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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넴의 글 Sep 26. 2021

'인정'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기' [영화]

영화마다 철학담아


*본 게시글의 원문은 문화예술 플랫폼 '아트인사이트'(artinsight)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원문 :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2081)



“인간은 필연적으로 인정받으며, 필연적으로 인정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필연성은 인간 본유의 것이며, 내용과 대립하는 우리의 사고의 필연성이 아니다. 인간 자체는 인정 행위로서의 운동이며, 이러한 운동이 바로 인간의 자연 상태를 극복한다. 즉 인간은 인정 행위다.”

                               -악셀 호네트 (Axel Honneth), <인정투쟁> (Kampf um Anerkennung) 中


 번번이 무산되고 있는 ‘차별금지법’에서부터 특정 성별 혹은 성 정체성, 성적지향에 대한 ‘혐오’, 그리고 얼마 전 있었던 국내 유명 AI 서비스 내 소수자 ‘비하’ 발언 논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약함’을 숨기기 위해 누군가에게 ‘악(惡)함’을 보여주는 마음들로 기울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인정’(認定, Recognition)의 태도가 아닐까?


 이번 글은 ‘인정’을 중심으로 ‘상호주관적’ 관계에서 ‘주체성’을 찾아가는 삶의 과정을 다루고자 했던 호네트의 ‘인정 투쟁’을 통해 영화 <어느 가족>(2018) 속 인물들이 ‘적극적’으로 ‘가족’의 관계를 만들어가고 ‘인정’을 통해 서로를 보듬어주었던 장면들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상호 간 인정’을 통해 ‘서로의 삶’을 찾아주는 과정의 사회학



 ‘인정’은 단순히 어떤 사실이나 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소극적’인 마음가짐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서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가치를 ‘존중’받고자 하는 ‘적극적’인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인정’의 개념은 관념론을 통해 각자의 고유한 잠재성을 발현하는 ‘자아실현’을 설명하고자 했던 독일 철학자 게오르그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의 <정신현상학>(Phaenomenologie des Geistes)에서 최초로 제시되며 학문적으로 정립되었다.


 자아실현에 있어 ‘욕망’을 강조하고자 했던 헤겔은 자기 존재를 ‘확신’하려는 욕망 다시 말해, 자의식의 ‘자립성’을 인정받기를 원하는 인간이 ‘객관적이지 못한’ 자신을 대신해 타인의 인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는 모습을 보인다고 진술했다. 이때, 그는 이 과정을 ‘생사에 건’ 투쟁의 과정 다시 말해, ‘인정 투쟁’(Recognition Struggle)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인정을 ‘쟁취’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의 과정임을 주장했다. 이는 곧 헤겔이 인정 투쟁을 곧 생존을 위한 ‘충동적’ 움직임이 아니라 인격에 대한 모욕을 극복하고 자기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즉, 자아실현을 가능케 하는 ‘도덕적’ 실천의 측면으로 바라보았음을 의미했다. 


 헤겔 이후 ‘인정 투쟁’에 대한 논의는 독일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에 의해 일반 대중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역시 헤겔의 고찰을 따라 인정 투쟁 혹은 인정 그 자체를 ‘주체성’을 찾는 자아실현의 과정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호네트는 이에 덧붙여 타인과의 상호주관적 관계성을 강조했던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G.H.미드(George Herbert Mead)의 ‘일반화된 타자’(Generalized Other)를 비롯해 삶에 있어 잠재된 투쟁에 주목했던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 그리고 개인 간 의사소통을 통한 상호작용을 중시했던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도덕철학의 입장에서 헤겔식 인정 투쟁의 모델을 보다 분명하게 다듬어내고자 했다.  


'인정'이야말로 인간 존재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 제고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악셀 호네트.


 호네트에 의하면, 개인의 관념과 행동에 있어 기준이 되는 ‘일반화된 타자’와의 상호주관적 관계에서 개인은 ‘주체로서의 자신’과 타인의 기대에 맞춰진 ‘객체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때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삶의 긍정적 관계를 맺게 하는 ‘사회적 인정’을, 때로는 자신에게 무력감과 사회적 굴욕을 주며 삶의 부정적 관계를 맺게 하는 ‘사회적 무시’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인정 투쟁의 과정에 들어가게 된다. 그에게 있어, ‘무시에 의한, 인정을 위한’ 인정 투쟁은 곧 일생에 걸쳐 타인에 대한 공감을 실천할 수 있는 ‘사회화’와 함께 진정한 자아실현으로 이어지는 ‘개성화’에 참여할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작용-반작용’의 과정을 의미했다.


 이때, 호네트는 인정과 무시의 형태와 범위를 단계적으로 구분함으로써 헤겔의 논의와 차별화를 시도할 뿐만 아니라 타자에 의한 인정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자아실현의 성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적극성’의 측면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가장 먼저 개인은 가족의 ‘사랑’을 통해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으며 ‘자기확신’(자신감)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어 개인은 시민사회의 ‘권리 부여’를 통해 하나의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며 ‘자기존중’(자존심)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개인은 국가 혹은 민족 차원으로 확대된 ‘사회적 연대’를 통해 도덕적 ‘존엄성’을 인정받으며 ‘자기 가치부여’(자부심, 자긍심)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책은 사회 속에서, 관계 속에서 치열하게 계속되는 인정투쟁을 다루고자 한다. 


 나아가, 호네트는 ‘자기 신체’의 주인으로서 개인이 갖는 근본적 믿음을 탈락시키는 ‘신체적’ 훼손(학대, 폭력)을 비롯해 ‘사회 구성원’으로서 개인이 갖는 사회적 인격을 탈락시키는 ‘사회적’ 훼손(권리에의 부정, 사회적 배제), 그리고 ‘존재 그 자체’로서 갖는 실존적 가치를 탈락시키는 ‘실존적’ 훼손(사회적 가치부여의 훼손)에 이르기까지 인정을 ‘거부’하거나 ‘유보’하게 만드는 사회적 무시에 대한 단계적 분석 역시 놓치지 않았다. 이는 곧 ‘좋은 삶’을 살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타인이라는 외부적 영향에 취약한 인간의 ‘민낯’을 보여주는 그의 ‘비판’임과 동시에 인정 투쟁에 있어 올바른 방향성을 갖춰야 함을 이야기하는 그의 ‘당부’였다.


 인정에 대한 논의에 있어 사랑, 권리, 연대 등 추상적이고 다소 감정적인 차원의 개념들에 대한 분석과 방법론적 고찰이 부족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행위’로서의 인정과 인정 투쟁이라는 패러다임 아래 ‘도덕성’과 ‘사회성’ 그리고 ‘주체성’에 대한 논의를 일상 속 다양한 관계들과 함께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호네트의 이론은 개인-사회를 초월하면서도 연결하는 ‘관계’라는 개념에 맞춘 새로운 시각에서 인정 투쟁으로 물들고 있는 현대 사회에 메시지를 보내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개인적 차원의 인정 투쟁을 사회적 진보의 움직임으로 확장해 논의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호네트의 이론은 전인적 차원에서 개인의 자아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학 및 윤리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긍정적 평가 역시 받고 있다.   



가족의 어떤 ‘형태’보다도 어떤 ‘의미’에 대한 영화



 호네트의 인정 투쟁과 함께 살펴볼 영화 <어느 가족>은 한적한 시골, 아버지와 아들로 보이는 오사무와 쇼타가 서로 망을 봐주며 마트에서 몰래 도둑질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영화는 시작부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상적'인 시민, 가족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무시한다.


 어김없이 도둑질에 성공하며 집으로 돌아오던 오사무와 쇼타는 추운 겨울날 홀로 밖에서 추위에 떨고 있던 소녀 유리를 발견하게 되고 어머니로 보이는 노부야, 큰 언니로 보이는 아키, 그리고 할머니로 보이는 하츠에가 있는 ‘수상한’ 집으로 데려오게 된다. 유리의 몸에서 학대의 흔적을 발견한 하츠에의 반대에도 노부야의 주도로 가족들은 유리를 돌려보내고자 하지만 아이의 집에서 들려오는 고성에 이내 다시 집으로 데려와 새로운 가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들은 사실 외도한 전 남편의 연금을 받으며 지내고 있는 할머니 하츠에의 밑에서 법을 피해 함께 살고 있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이었다. 공사장에서 일용직으로 근무했지만 다리를 다친 이후로 도둑질에 몰두하는 아버지 오사무, 세탁 공장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일이 줄면서 자연스레 수입이 줄어든 어머니 노부야, 유학 생활을 포기하고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큰 누나 아키, 오사무를 따라 마트에서 도둑질을 이어가는 아들 쇼타, 그리고 도박장에서 거리낌 없이 남의 돈에 손을 대는 할머니 하츠에까지. 불안하고 위태로운 생활 속에서도 가족들은 유대감을 느끼고 있었고 유리가 들어오게 되면서 더욱 끈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행방불명된 유리의 소재에 대한 뉴스가 TV에 나오게 되자 가족들은 다시 한번 유리를 돌려보내고자 하지만 이미 가족들에게 정이 든 유리는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이에 가족들은 유리에게 ‘방울’을 뜻하는 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며 진정한 가족으로 받아들이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린(유리)을 가르치고자 한다.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린을 멀리했던 노부야가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가진 린(유리)으로부터 유대감을 느끼게 되면서 좀처럼 가족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던 린(유리)에게 진정한 사랑과 가족의 의미를 다시 알려주고자 한다.  


장면장면마다 영화는 가족으로서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꾹꾹 눌러 담는다.


 시간이 흘러 여름, 바다에 가보고 싶다는 린(유리)을 위해 가족들은 다함께 바다에 놀러가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고 돌아오지만 안타깝게도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남긴 채 할머니 하츠에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가족들은 할머니를 진정으로 애도하고자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가 받을 연금을 대신 받기 위해 오사무와 노부야의 주도로 하츠에를 집 한 편에 그녀를 묻고 서로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한다. 처음 보는 가족들의 냉혹한 모습에 홀로 버려졌던 자기 자신을 아들로 받아주었던 기억으로 살아왔던 쇼타는 방황을 하게 되고 어느새 자신을 닮아 도둑질을 하고 있는 린(유리)를 말리던 도중 경찰들에게 쫓기며 결국 부상을 당하고 만다. 이에 쇼타의 보호인이었던 오사무와 노부야는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들의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가족들을 이끌고 야반도주를 하던 중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경찰들에게 붙잡히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과거가 하나둘씩 밝혀지고 만다. 사실 하츠에는 외도한 전 남편의 손녀였던 아키를 데려와 기르며 아키 몰래 전 남편의 가족들로부터 몰래 돈을 받고 있었고 치정 관계였던 노부야가 남편을 죽이자 오사무는 함께 그를 유기하는 범죄를 저질렀던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게 된 아키는 하츠에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실망감을 느끼며 하츠에가 집에 묻혀있다는 사실을 자백하게 된다. 결국 노부야는 린(유리)이 예전의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진심으로 사랑했던 가족들의 기억을 떠올리며 홀로 자신의 죗값을 치르고자 한다.


 시간이 지나, 홀로 수감 생활을 하게 된 노부야의 부탁을 받은 오사무는 쇼타와 함께 그녀를 찾아간다. 예전의 ‘어느 가족’에서 보였던 모습보다 건강해지고 밝아진 쇼타의 모습에 노부야는 기뻐하면서도 자신들이 그를 처음 발견했던 곳을 알려주며 그를 가족에서 놓아주기로 한다. 한편, 그동안 쇼타로부터 아버지로 불리고 싶었던 오사무 역시 역시 쇼타와 마지막으로 시간을 보내며 자신을 아저씨라고 불러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게 된다. 쇼타 또한 자신을 받아주었던 가족들을 생각하며 자신을 낳아준 가족들의 품이 아닌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고자 한다. 영화는 그들의 이야기와 함께 다시 유리라는 이름으로 돌아간 린이 보다 성장한 모습으로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 준 ‘어느 가족’을 그리워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영화 <어느 가족>은 사회로부터 ‘방치’되었던 인물들이 가족보다 더 애틋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품어준 이야기를 통해 그간 잊어버리고, 잃어버렸던 가족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한다.


 영화는 기존의 관계로부터 외면당한 이후 가족의 ‘형태’만을 갖춘 채 숨어지냈던 인물들이 가족 구성원의 ‘변화’를 겪게 되면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성장’하고 더욱 굳건한 ‘유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들로 이어진다. 나아가,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그들이 숨기고 싶었던 ‘무시’ 받던 과거들을 솔직하게 보여주면서도 서로에 대한 ‘인정’을 통해 진정한 ‘가족애’를 공유하게 되었음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가족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는 '존재'로서, '가족'으로서 서로를 안아주고 다독여주는, 제목 그대로 '어느 가족'의 이야기이다.


 먼저, 첫 번째 변화는 유리를 새로운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이때, 영화는 비록 정식 부부로서 ‘사회적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부모로서 가족들의 인정을 받길 원하는 오사무와 노부야의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보여준다. 하츠에의 걱정에도 자신들이 알려질까 유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던 두 사람이었지만 그녀가 그동안 ‘사회적 무시’를 받아왔다는 사실에 린이라는 이름과 함께 그녀를 받아들이게 된다. 특히, 아이에 대한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던 노부야는 자신과 닮은 유리의 모습에 연민과 동질감을 넘어 강한 유대감을 느끼게 되면서 그녀에게 사랑과 가족의 의미를 다시 알려주고자 한다. 결국, 사회로부터 숨어지냈던 그들의 과거가 밝혀지는 순간 두 사람은 자신들을 ‘선택’한 유리와 쇼타를 비롯한 가족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놓아주며 과거에 저지른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어서, 두 번째 변화는 하츠에가 세상을 떠난 이후 일어나게 된다. 이때, 영화는 비록 유흥업소 직원으로서 ‘사회적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자신과 달리 물질적으로 이어져 있는 다른 가족들을 인정하지 못하는 아키의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보여준다. 유학 생활을 포기하고 할머니 하츠에를 따라서 만난 새로운 가족들을 만났던 아키였지만 처음 만난 손님에게도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할 만큼 여전히 예전의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하츠에의 죽음 이후 아키는 자신과 달리 오직 연금만을 생각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곧 하츠에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면서 실망을 느낀다. 하지만, 하츠에 역시 자신 몰래 돈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키는 그동안 자신이 느껴왔던 가족의 의미에 대해 회의하면서도 그들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첫 번째 변화에서부터 시작해 두 번째 변화를 지나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그동안 가족의 의미를 알지 못했었던, 가족을 인정하고 인정받는 행위 자체를 생각해보지 않았던 쇼타의 이야기를 가장 중점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학업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던 쇼타는 가족들의 권유로 좀도둑질을 이어나가는 한편 자신들을 가족으로 인정해달라는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던 중 우연히 유리를 만나 그녀로부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이후로 조금씩 가족이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 쇼타는 홀로 남겨졌던 자신을 구하고 싶었다는 가족들의 말과 하츠에의 죽음 이후 오직 그녀가 남긴 돈에만 눈독을 들이는 가족들의 행동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결국, 자신이 만류했던 도둑질을 어느새 배워 따라하고 있는 유리의 모습을 보게 된 쇼타는 가족들이 숨기고 싶던 모습들을 의도적으로 밝히고자 경찰들에게 대신 잡히고 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사랑으로 보듬어주고 인정해주었던 가족들의 품을 떠나는 순간 자신의 진정한 가족이라고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겉으로 보이게는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이 있었어도 그들은 '진정한' 가족이었다.


  이때, 중반부까지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등장인물들을 바라보던 영화는 후반부에 흡사 조사자 혹은 취조자의 눈으로 시점을 전환함으로써 ‘어느 가족’ 밖의 세상이 그들을 내려다보는 냉혹하고 딱딱한 시선들을 보여준다. 영화 내내 주인공들은 ‘법적’ 기준에 맞지 않는 도둑질을 비롯한 살인과 시체 휴기, 성매매(유흥업소 종사), 유괴의 행위들에서부터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는 지나친 물질주의적 시각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죄책감이나 의식 없이 ‘변칙적’인 생활을 이어나간다. 


 영화는 이를 정당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말처럼 그들을 “조금씩 점점 더 가난”하게 만드는 현실 속에서 ‘사회적 무시’를 넘어 ‘도덕적 무시’, 심지어 ‘실존적 무시’를 받는 상태에 이른 사람들이 ‘유사 가족’의 형태로나마 모여 서로에 대한 인정을 통해 그들만의 가족을 만들고, 그들만의 가족애를 되찾는 것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피’보다 ‘삶’으로 이어진 ‘가족 같은’, ‘가족다운’ 가족 



 영화 <어느 가족>은 혹독했던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서로를 한 가족으로 인정해주며 서로의 삶에 있어 ‘긍정적’인 자아로 성장할 수 있게 했던 ‘어느 가족’의 이야기이다.


 비록 그들의 물리적 거리는 멀어졌지만 영화는 누구보다 ‘가족 같았던’, ‘가족다웠던’ 기억 그리고 사랑과 존중의 친밀했던 마음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전보다 더욱 가까워졌음을 소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겨울-여름-겨울’로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계절들처럼 말이다.


                                                    “스위미가 알려주었다
                                                    절대 흩어지면 안 되며
                                                각자 위치를 지켜야 한다는 것
                                   모두가 한 마리의 큰 물고기처럼 헤엄치게 됐을 때
                                                               (중략)
                                                    아침의 차가운 물 속을
                                                   한낮의 반짝이는 빛 속을
                                                     하나가 되어 헤엄쳐서
                                                  커다란 물고기를 내쫓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츠, <어느 가족> (万引き家族) 中 ‘쇼타’의 대사


 작은 물고기들이 모여 거대한 참치를 이겨내는 이야기를 읽으며 쇼타는 ‘피’가 아닌 ‘삶’ 그 자체로 이어진 가족들에 대한 강한 유대를 느끼게 된다. 비록 몸은 흩어졌지만 마음으로 하나가 된 그들은 세상이라는 ‘커다란 물고기’를 내쫓을 수 있는 힘을 어느새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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