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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넴의 글 Sep 24. 2021

서로에 대한 '신뢰'를 모아 '연대'하기 [영화]

영화마다 철학담아


*본 게시글의 원문은 문화예술 플랫폼 '아트인사이트'(artinsight)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원문 :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1980)


 ‘공동체’(共同體, Community)는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 존재가 자신만의 혹은 자신의 것과 유사한 가치와 정체성을 유지하고 존속하기 위해 모인 일종의 사회적 ‘관계’이자 ‘단위’이다. 특히, ‘신뢰’는 공동체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자원’이자 ‘원리’로서 배려와 공감을 넘어서 ‘연대’라는 강력한 동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이번 글은 ‘신뢰’를 중심으로 ‘사회적 규범’과 ‘사회적 연대’, ‘사회적 자본’을 살펴보고 ‘함께’의 가치를 좇고자 했던 퍼트넘의 연구를 통해 영화 <런던 프라이드>(2014) 속 인물들이 ‘혐오’와 ‘무시’의 시대를 허물고 ‘공감’과 ‘공존’의 새 시대를 여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함께 만드는’ 사회,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고찰



 ‘사회적 자본’(社會的 資本, Social Capital)은 1990년대 이후 전 지구적 차원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아온 개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11년 KBS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면서 국내에서도 많은 이슈를 불러일으킨 사회적 자본은 ‘사회 구성원 간 협력을 가능케 하는 공유된 제도, 규범, 네트워크, 신뢰 등 사회적 연결망과 관련된 자원’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19세기 후반 영국의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셜(Alfred Marshall)에 의해 최초로 제시되었다. 이후 20세기 들어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와 미국의 사회학 이론가 제임스 콜만(James S. Coleman)에 의해 각각 마르크스주의와 기능주의적 시각에서 다뤄지기 시작하면서 사회적 자본은 본격적으로 ‘학문적’ 차원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미국의 정치학자였던 로버트 퍼트넘(Robert David Putnam)이 1995년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이라는 논문을 통해 사회적 자본의 사례에 대한 분석과 함께 사회적 자본에 대한 ‘정치적’ 논의를 끌어내면서 사회적 자본에 대한 논의는 점차 ‘대중성’을 확보하게 된다. 논문 제목 속 ‘나 홀로’의 의미는 당시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파편화와 개인화로 인해 더 이상 ‘함께’의 가치를 찾아볼 수 없게 된 미국 사회에 대한 그만의 비유적 표현이었다. 이를 통해, 퍼트넘은 ‘신뢰’와 ‘유대’를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에 대한 참여 다시 말해, 사회적 ‘연대’와 함께 사회적 자본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던 당시 미국의 현실을 꼬집고 가려져 있던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미국 사회에 제기하고자 했다.  


'신뢰'와 '연대'. 그 무시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강조했던 로버트 퍼트넘.


  퍼트넘에 따르면, 앞서 이뤄진 부르디외와 콜만의 연구는 사회적 자본을 개인이 활용할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이라는 점에서 ‘효율성’의 시각을 도입하고자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이 자신의 ‘이기적’ 가치만을 추구한다고 생각하는 논리 다시 말해, ‘자기 이해’(self-interest)에 있어 ‘이기심’만을 ‘단일한’ 동기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퍼트넘은 상호 간 효율성의 추구를 의미하는 ‘호혜성’(reciprocity)의 개념을 통해 사회적 자본을 “개인들 사이의 연계, 이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호혜성(reciprocity)과 신뢰의 규범”으로 재정의함으로써 ‘도덕 철학적’ 입장에서 기존에 이뤄졌던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그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자신의 ‘이익’과 개인적 관련성을 갖는 ‘영리적’ 가치뿐만 아니라 이익과 ‘무관’하거나 ‘공감’을 기반으로 사회 규범과 관련성을 갖는 ‘도덕적’ 가치를 좇는다는 점에서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을 강조하고자 했다. 


 나아가, 퍼트넘은 호혜성을 통해 사회적 자본의 원리가 되는 ‘사회적 규범’의 형성 다시 말해, ‘사회적 연대’라는 움직임에 대한 분석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호혜성 중에서 일반적 거래 관계와 달리 즉각적인 보상을 바라지 않아 보상이 사라지거나 그 가치가 달라질 수 있는 즉, ‘신뢰’와 같이 개인적 이익과는 직간접적으로 무관한 ‘포괄적’ 개념의 호혜성은 사회적 차원의 교환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규범의 기반이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사적 이익의 추구와 집단행동 간 충돌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생산성 또한 보여줄 수 있었다.  


책은 '더불어'가 아닌 '나홀로' 하는 볼링을 통해 공동체주의가 사라져간 미국 사회의 현실을 옮겨온다, 


 한편, 퍼트넘은 ‘상호이익’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적 자본에 대한 연구를 이어간다. 이때, 그는 인류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비공식적 조직인 ‘계’(rotating credit association)를 예시로 들며 상호이익이 단순한 ‘경제적’ 차원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네트워크’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도덕적’ 차원의 이익을 의미함을 밝히고자 했다. 이로써, 퍼트넘은 폭력성과 강제성을 동원할 수 있는 제3자의 강제 개입이 아닌 상호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사회 구성원 간의 ‘자발적 협력’을 통해 사회적 자본의 형성 및 확장을 시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퍼트넘은 호혜성과 상호이익을 통해 마련된 사회적 자본을 ‘결속형’(Bonding)과 ‘연계형’(Bridging)으로 구분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사회적 자본의 미래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타 집단에 대한 ‘배타성’을 기반으로 같은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소속감과 함께 정체성 및 동질감을 형성하게 하는 ‘내부지향적’인 ‘결속형’과 달리 ‘연계형’은 타 집단에 대한 ‘수용성’을 기반으로 같은 집단의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연결성’으로 확장됨에 따라 다양한 집단에 속해있는 구성원들과의 동질감을 형성하게 하는 ‘외부지향적’ 성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회적 연대를 이끌어갈 수 있는 일종의 ‘연료’라고 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퍼트넘은 1960년대 이후 세대교체 등 사회문화적 변화와 함께 텔레비전의 발달 등 과학 기술적 변화에 따라 쇠퇴하고 있던 미국 사회의 사회적 자본을 ‘되돌리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퍼트넘의 연구는 ‘도덕성’의 동기를 효율성의 차원으로 환원시켰다는 점에서 결국 기존 논의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자본이 갖는 자체적 ‘모호함’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그가 제시한 사회적 자본의 개념이 신자유주의 아래 ‘절대적’ 선(善)으로 정의되었던 효율성(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아직 ‘현재 진행 중’인 그의 이론은 전 세계적 차원으로 확장된 사회적 자본의 구체적 사례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치적 의도성 등을 비롯한 초기 저작의 한계를 조금씩 극복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정부나 시장이 아닌 시민 간 연대로 구성된 시민사회의 ‘위력’ 다시 말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연대와 이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자본의 ‘잠재성’을 강조함으로써 그간 ‘학문적’ 영역에 불과했었던 사회적 자본에 대한 논의를 ‘사회정치적’ 영역으로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의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행진’ 같은 영화



 퍼트넘의 연구와 함께 살펴볼 영화 <런던 프라이드>는 1980년대 영국, 탄광을 폐쇄하려는 대처 정부에 맞서고자 생계를 무릅쓰고 파업에 나선 광산노조와 관련된 뉴스들로 시작된다.  


영화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이들이 '어우러지는' 화합의 장면들을 노래한다. 


 동성애자로서 평소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주인공 마크는 광부들의 모습에 감명을 받게 되고 그들을 돕고자 한다. 이에 그는 많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연인 마이크를 비롯해 aycayc 성 소수자 친구들과 함께 광부들을 위한 후원단체인 LGSM(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를 결성하고 그들과의 연대를 시도한다. 탄광촌 출신으로 서점을 운영하던 게딘의 도움을 받아 마크 일행은 런던에서 본격적인 모금 활동을 시작하게 되지만 LGSM이 성 소수자로 이뤄진 단체라는 이유로 후원을 받을 광산노조를 찾는 데 난항을 겪는다.


 수차례 시도 끝에 웨일스의 둘라이스 탄광촌과 연락이 닿게 된 마크 일행은 탄광촌 대표 다이와 만나 동성애자 모임에서의 모금 독려 연설을 기획하며 후원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전한다. 그들의 진심을 느낀 다이의 초대를 받아 마크 일행은 둘라이스로 향해 후원 연설을 펼치지만 여전히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부정적 시선들에 힘겨워한다. 그러나, 자신들처럼 정부의 탄압을 받는 광부들을 돕는 일을 차마 포기할 수 없었던 마크 일행은 경찰서에 구금되었던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게 되고 이를 계기로 마크 일행의 진심을 느끼게 된 마을 사람들은 그들 역시 자신들과 다를 것 없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게 된다. 


영화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손을 '붙잡고', 서로의 손을 '맞잡아가는' 일련의 과정들을 쫓아간다.


 시간이 흘러 파업이 42주차로 넘어갈 즈음, 마크 일행은 런던에서의 성공적인 모금 활동 결과와 함께 다시 한번 둘라이스를 찾지만 탄광에 복귀하는 인력에게만 보조금을 지원해 준다는 정부의 이야기와 함께 장기전으로 접어든 파업 탓에 마을 사람들은 지쳐가고 있었다. 때마침 LGSM 내부에서도 운동의 방향성을 두고 분열이 발생하면서 후원 활동은 위기를 맞는 듯했지만 이전과 달리 서로에 대한 이해를 통해 굳건해진 마크 일행과 둘라이스 사람들은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서로의 사정을 진솔하게 나누며 보다 큰 규모의 모금 활동을 기획하기로 한다.


 한편, 이른 나이에 광부였던 남편을 잃고 혼자 남았던 마리안은 마크 일행이 파업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는 생각에 그들을 거절하고 LGSM과 둘라이스 간 연대가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언론사에 고발한다. 광산노조에 대한 여론이 점차 정부에게 유리하게끔 기울어지자 전국광산노조위원회는 LGSM을 후원단체에서 제외하는 안건에 대한 회의를 계획하며 둘라이스 위원회를 압박하기 시작하고 LGSM 역시 기사화된 이후로 더 많은 위협을 받게 된다. 하지만, 마크는 오히려 이를 이용해 모금 활동을 널리 알리고 대규모 모금 활동을 할 수 있는 콘서트를 기획해 홍보하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에 LGSM은 성 소수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콘서트를 기획하게 되고 둘라이스 광산노조 역시 런던으로 향해 그들을 돕고자 한다.  


어떤 무시와 위협도 희망을 향한 발걸음을 멈출 순 없다.


 다행히 콘서트는 성황리에 마무리되며 대규모 모금에 성공하지만 마리안을 중심으로 LGSM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임의로 회의 시간을 앞당기면서 회의는 둘라이스 광산노조 상당수가 없는 상태에서 LGSM의 도움을 받지 않는 방향으로 마무리된다. 그 소식에 회의감을 느낀 마크는 LGSM을 떠나게 되고 동력을 잃은 LGSM 회원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한편 심지어 무차별적인 폭력을 받으며 점차 잊혀간다. 광산노조의 파업 역시 그동안의 노력에도 1985년 3월 4일 상처뿐인 ‘패배’로 끝나며 둘라이스 광부들 또한 어쩔 수 없이 탄광으로 복귀하게 된다.


 어느덧 연대가 시작된 지 1년이 되어가던 1985년 6월 29일. 긴 방황을 마치고 돌아온 마크와 함께 퍼레이드를 준비하는 LGSM 회원들 앞에 반가운 얼굴들이 등장한다. 둘라이스에서 함께 연대했던 그 모습처럼 밝은 모습으로 나타난 둘라이스 사람들은 LGSM의 후원을 받아왔던 다른 광산노조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행진에 참여한다. 결국, 영화는 행진 이후에도 이어진 그들의 아름다운 연대의 결과들을 보여주며 보다 희망찬 미래로 향하는 걸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희망적'인 사람들을 그리지 않는다. 다만,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을 역동적으로 그려낼 뿐이다.


 영화 <런던 프라이드>는 이유 없는 ‘불평등’을 견뎌내면서도 ‘공감’과 ‘연대’의 태도를 잃지 않았던 인물들이 ‘평등’을 이뤄 나가는 이야기를 통해 ‘함께’라는 말이 가진 위력을 보여준다.


 영화는 사회의 주류와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불평등한 삶을 살아야 했던 LGSM과 둘라이스 광산노조라는 두 집단이 서로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통해 다양한 사회적 경계를 넘어서 ‘함께’라는 의미를 보여주었던 실화를 다루고 있다. 이때, 영화는 마침내 ‘연계형’의 모습을 갖추게 된 두 집단의 이야기를 단순히 ‘결과’로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약 2년간 이어졌던 모금 활동을 통해 두 집단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간 ‘과정’을 중심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마크를 비롯한 LGSM의 회원들은 연대를 건네는 과정에서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따라 여성의 안전을 우선시하고자 했던 일부 회원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그동안 금기시되어왔던 동성애의 해방을 위해 보여왔던 ‘적극성’과 ‘용기’, ‘자유로움’을 어느새 둘라이스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한편, 다이를 비롯한 둘라이스 사람들은 연대를 받는 과정에서 삶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 따라 남성성과 보수성을 우선시하고자 했던 일부 마을 사람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한순간에 무너져버린 생존권의 확보를 위해 보였던 ‘결속성’과 ‘투쟁’, ‘단단함’을 어느새 LGSM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그 치열하고도 아름다운 과정을 통해 관객들은 비록 예상치 못했던 문제들로 인해 두 집단 간 ‘경제적’ 연대는 아쉽게 마무리되었지만 두 집단 간 굳건한 ‘도덕적’ 연대 그리고 그들이 존중받는 사회가 형성되었음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악수는 건네는 사람에게도, 건네진 사람에게도 서로를 향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한편, 영화는 ‘꽃’처럼 피어난 그들의 연대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연대를 가능하게 한 두 가지 ‘축’에 대한 이야기 역시 풀어가고자 한다. 먼저, 영화는 연대의 ‘씨앗’이 되었던 인물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보수적’ 정책을 강조했던 대처 정부가 집권하고 있던 1980년대 당시 영국을 배경으로 영화는 각각 ‘이성애’와 ‘생산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압박을 견뎌내야 했던 LGSM과 둘라이스 사람들이 보였던 다양한 반응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 특히, 동성애자라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려고 했던 브롬리가 보여주는 ‘도피’의 반응이나 광부였던 남편을 잃었던 기억으로 살아가며 파업 활동을 끝까지 이어나가고자 했던 마리안이 보여주는 ‘폐쇄’의 반응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면서도 한편으로는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영화는 파업을 돕는 동안 뒤늦게나마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웨일스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된 샨이 보여주는 ‘도전’의 반응이나 모금 활동을 돕는 동안 종교적 이유로 자신을 멀리했던 가족들에게 용기 내 찾아간 게딘이 보여주는 ‘극복’의 반응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모든 구성원들이 저마다 다른 자신의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주인공’이자 평등한 사회를 위한 ‘연결점’이 될 수 있음을 느끼게 만든다.  


영화는 단 한 순간도 함께 하는 이들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 함께라는 말을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는 연대의 ‘줄기’가 되었던 음악들 역시 들려준다. ‘록’(Rock) 장르에 반발한 미국의 유색인종 및 동성애 계층의 지지를 받으며 동성애자들을 대표하는 장르로 자리를 잡게 된 ‘디스코’(Disco) 장르를 비롯해 성 소수자 멤버가 있는 아티스트 혹은 성 소수자 커뮤니티의 지지를 받는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통해 영화는 자신들의 자유로운 문화를 즐기면서도 신념을 꿋꿋이 지켜나가고자 하는 성 소수자들의 열정을 들려준다. 한편, 굳건한 연대를 주장하는 LGSM의 앞에서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을 상징하는 ‘빵과 장미’(Bread and Roses)를 함께 부르는 둘라이스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비로소 진정한 공감을 통해 그동안의 편견과 선입견을 극복하고 연대 의식을 갖게 된 둘라이스 사람들의 열정 또한 들려주고 있다.   



‘점’에서 ‘점선’으로, ‘실선’까지 함께 하는



 영화 <런던 프라이드>는 그동안 ‘연결’되지 못했던 사회 구성원들이 ‘상호 간 신뢰’의 태도를 통해 서로 간의 연결을 보다 굳건하게 지속시키고 확장하고자 하는 ‘역동성’의 이야기이다. 


 영화 속 두 집단의 만남은 하나의 ‘점’처럼 우연한 기회로 시작되었지만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어쩌면, 끝난 이후에도 그들의 행진은 ‘점선’으로, ‘실선’으로 짙어지고 있었다. ‘소수자’가 ‘소외자’가 되지 않는 세상으로. ‘광부들(miner)’이 ‘약자(minor)’가 아닌 세상으로.


                 
                                                      “깃발을 들든 아니든
                                              모두 함께 행진하는 게 중요하지.”

                                                -매튜 워처스, <런던 프라이드> (London Pride) 中 ‘조’의 대사


 자신을 사회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홀로’ 지내야 했던 조는 마지막 장면에서 누구보다도 ‘함께’의 가치를 힘주어 외친다. 지금껏 당신에게 2개의 손이 있었다는 사실, 아직 누군가에게 내어줄 손이 남아있다는 사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의 손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보다 선명해진 사실들과 함께 ‘우리’의 행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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