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보다 따뜻한 건 사람 마음이었다

by 시니브로

피아노 취미생이 되어 초등학교 앞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성인반을 잘 안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집 근처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성인반을 받는다는 건 일찍 나오고 늦게 퇴근한다는 뜻이거든요.

게다가 교통 좋은 곳이 아니라면 수도 많지 않기에 품만 많이 들어가는 셈입니다.


운 좋게 저는 집 근처 성인반 학원을 등록하였습니다.

최대한 연습하러 자주 갈 수 있어 좋았습니다.

방학이다 보면 아침에 가거나 열심히 하다 보면 주말에도 가곤 했는데요.


초등생이 와서 연습을 합니다.

저는 누군지 알고 있었습니다.

학원과 학원 앞 플랑카드를 도배하면 나오는 두 이름 중 하나.

이인자였거든요.


일인자는 중1.

이인자는 초6.


중1은 딱 한 번 연주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날은 리허설 날, 대회 전 날이었어요.

토요일 콩쿠르대회여서 참가하는 아이들이 모여 재잘재잘 떠들던 날이었습니다.

밤 6시가 넘어가기 전 늦게 온 일인자는 한 번 휙 치더니 나갔습니다.

다들 자장면 먹으러 갔거든요.

저는 아이들이 다시 돌아오기 전 방해가 될까 봐 나왔습니다.


일인자는 명불허전이었습니다.

피아노 전공 예술 중을 다니던 일인자.

음반에서 나오는 소리 자체였어요.


이인자는 연습을 자주 나왔습니다.

여름 내내 보니 아침 먹고 연습, 점심 먹고 학원, 다시 피아노 연습

여름방학 동안 이 생활을 하였습니다.

일인자의 연습을 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이인자의 노력이 대단해 보입니다.


여름 방학 일요일 11시 정도에 만난 적이 있었는데요.

그날 삘 받은 저도 연습, 편의점 김밥, 다시 연습하던 날.

아침연습, 점심, 오후 연습하러 온 걸 봤어요.


평일 아침에 가면 어느 날은 학교도 안 가고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아가가 성격이 좋았습니다.

저에게 베토벤 소나타를 친다면서 멋지다고 손으로 엄지 척을 해 줍니다.


쑥스러운 저는 '쟤 뭐지?' 했어요.

몇 마디 나눈 아이와 나눈 이야기로 정보를 알게 되었어요.

예중 입시곡 준비여서 같은 곡 두 곡을 연달아 치고 있었습니다.


모차르트 소나타 10번과 쇼팽 스케르초 2번


모차르트는 제가 쳤던 곡이라 잘 친다 물론 생각했고요.

쇼팽 스케르초는 무슨 곡인줄도 몰랐습니다.

아이는 모든 곡을 외우며 능숙 능란하게 쳤습니다.

게다가 방마다 돌아다니며 치고 있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은 제가 치는 곡을 듣기만 한 음으로 기억해 내서 치고 있었습니다.

책을 보고 쳤다면 틀릴 수 없는 부분을 다르게 치고 있어서 짐작했습니다.

본인 악보도 편집된 두 곡짜리라 얇디얇은 파일인 걸 알고 있었거든요.

하필 책을 올려놓은 수납장이 제 바로 윗자리여서 언젠가 한 번 열어봤습니다.


청음력과 암기 능력이 뛰어난 아이였고요.

저뿐만 아니라 같은 시간대에 오는 성인들과 이미 안면을 튼 상태였습니다.

저는 친해졌다 다시 다음에 보면 "안녕하세요" 모드인 극 I 임을 아이에게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11월에 예중입시 합격하면 학교 앞으로 이사 갈 거라던 아이.

이름도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이름과 두 글자나 같던 아이.

내게 멋지다고 해준 초등 피아노 친구.


저번주부터 보니 아이도 안 보였고, 컴퓨터 글자로 붙여있던 아이 이름표가 사라졌어요.

내 위칸이라 책을 빼고 넣을 때 매번 봤는데요.


전학 간 친구 생각나듯 내 마음이 서운합니다.

자주 말 할걸.

뭐라도 사줄걸.

어떻게 잘 치게 됐냐고 인터뷰라도 해 볼 걸.

궁금증만 가득 담은 채 가 버린 친구입니다.


어릴 적 혼자 커서 누가 집에 며칠 자고 가는 날, 저는 매번 대성통곡하였거든요.

전학 간 친구, 군대 간 동기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편지를 마구 쓰던 사람이었습니다.

서운함이 다 없어질 때까지 저는 쓰고 또 썼습니다.

그러면서 만나러 가거나 면회를 간 적은 한 번도 없어 이제 생각하니 미안하네요.


초등이 마음을 열어 보여준 시간이었음에도 오로지 '연습'.

내 목표는 잘 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았어요.

아이가 연습해야지 어른인 내가 방해하면 안 된다고 저를 납득시켰습니다.

5분 10분으로 변하지 않을 실력인데도요.


어느 초등이 제게 멋있다고 엄지 척을 해 줍니까?

물리적 할머니는 아니지만 아이 보기엔 할머니 쪽에 가까운데요.

진짜라고 저는 믿습니다.

아직 아이 진도가 베토벤까지 나가지 않았기에 그랬다는 걸 압니다.


피아노를 잘 치고 외우고 이미 아이는 피아노 대상, 전체 학년상 상장이 여러 장 있었습니다.

기억 못 하겠지만 예중 들어가기 전 편의점 가서 군것질하며 즐거웠던 추억을 하나 둘 스미듯 켜켜이 쌓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제가 괜히 다 아쉽습니다.


초등 친구 이름 기억합니다.

좋은 곳에서 더 멋진 피아니스트로 성장하길 호호할머니가 되도록 글 쓰며 응원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