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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넴의 글 Sep 15. 2021

자신의 '신념'을 쫓아 '행동'하기 [영화]

영화마다철학담아

*본 게시글의 원문은 문화예술 플랫폼 '아트인사이트'(artinsight)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원문 :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1698)



“유토피아를 포함하지 않는 지도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가 항상 도달하고자 하는 한 나라를 빠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가 그곳에 도착하면, 잠시 둘러보고 더 나은 나라를 찾아서 항해를 계속한다. 진보란 유토피아의 실현이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사회주의 아래에서의 인간의 영혼> (The Soul of Man under Socialism) 中


 오늘날의 인류는 다양한 학명으로 불리며 더 잦은, 더 많은 울림을 낳고 있다. 그중에서도 ‘희망의 인간’을 의미하는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arens)는 인간이 갖는 근원적 성향 중 하나인 ‘희망’이 우리의 삶 특히, ‘미래’에 대한 사유에 있어 큰 의미가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인류는 그동안 어떤 ‘희망’에 기대어 이 무거운 현실을 이겨내 왔던 것이었을까?


 이번 글은 ‘지식’을 중심으로 ‘근대성’의 ‘실존적’ 위기를 분석하고 이를 ‘재건’하고자 했던 만하임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통해 영화 <브이 포 벤데타>(2006) 속 인물들이 자신의 ‘이념’으로서 ‘각성’해갔던 과정과 함께 ‘새로움’을 맞게 된 사회의 단면을 톺아보고자 한다.  

 


‘지식’을 통한 사회의 ‘나아감’에 대한 철학



 ‘지식사회학’(知識社會學, sociology of knowledge)을 통해 사상과 사회 간 관계를 연구하고자 했던 칼 만하임(Karl Mannehim). 189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한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비록 유럽의 변방이었음에도 소수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개혁의 의지가 가득했었던 부다페스트의 지적 분위기 속에서 학업을 이어간다. 1912년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만하임은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과 알프레드 베버(Alfred Weber)의 사회학적 시각을 사사 받은 뒤 세계 1차 대전 발발을 앞둔 1914년, 고국으로 돌아와 ‘사회과학협회’(Social-Science Society)를 비롯한 급진적, 반체제적 청년 단체에 입회하며 실천적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평생을 쏟아 '지식'과 '이데올로기', '권력'과 '구조'를 들여다보고 행동하고자 했던 칼 만하임.


 그중에서도 만하임은 1917년부터 시작된 ‘일요 서클’(Sunday Meeting)에서 만나게 된 게오르크 루카치(Georg Lukacs)의 형이상학적 ‘관념론’을 이어받게 되는 한편 본격적으로 유럽 사회의 ‘문화’를 중심으로 ‘근대성’의 개념과 문제에 주목하게 된다. 이후 그는 지적 활동에 몰두하고자 하지만 일요 서클이 참여한 헝가리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1920년 독일로 망명하게 된다. 


 이데올로기적 갈등으로 인해 혁명과 반혁명의 혼조가 가득했던 독일에서도 만하임은 다양한 지적, 예술적 차원의 문화들을 연구하며 자신만의 지식사회학을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이후 나치당 히틀러의 집권으로 인해 1933년 다시 한번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 그는 이론적 연구보다는 직접 대중 매체에 나서 지식인으로서 실천적인 사회참여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처럼 만하임은 불안정한 삶 속에서도 인간의 의식과 사회의 구성 조건 간 관계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고자 했다. 특히, 인간의 의식과 함께 ‘지식’에 대한 사회 구조의 영향을 강조했던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그는 대표작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Ideologie und Utopie)을 통해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라는 ‘존재 초월적’(seinstranszendent) 지식의 사회적, 존재론적 조건을 분석함으로써 세계대전 이후 무너져가던 유럽 근대성의 ‘위기’를 진단하고자 했다. 


 만하임에게 있어 ‘이데올로기’(Ideologie)와 ‘유토피아’(Utopie)는 이미 존재하는 사회 구조를 ‘뛰어넘는’ 즉, 기존의 것과 ‘불일치’하는 ‘비현실적’인 사유체계였다. 하지만, 기존의 것을 그대로 ‘실현’하거나 ‘재생산’하는 데 활용되는 기제로서 ‘상징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와 달리 유토피아는 오히려 기존의 것을 ‘파괴’하거나 ‘부정’하는 데 활용되는 기제로서 그 자체로 ‘실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유체계는 분명한 차이점을 보였다.


 그에 따르면, 자체적 논리를 따르는 자연과학 지식을 제외한 인간의 모든 지식은 다양한 형태의 ‘이데올로기’ 즉, 경제적 계급을 비롯한 성별, 인종, 지역, 연령 등 다양한 조건을 통해 ‘사회적’으로 구성될 뿐만 아니라 계급을 비롯한 세대, 정당, 체계 등 다양한 집단과 ‘다원적’으로 결부되어 나타난다. 하지만, 이미 법과 정책으로 ‘구체화’된 이데올로기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발생할 때 사회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이데올로기 즉, 아직 현존하지는 않지만 ‘실현’의 가능성과 ‘지배’의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유토피아’를 떠올리게 된다.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어떤 것이 더 '온당'한 것일까?


 이때, 만하임이 제시한 ‘근대적’ 유토피아는 유토피아에 대한 이전의 논의들과는 상당한 차이점을 보인다. 먼저, 만하임의 유토피아는 사회 구성원 ‘개인’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 구조’ 자체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개념이다. 두 번째로, 만하임의 유토피아는 ‘우연성’과 ‘잠재성’에 기반한 ‘논리적’ 사고에 의한 ‘가정’(假定)이 아닌 ‘시간성’과 ‘미래성’에 기반한 ‘과학적’ 사고를 통해 실현 가능성을 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만하임의 유토피아는 논리적 구조에 따라 특정 상황으로 ‘고정된’ 모델이 아니라 당대 근대적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근대성을 위한 보다 ‘실천적’, ‘역동적’인 움직임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실현 가능성에 따라 자체적으로 ‘절대성’과 ‘상대성’을 구분하는 등 보다 ‘유연한’ 움직임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만하임의 유토피아는 사회 구조의 ‘궁극적’ 모델로서 우리의 ‘판단’을 도와주는 ‘기준’이 아니라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새로운 사회 구조에 대한 ‘전망’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만하임의 이론은 사회 구조에 대한 관념론적 전통에서 시작되었음에도 이를 역사주의적, 사회 구성론적 시각과 결부시킴으로써 일정한 ‘정형성’을 확보하는 한편 강력한 ‘비판성’과 ‘실천성’을 주장할 수 있는 ‘논리성’ 또한 확보할 수 있었다. 나아가, 그는 새로운 근대적 지식인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확장하고자 했다. 


 만하임은 이미 사회 전반에 걸쳐 이데올로기화된 지식을 넘어 참된 지식을 접하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부유하는 인텔리겐차’(die freischwebende Intelligenz)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20C 초반 러시아혁명을 이끌었던 지적 노동자 계급 ‘인텔리겐차’를 빌려온 이 개념은 교육 혹은 교양을 통한 ‘유대’를 바탕으로 자기 자신으로서의 실존적 존립을 비롯해 사회 구조에 대한 지적 관심을 ‘공유’하는 한편 ‘상대주의’와 ‘다양성’에 기반해 사회에 대한 역동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나아가, ‘역사주의’에 기반해 인간 존재의 정신과 행동을 탐구하는 ‘실천력’을 보여야 하는 집단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만의 지식사회학적 관점을 확립하고 당시 근대적 지식인들에게 근대성 ‘재건’의 역할을 담지하려고 했다.


 물론, 그의 이론은 결코 역사적 구조를 벗어날 수 없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새로운 사회 구조의 방향에 대한 논의를 펼쳤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 한편 지식사회학 연구에 있어 ‘자연과학적’ 지식과 ‘일상적’ 지식을 도외시한 채 오직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중심으로 하는 ‘이념적’ 지식만을 다루고 그조차도 실제 사회 구조 속에서의 지식의 작동 방식 등 ‘현실적’ 측면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또한, 근대성의 ‘재건’을 위해서 당시 지식인들의 실천만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엘리트주의’에 갇혀버렸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만하임은 ‘관료주의’ 및 ‘산업화’로 대표되는 ‘합리성’의 문화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자유주의적’ 근대성을 상실할 위기에 처해있던 당시 유럽의 문제를 예리하게 진단하는 한편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라는 존재 초월적 개념 그리고, 새로운 근대적 지식인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역사주의적 사유 속에서 인간 사회의 ‘미래성’을 포착함과 동시에 지식사회학적 접근을 통한 근대성의 ‘재정립’과 ‘실천적’ 지식인론(論)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체성’의 베일에 감춰진 개인들의 ‘고결함’에 대한 영화



 만하임의 이데올로기 및 유토피아 개념과 함께 살펴볼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1605년 11월 5일 홀로 국회의사당을 폭파하려고 했던 가이 포크스라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영화는 가상의 전체주의, 파시즘적인 정부에 맞서는 '영웅'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2040년, 세계 3차 대전을 겪은 영국은 서틀러 의장을 중심으로 하는 전체주의 정부의 통제 아래에 있다. 방송사 직원인 주인공 이비는 통금을 피하려던 중 정부 소속 경찰인 핑거맨들에게 발각되지만 한 남자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빠져나간다. 자신을 ‘V’라고 소개하는 남자가 여전히 미심쩍지만 ‘공연’을 보러 가자는 남자를 따라간 이비는 형사재판소 폭발을 목격한다.


 다음날, 서틀러 의장과 주요 당원들은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가짜 뉴스를 퍼트리고 핀치 경감은 용의자로 유력해 보이는 이비를 좇아 그녀의 신원을 확인한다. 바로 그때, 폭탄으로 무장한 V가 방송사를 습격해 정부의 비리를 폭로하고 현실에 무감각해진 시민들을 비판하는 방송을 송출한다. 1년 후 11월 5일에 함께하자는 말을 남긴 후 경찰들을 따돌리던 V는 자신을 도와주려다 경찰에게 맞아 쓰러진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그를 두려워하던 이비는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지만 그의 반정부적 행동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1년 뒤 11월 5일에 있을 시위가 끝날 때까지 나가지 못한다는 V의 말을 따라서 결국 남게 된다.


 그날 밤, 그녀의 신분증을 이용해 V는 주요 당원 중 언론을 담당하고 있던 프로더로를 죽이게 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이비는 V의 계획에 가담하는 척하면서 도망칠 계획을 세우게 되고 V가 릴리만 주교를 죽이는 틈을 타 도망친다. 갈 곳이 없었던 이비는 방송사 선배 디트리히를 찾아가게 되지만 그 또한 V와 마찬가지로 현 정부에 대한 상당한 반감을 보여왔다는 사실과 함께 정부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방송을 제작했다는 사실에 걱정에 휩싸인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은밀하고 거대한 힘에 동조했었던 주인공은 조금씩 '각성'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들이닥친 크리디 당수 일당에 의해 디트리히는 결국 잡혀가게 되고 이비는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는 듯했지만 누군가에게 붙잡혀 V와 함께 범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머리를 삭발당한 채 모진 고문을 받으며 수감된다. 그러던 중, 자신처럼 고문을 받으며 수용되었었던 발레리라는 성 소수자가 남겨놓은 편지를 발견하게 된 이비는 정부의 끈질긴 탄압에도 끝까지 자신의 고결함을 잃지 않기 위해 저항했던 그녀의 이야기에 그동안 쌓여있었던 두려움을 버리게 된다. 결국 자신에게 총살형이 구형되자 이비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하지만,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이비는 수용소에서 풀려나게 되고 그 모든 것이 V가 꾸며낸 거짓이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게 된다. 하지만, 이를 통해 정부의 이데올로기에 무뎌진 채 도망 다녔던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이비는 자유로움을 느끼게 된다. V는 비로소 자신의 죽음과 정부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이비에게 발레리의 이야기만큼은 거짓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주며 계획이 끝나는 11월 5일 전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이비를 보내준다.


 한편, V와 이비를 좇던 핀치 경감은 이비의 가족을 비롯해 V가 노리고 있는 주요 당원들이 현 정부의 수립 이전 있었던 라크힐 수용소라는 곳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크리디 당수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에 핀치 경감은 본격적으로 라크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자 한다. 그때, 핀치 경감은 또 다른 라크힐 관리자였던 검시관 딜리아의 사망 현장에서 그녀가 남긴 일기장을 발견하게 되고 상부에 이를 보고하고자 하지만 묵살당한다.


 진실을 알고 싶었던 핀치 경감은 일기장에서 라크힐 수용소가 정부가 소수자, 이방인, 환자를 대상으로 바이러스를 개발하기 위한 생체실험실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많은 피실험체 중에서 유일하게 실험에 성공한 사람이 바로 5호실 V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마침, 크리디의 부하로 활동했던 록우드의 연락을 받은 핀치 경감은 그에게서 현 정부가 국가 안보라는 이름으로 라크힐에서 만들어진 바이러스를 학교, 지하철, 정수장에 퍼뜨려 시민들의 공포를 유발하고 이를 통해 지금의 권력을 잡게 되었다는 진실을 듣게 되지만 자신이 만난 록우드가 V가 변장한 가상의 인물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다시 V를 좇기 시작한다. 


 한편, V를 단순히 테러리스트라고 여겼던 시민들은 점차 그가 저지르는 살인 사건과 반정부적인 행동들을 보면서 그에 대해 궁금해한다. 방송사 테러 미수 사건 이후 살인 사건이 더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무마하고자 V가 죽었다고 이야기하며 그를 옹호하는 시민들을 탄압하기 시작한 정부의 움직임에 시민들은 점차 정부에 대한 생각을 바꿔나가며 적극적으로 대항하고자 한다. 결국 정부에 대한 불신을 참지 못한 시민들의 반발로 인해 영국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고 시민들은 저마다 V를 상징하는 가면을 쓴 채 11월 5일 시위를 기다린다.  


가면 속에 가려진 수많은 얼굴들. 그러나 그들의 '신념'만은 그 누구에게도 굽혀지지 않는다.


 약속의 날인 11월 5일, 다시 돌아온 이비와 함께 폭탄을 실은 열차가 있는 지하철역으로 향한 V는 그녀에게 마지막 계획을 맡긴 채 서틀러 의장을 두고 거래를 한 크리디 당수를 만나러 간다. 크리디 당수로 하여금 서틀러 의장을 죽이게 한 V는 결국 마지막 남은 크리디 당수까지 처리한 다음 이비에게 돌아오지만 이내 죽음을 맞이한다. 이비가 슬픔으로 V를 보내주려던 그때, 핀치 경감이 찾아오지만 이비는 V의 뜻이라고 말하며 열차를 출발시킨다. 결국 V의 바람대로 의사당 건물은 폭파되고 이비와 핀치 그리고 수많은 V의 사람들은 그를 기억한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전체주의 정부의 통제와 간섭에 맞서고자 했던 주인공 V와 그를 통해 ‘각성’한 이비의 이야기를 통해 ‘두려움’ 속에서 피어났던 인간의 ‘신념’을 보여준다.   


 V는 시민들의 공포를 불러일으켜 이를 권력으로써 악용하고자 했던 정부의 계획 아래 바이러스를 개발했던 라크힐 수용소의 생활을 겪으며 정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기본권조차 누리지 못한 채 희생되어야 했던 수용소에서 그는 ‘증오심’을 곱씹으며 두려움을 극복하게 되고 정부에 대항해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게 된다. 


 V는 언론(프로더로)을 시작으로 종교(릴리만), 의료(달리아), 정치(크리디), 그리고 정부 자체(서틀러)와 같이 시민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권력 기관들을 ‘상징’하는 인물들을 제거하는 한편 사법부(형사재판소)와 입법부(의사당)와 같이 그동안 정부를 뒷받침했던 기존의 법과 질서들을 ‘상징’하는 건물들을 파괴함으로써 정부 중심의 독단적, 억압적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키고자 한다. 또한, 그는 정부가 통제하고 조작했던 언론을 통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시민들을 ‘가둬두었던’ 정부뿐만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 아래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생각하지 않은 채 ‘갇혀버렸던’ 시민들의 ‘이성적’ 측면을 각성시키는 한편 정부가 금지하고 은폐했던 문화예술을 통해 시민들의 ‘감성적’ 측면을 각성시킴으로써 사회적 ‘무질서’를 불러일으킨다.


 한편, 이비 역시 정부가 고의적으로 살포한 바이러스에 의해 동생을 잃게 되고 반정부 투쟁을 벌이던 부모님이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면서 자연스레 정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된 인물이었다. 정부 소속 경찰 핑거맨의 부당한 행동조차 거부하지 못하고 정부의 언론 조작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방송국에 근무하면서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며 심지어 위기에 처했던 자신을 도와준 V와 디트리히가 반정부적인 입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혼자 도망가고자 했던 그녀의 모습은 이미 정부의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순응’된 채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V가 꾸민 가상의 수용소에서의 ‘증오심’과 함께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발레리의 ‘고결함’을 곱씹으며 그녀는 결국 V의 도움을 통해 두려움을 극복하게 되고 그를 대신해 마지막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존재로서의 제 몸과 제 마음을 바쳐 이데올로기를 부수고자 하는 이의 모습은 결연해보인다.


 이때, 영화는 관객들에게 V와 이비뿐만 아니라 ‘일상화’된 이데올로기 속에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지키고자 서로를 의심하고 비밀을 은폐하며 V를 제거하고자 했던 정부 주요 당원들의 ‘타락’을 보여주는 한편 V를 통해 정부의 강압적 이데올로기를 위한 하나의 ‘부품’과도 같이 자신을 바쳤던 과거의 모습을 ‘뉘우치고’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유토피아’를 위해 깨끗하게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달리아와 핀치 경감들의 ‘회개’를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관객들은 언론에 비치는 V라는 인물을 단순한 호기심으로서 바라보았던 시민들이 점차 그의 신념과 움직임에 ‘공감’하기 시작하면서 안주했었던 그동안의 삶에서 벗어나 스스로 문제점을 찾고 해결하려는 모습 또한 볼 수 있으며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영화는 사회 구조에 당당하게 맞서고자 했던 ‘실천적’ 지식인 V의 이야기를 단순히 그의 ‘개인적’ 복수로만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전체성’의 이데올로기 아래 억눌려왔던 혹은 억눌러야만 했던 시민들에게 하나의 ‘역풍’을 일으키는 원동력으로서 표현하고자 했다.

  


‘신념’에 대한 ‘신뢰’, 그리고 ‘실천’을 통한 ‘실현’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인간 존재가 갖고 있는 고유의 생각에 대한 굳은 ‘신뢰’를 통해 지금의 부조리와 절망에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희망’을 실현할 수 있게 ‘독려’하는 영화이다. 


모두가 함께 하는 '실천' 그리고 그것만이 보여줄 수 있는 '희망'을 영화는 어렴풋이나마 보여준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단일성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통일’시키고 ‘강요’하고 ‘억압’하고 마침내 ‘무감각’하고, ‘무지’하며, ‘무력’하게 만드는 정부와 정부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로 인한 현재의 ‘위기’에 대항하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원했던 변화의 ‘타당성’과 ‘필요성’ 그리고 ‘선의’를 위한 폭력이라는 그들의 방법에 대한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우리에게 아직 남겨져 있지만 불행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불편해하고, 불안해하며, 불쾌해하면서 결국 희망을 위한, 희망을 향한 ‘항해’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나의 아버지였고, 또 어머니였고
                                                 나의 동생이었고, 당신이었고,
                                                         그리고 나였어요.
                                                         우리 모두였어요.”

                                        -제임스 맥티그, <브이 포 벤데타> (V For Vendetta) 中 ‘이비’의 대사


 영화 마지막, 그토록 찾아다녔던 V의 정체를 물어보는 핀치 경감에게 이비는 의미심장한 대답을 남긴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당신만의 신념이 깨어나길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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