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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간 Jul 03. 2023

항고이유서

나무인간 29

2022년 7월 19일


어머니는 요즘 나를 자주 찾아오신다. 나는 "오셨어요?"라는 말로 문을 열어드린다. 오시면 챙겨 온 장바구니와 찬거리를 풀어놓으신다. 냉장고를 정리하시는 동안 나는 말없이 식탁에 앉아 그저 내 할 일만 한다. 얼마 전에는 어머니 대신 항고이유서를 써 드렸다. 난생처음 써보는데 법률용어라는 게 어지간한 산문보다 더 장황해서 무척 애를 먹었다. 이틀 동안 엄마의 감정적 기억력을 시간 순서대로 재구성하고 거기에 꼭 명시하고 싶은 어머니의 주장, 그리고 변호사 의견서에서 추려낸 항고의 법적 근거인 대법원 판결을 조금 고쳐서 끼워 넣었다. 엄마는 이틀이, 난 두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다음 날 어머니에게 저녁 늦게 전화가 왔다. 변호사가 잘 썼다고 했단다. 나는 당신 글인데 못 알아보다니 한심하다-라고 생각하려다 그가 얼마나 많은 항소, 항고, 재심 서류를 만질지, 그럴 만도 하겠지 싶었다. 혼자 무엇 좀 써보겠다고 남 피해 주며 살았는데 느는 건 창의력이 아니라 짜깁기 실력이라는 사실을 그 변호사는 나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어머니의 일을 처음 제대로 도와드리고 인정(?) 받은 거 같아 나름 다행이다 싶었지만 한편으로 씁쓸했다. 나는 정말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아니면 스티븐 킹의 말처럼 나는 나의 뮤즈가 작업실로 몇 시에 찾아오게 만들기는커녕 여전히 뮤즈에 대한 망상으로 주저앉아 우는 시늉을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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