음악이 진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최대 다수의 주관이 가장 정당한 것이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걸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지표는 판매량이다. 하지만 그 지표에는 음악 외적인 요소가 너무 많이 작용한다. 당장 모든 음악을 도마 위에 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게다가 음악적 요소만을 고려한다고 해도 변수가 너무 많다. 가장 음악적으로 평가한다는 그래미상마저 매년 논란에 시달리는데, 그 논란조차 인종차별 같은 음악 외적인 것들에서 비롯된다.
‘나는 평가받을 수 없다’가 결론일까? 그렇지 않다. 저 수많은 주관 너머로 결국 선택을 받는 고전들이 있다. 대개 음악 산업의 필터링을 거쳐야 우리 앞에 선을 보이지만 오랜 세월을 거쳐 뒤늦게 발굴되는 일도 있다. 즉,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이 대다수지만, 그렇지 않아도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음악이 있다는 것이다. 그 기준이 과연 무엇일까? 누군가는 그것을 ‘진정성’이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