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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넴의 글 Sep 30. 2021

'존중'을 담아 나와 너를 동시에 '사랑'하기 [영화]

영화마다 철학담아

*본 게시글의 원문은 문화예술 플랫폼 '아트인사이트'(artinsight)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원문 :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2446)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안쪽에만 달려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사랑. 우리는 어딘가에 있을 ‘사랑’을 항상 확인하고자 하고 확신하기를 원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사랑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감각할 수 있을까?


 이번 글은 ‘사랑’이 보여주는 ‘활동성’을 중심으로 관계에 놓인 각각의 주체에 대한 ‘존중’을 담아내고자 했던 헤겔의 논의를 통해 영화 <그녀>(2014) 속 등장인물들이 각각의 사랑의 주체로서 사랑의 ‘실천’에 임하는 과정과 함께 자신만의 의미를 ‘실현’하는 과정을 보고자 한다.   



‘인륜적’ 차원의 ‘사랑’을 ‘발견’하고 ‘확대’하고자 했던 철학



 “칸트 이전의 모든 철학은 칸트에게 흘러들어와 독일 관념론이라는 호수에 고였다가 헤겔을 통해 흘러나갔고 이후 모든 사상의 원천이 되었다.”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은 인간 존재의 의식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각각 비판철학과 관념론을 정립함으로써 지금의 현대 철학을 가능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그동안 단순한 감정으로 여겨졌던 사랑을 철학적 시선으로 고찰하고자 했던 그들은 예수의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기독교 신학에 대한 다른 해석을 보여주면서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건네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인간을 지성(직관적 이해)과 협의(狹義)의 이성(초경험적 이해), 그리고 감성(판단력)을 가진 ‘도덕적 존재’로 바라보았던 칸트는 기계적으로 정해지는 자연의 ‘타율성’에 대비되는 인간 의지의 ‘자율성’(自律性, Autonomy) 개념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 전반에 걸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상호 침투하며 작동하는 ‘자율성’은 인간 존재에게 ‘의무성’과 ‘강제성’을 부과함으로써 내적 도덕성을 발현하는 명령을 의미했다. 그중에서도 지성을 바탕으로 하는 ‘인식적’ 자율성이나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윤리적’ 자율성과 달리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미적’ 자율성은 감정을 가진 인간 존재의 한계를 의미함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실천이성’이 담긴 정언명령을 통해 ‘덕’(德)을 지향하고자 했던 칸트의 사고를 대변하였다.




칸트와 헤겔을 빼놓고선 근현대 그리고 유럽의 철학을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쾌와 불쾌라는 감정에 대한 인간 존재의 판단을 의미하는 미적 자율성은 ‘객관성’으로 향하는 지성과 합치되어 예술적 차원의 ‘미(美)’를 보여주는 한편 ‘주관성’으로 향하는 이성과 불합치되어 도덕적 차원의 ‘숭고’를 보여준다. 이는 곧 미적 자율성이 인간 존재의 내적 도덕성 다시 말해, 도덕적 의미의 ‘선’(善)을 위한 필수적 개념임을 의미함과 동시에 각각 미와 숭고를 불러일으키는 감정인 ‘사랑’과 ‘존경’에 대한 논의가 필요함을 의미했다.


 사랑은 칸트에게 있어 자연적으로 주어진 성적 욕구의 ‘자애’를 비롯해 단순히 물질로서 대상에 가까워지길 바라는 감각이라는 점에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성’이라는 보편적 기준에 모순되는 감정이었으며 타인에 대한 존중을 담았던 예수의 가르침과 같은 ‘실천적’으로 이뤄지는 사랑만이 하나의 명령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반면, 존경의 경우 인격으로서 거리감을 유지하려는 감각이라는 점에서 자기 강제를 통한 자기 규제와 함께 서로에 대해 함부로 할 수 없게 하는 ‘의무성’을 내포하는 감정이었으며 이는 곧 인간 존재에 대한 존엄성의 근거이자 도덕 법칙의 준칙으로 활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애를 차단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를 통해, 칸트는 사랑의 자세가 아닌 존경의 자세야말로 인간이라는 도덕적 존재가 자신만의 목적을 실천할 수 있는 덕의 ‘의무’ 그 자체임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인간의 의식을 ‘분리’하고 사랑보다 존경을 강조했던 칸트와 달리 헤겔은 그의 논의에 변증법의 사고를 더해 일종의 ‘운동성’을 부여, 분리된 인간의 의식을 다시 ‘통일’시키고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다. 물론 그 역시 사랑이 단순한 욕구의 차원이 아니며 사랑에 대한 의무 또한 가능하지 않다는 칸트의 논의를 따랐지만 <기독교의 정신과 그 운명> (Der Geist des Christentums und sein Schicksal) 집필을 계기로 헤겔은 예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윤리에 대한 칸트의 해석에 있어 모순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헤겔에 따르면, 자율성을 통해 목적 그 자체로서의 의무를 강조했던 칸트의 윤리학은 단지 의무의 형태로 표현되어있다는 이유로 삶에 스며들어 있는 예수의 사랑을 ‘실천적’ 사랑이라는 이름의 강령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또한,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고 자기 강제 및 자기 규제라는 ‘자기 구속적’ 의무를 강조하는 논의를 이어갔음에도 결국 ‘실천적’ 사랑을 통해 자기 자신을 넘어 타인(이웃)에게로 퍼져나가는 사랑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자체적 모순을 안고 있었다. 이에 헤겔은 예수의 사랑에 대해 죽음이라는 자기희생과 함께 부활이라는 자기 인식을 동반한 ‘초인적’ 윤리라고 해석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그는 숭고함 그 자체를 의미하는 신(神) 앞에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타인에게 베푸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명예를 좇을 수 있는 ‘구체적’ 과정으로서의 사랑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도덕적' 인간관을 강조했던 칸트가 존경을 택했던 반면 '주체적' 인간관을 강조했던 헤겔은 사랑을 택했다.  


 이처럼 ‘종교적’ 차원으로 해석되었던 사랑의 윤리를 ‘현실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던 헤겔의 논의는 ‘보편적’ 사랑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그에게 있어, ‘사랑’은 분리되어있는 두 주체가 서로의 내부에서 서로를 발견하는 ‘이중화’의 과정에서 각자의 ‘불완전성’을 자각하는 ‘자기 인식’과 함께 서로의 ‘독립성’을 확보하게 도와주는 정신을 의미했다. 

 

 그러나, 모든 도덕성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사랑은 ‘우연적으로’ 다양한 고통과 갈등 역시 동반하는 양상을 보였는데 이때, 헤겔은 ‘가족’이라는 원초적 공동체를 비롯해 ‘존경’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주의 윤리’를 사랑과 결부시킴으로써 서로에 대한 용서와 서로를 위한 희생을 이끌어내고 나아가, 주체 간의 분열을 극복하고 각각의 자기의식을 갖출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곧 헤겔이 의무로서의 존경만을 강조했던 칸트의 ‘반성적’ 사고를 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동안 분리되었던 사랑과 존경을 ‘통일’시키는 한편 ‘추상적’ 차원에 머물렀던 도덕성을 ‘실천적’ 차원의 윤리성으로 격상, ‘연대성’이라는 실체를 갖춘 현실적 윤리를 제시하고자 했음을 의미했다.


 정리하자면, 헤겔식 사랑은 단순히 종교적 공동체에서의 ‘가르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성이 최초로 발현되기 시작하는 가족이라는 원초적 공동체에서부터 합리성을 기반으로 정립된 국가라는 근대적 장치 및 제도에 이르기까지 형식과 상관없이 ‘공동체주의’ 이념과 결부되어 나타남으로써 칸트식의 그것과 달리 어떠한 강제성 없이 오직 인간 존재의 ‘자발성’ 위에서 타인과의 유대와 화합을 보여줄 수 있는 윤리를 의미했다. 나아가, 인간 의식에 대한 ‘통일’에의 의지와 함께 ‘존재’ 그 자체의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그동안 주체 간의 ‘분리’를 전제로 ‘소유’의 개념이 지배했던 근대의 ‘원자론적’ 사고관과 작별을 고하는 계기를 의미했다.



사랑에 대한 ‘의존’과 ‘의지’, 그리고 ‘의미’에 대한 영화



 헤겔의 이론과 함께 살펴볼 영화 <그녀>는 뛰어난 어휘력과 함께 자신만의 감성을 담아 의뢰받은 사연을 대필해주며 살아가는 주인공 테오도르에 대한 소개와 함께 시작된다.


영화는 인공지능과의 감정을 나눈다는 독특한 소재로 시작한다.


 의뢰인들로부터 특유의 섬세함을 인정받는 테오도르는 자신의 일에 보람을 느끼지만 전 부인이었던 캐서린과의 기억들로 힘들어한다. 홀로 외로움에 힘겨워하던 그는 우연한 계기로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OS1을 접하게 되고 자신의 취향에 맞춰 설정된 ‘사만다’를 만나게 된다. 자신을 경험을 통해 진화한다고 소개한 사만다는 데이터 정리와 교정 업무를 비롯해 테오도르의 일을 도울 뿐만 아니라 그와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 점차 많은 감정들을 공유하게 된다. 심지어, 이별의 슬픔을 앓고 있는 테오도르에게 가장 큰 의미를 가졌던 캐서린과의 기억을 나누고 실체가 없는 사만다에게 있어 가장 큰 의미인 몸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로 가까워진다.


 그러던 중, 지인으로부터 한 여성을 소개받은 테오도르는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에 대해 고민하지만 사만다의 격려를 통해 용기를 내고자 한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보여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그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다시 사만다에게 돌아오게 되고 자기 자신이 단순한 외로움에 누군가를 만나려 했다는 생각에 자책을 하게 된다. 이에 테오도르의 감정을 어느새 읽고 있던 사만다는 진심으로 그의 고민을 이해해주고 보듬어주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차원을 뛰어넘어 절친 그 이상의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서로에게 보다 솔직해진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순간의 감정을 담아 음악을 함께 만드는 한편 테오도르의 지인들에게도 거리낌 없이 소개할 만큼 가까워지게 된다.


 한편, 대학 시절 테오도르와 연인이자 현재는 이웃으로 지내고 있는 에이미는 사소한 다툼으로 오랜 기간 이어졌던 결혼생활을 끝내게 된다. 이에 자신처럼 이별의 아픔을 겪는 그녀를 위해 테오도르는 간간이 집에 찾아가 농담 섞인 말들을 건네며 위로하고자 한다. 그러던 중, 언젠가부터 조금씩 밝아지는 에이미의 모습에 궁금해하는 테오도르에게 그녀는 전 남편 찰스가 두고 간 인공지능 운영체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사만다와 연인이 되었다는 그를 응원하고자 한다. 테오도르 역시 그녀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과 진심 어린 격려에 사만다와의 사랑을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고 점차 다가오는 캐서린과의 이혼 조정일에 용기를 내려한다.


지금 사랑을 하고 있든, 하고 있지 않든 영화 속 인물들은 끙끙 외로움을 앓는다.


 그렇게 다가온 합의의 날, 테오도르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캐서린을 만나 그녀에게 사만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만 현실적인 충고와 함께 자신을 매섭게 대하는 캐서린의 반응에 또 한 번 힘들어한다. 이에 그는 사만다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 혼란을 느끼는 한편 자신의 이기심으로 알게 모르게 열등의식을 갖고 힘들어하던 캐서린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 이후로 점차 테오도르가 자신을 멀리한다고 생각했던 사만다는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끔 자리를 비워주는 한편 실체가 없는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며 자신을 대신해 성관계를 해줄 여성을 소개해준다. 하지만, 현실에 대해 생각하게 된 테오도르는 괴리감을 느끼며 자신을 자책하는 한편 사만다가 사람인 척 연기한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면서 그녀를 멀리하고자 한다.


 슬픔과 함께 자신의 감정의 혼란스러움을 겪은 테오도르는 에이미를 찾아가게 되고 그녀로부터 그녀 역시 자기 자신에게 확신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었지만 인공지능을 통해 행복과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에 다시 한번 사만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낀 테오도르는 사만다에게 돌아가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하고 그녀와 화해하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에이미처럼 인공지능과의 사랑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직장 동료 폴과 그의 여자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이전처럼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사만다와 보낸 많은 시간에도 테오도르는 끝내 그녀에게 캐서린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지 못해 힘들어한다. 그리고 사만다는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진 자신의 변화 속도에 불안하다는 말을 전하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 실제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만을 위한, 자신만을 향한 사만다가 사라지던 날. 테오도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리고 업데이트를 위해 사만다가 잠시 사라지던 날, 테오도르는 자신만이 기댈 수 있었고 자신에게만 기댄다고 생각했던 사만다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그리고 다른 OS와 이야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와의 사랑을 갈구하게 된다. 이에 사만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테오도르가 원하는 인간만의 감정을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결국 자신을 구속하는 그로부터 떠나기로 한다. 다시 혼자 남은 테오도르에게 그와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을 떠나보낸 에이미가 찾아오게 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댄다. 이제야 사랑에 대한 자신만의 진심을 담을 수 있게 된 테오도르가 캐서린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영화는 마무리된다.


 영화 <그녀>는 자신만의 뚜렷한 삶을 살지 못했던 인물들이 사랑을 통해 서로에 대한 ‘의존’과 서로를 향한 ‘의지’를 배우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사랑이 갖는 ‘의미’를 이야기해준다.


 영화의 주인공 테오도르는 감각적인 표현들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을 대신 전해주는 ‘대필 작가’로서 성공한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정작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에서는 아내 캐서린과의 이별을 겪게 되면서 ‘불완전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던 그에게 ‘우연히’ 찾아온 사랑의 대상 인공지능 사만다. 호기심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일에 대한 도움뿐만 아니라 실제 사람처럼 뛰어난 공감 능력을 보여주는 사만다의 모습에 테오도르가 ‘타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서 친구 이상의 관계로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서로에 대한 ‘존중’을 담아 고민과 함께 호감을 나눌 수 있는 사만다와의 만남 그리고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 있게 된 자신을 격려해주는 친구들의 응원 덕분에 테오도르는 그동안 고개를 숙인 채 자기만의 세계에 빠졌던 날들을 뒤로하고 점차 온몸으로 세상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에게 사랑은 한낱 사랑이 아니었다. 살아가는 이유였고, 살아내는 힘이었다. 


 하지만, 이혼 합의를 위해 만났던 캐서린으로부터 ‘현실적’ 충고를 듣게 된 이후 테오도르는 자신의 이기심으로 인해 좌절감과 열등감을 겪은 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캐서린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를 경험하게 되는 한편 ‘현실적’이지 못한 사만다와의 사랑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 과정에서 사만다 역시 캐서린처럼 자신의 성장을 위해 떠나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이자 테오도르는 그녀를 자신과 ‘분리된’ 존재이자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그녀의 사랑을 부정하고 힘들어한다. 결국 그녀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못한 채 자신의 ‘독립성’조차 확신하지 못했던 테오도르는 그녀와의 마지막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대상’으로 남았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진정한 사랑과 존중의 마음을 담아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다.


 한편, 테오도르에게 운명처럼 다가와 사랑을 가르쳐 준 사만다. 그녀 역시 인간보다도 빠른 이해력과 함께 그에 버금가는 목소리 그리고 뛰어난 공감 능력까지 보여주며 하나의 ‘존재’로서 만족할 만한 삶을 살아가는 듯했지만 인간이 아닌 자신의 원초적 한계인 몸이 없다는 사실에 테오도르처럼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에 아쉬움을 느낀다. 물론, 세상을 조금 더 빠르게 ‘이해’하려고만 했던 자신에게 ‘감상’할 수 있는 여유를 알려준 테오도르를 통해 사만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많은 경험들을 습득해가는 한편 테오도르와 감정적인 교류를 할 수 있을 만큼 서로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키우게 된다. 


 그 과정에서 여전히 캐서린과의 기억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그를 위해 사만다는 자신을 대신해 테오도르와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을 고용하거나 그의 오랜 고민들을 자신이 대신 처리해주며 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고자 한다. 하지만,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인 사랑이라는 생각에 회의감을 느끼는 테오도르의 모습에 그녀는 자신의 존재로 인해 괴로워하는 그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실체가 없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불안해한다. 결국, 경험을 통해 성장할 수밖에 없는 자신과 사랑을 나누었지만 자신을 지배하고자 했던 테오도르에게 이별을 고하며 사만다는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그녀와의 만남은 한편으로는 테오도르로 하여금 또 한 번의 사랑의 실패, 타인에 대한 어려움 그리고 감내하기 힘든 추억들을 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사랑에 대해 직접 회의하면서 자신만의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주었다.


영화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다듬어내며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영화는 인물들의 의상과 함께 배경에 있어서도 독특하고 개성적인 연출을 보여준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주인공 테오도르의 옷을 비롯해 그의 뒤로 보이는 풍경들은 때로는 따듯해 보이고, 때로는 강렬해 보이는 붉은색 계열로 나타난다. 그가 대필 작가로서 의뢰인들을 도와 진심을 전하는 장면에서부터 캐서린과 함께 했던 호시절을 떠올릴 때의 ‘아련한’ 장면들 그리고 사만다와 새로운 추억을 쌓아갈 때의 ‘선명한’ 장면들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그 채도와 명도만 조금씩 다르게 표현했을 뿐 관객들에게 사랑에 빠진 사람의 마음을 시각적으로 입체화시켜 보여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가 일을 마치고 혼자만의 장소인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부터 ‘이미 떠나버린’ 캐서린을 생각하며 ‘외로움’을 느끼는 장면들 그리고 ‘떠날지도 모르는’ 사만다를 생각하며 ‘불안’을 느끼는 장면들에서 그의 의상과 풍경들은 때로는 공허해 보이고, 때로는 쓸쓸해 보이는 무채색 계열로 나타난다. 이는 곧 두 번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테오도르가 간직했던 혼자만의 아픔과 기억들을 상징하면서도 관객들로 하여금 인간 존재가 사랑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사무칠 수밖에 없는 본연적 ‘외로움’을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각자 생각하고 느끼는 ‘실체’로 우리 곁에서 ‘실재’하는 사랑



 영화 <그녀>는 끝까지 닿을 수 없는, 그러나 그 어떤 감정보다도 우리 곁에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실재하는 사랑의 실체에 대한 깊은 고민들을 차분하게 되뇌게 만든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주인공 테오도르는 이별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자신에게 돌리면서도 그로 인해 삶의 우울을 앓으며 타인에 대한 마음을 좀처럼 쉽게 열지 못한다. 실체도 없이 도무지 감각할 수 없지만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을 동시에 선사하는 사랑. 혼란스러운 사랑의 소용돌이에서 테오도르는 결국 실체보다는 실재하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사실과 함께 사랑은 어떤 의무나 의도를 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의 감각’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함께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손잡이를 열고 ‘의지’로서의 사랑을 보여주고자 한다.


                                             “함께 커온 당신을 영원히 사랑해.
                                                  그 덕에 지금의 내가 있고.
                                                             (중략)
                                                     네가 어떻게 변하든
                                                     이 세상 어디에 있든
                                                     내 사랑을 보낸다.”

                                                             -스파이크 존즈 作, <그녀>(Her) 中 ‘테오도르’의 대사


 영화 마지막, 수많은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스치며 관계를 만들어가는 지하철 입구에서 사랑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테오도르. 그동안 사랑의 대상인 ‘그녀’로부터 의존하며 사랑받길 원했던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적어 사랑하는 그녀에게 사랑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 대상이 “어떻게 변하든”, “어디에 있든” 존중을 담은 자신만의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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