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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간 Jul 02. 2023

세로토닌

나무인간 25

2022년 6월 10일


1월 2일 첫 진료 이후 세로토닌에 의지한 지 벌써 5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내 몸은 여러 신경물질이 거쳐갔다. 일종의 테스트처럼- 내게 어떤 물질이 심리를 최적화된 상태로 만들어주는지 매주마다 확인했다. 원장은 짧게 5분 길게는 15분가량 상담진료를 통해 나의 정신상태를 기록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진료실을 나와서 잠시 대기하다가 약을 타면 그만이었다. 처음 나는 혈액검사나 항생제 한방도 없는 이런 공장형 진료가 약간 불쾌했다.

 5개월간 원장과 대화를 나누며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일단 원장은 불교의 사상이나 철학을 존중하는 사람으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표현을 자주 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또 이렇게 말했다. "이 꼴 저 꼴 보며 오래오래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저는 말이죠,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알 때까지 살고 싶은데 말입니다." 속으로 나는 왜 이런 괴짜 같은 의사선생만 붙는지 의아했다. 삶을 소중히 여기며 많은 경험을 하라는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도저히 왜 내가 개똥밭에 굴러야만 하는지 여전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못 마땅한 유머의 소유자인 원장은 환자들에게 약처방을 잘해줬다. 봄이 되고 날이 풀릴수록 환자가 늘어 진료예약을 한 정시에 도착해도 기다리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그와의 상담은 언제나 적당했다. 신사적이었고 가끔 무례한 예시나 단어를 쓰곤 했지만 충분히 받아들일 정도였다. 나는 그 괴짜 불교숭배자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솔직히 그렇지 않고서 내게 적합한 신경물질을 그가 제안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갈수록 진료는 편해졌고 약은 처음보다 약한 수준으로 감량하거나 바뀌었다.

 흔히 불면증 처방은 잠을 못 이루기 때문인데, 나는 오히려 눈을 뜨지 않고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잠만 자려고 하는 과수면이 문제였다. 말할 수 없지만 당시엔 그랬다. 그래서 극심한 조울증과 수면장애 치료 목적으로 약을 처방받았다. 생각보다 부작용이 심했다. 심한 다리떨림으로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집 뒤 근린공원에서 산책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밝은 사고를 하기 위해선 운동을 해야 한다고 그랬는데 그게 어려웠다. 또 다른 부작용은 잠에서 쉽게 깨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한번 잠들면 그대로 30분 안에 깊이 잠들기 때문에 억지로 깨기가 불가능했고 깨어도 잠에 취해서 마치 몽유병환자처럼 걸었다. 다행히 수면제 처방이 빠지고 봄이 되자 나는 조금이나마 편하게 걷고 운동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지난 5개월 간 저지른 가장 끔찍한 일은 술을 마시고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복용한 사실이다. 정말 무모하고 멍청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모순되게 잠은 잘 왔다. 대신 낮과 밤의 구분이 다시 생기니 이제는 밤에 약 없이 잠들기가 힘들었다. 일부러 수면제만 골라 빼고 복용한 적이 있는데 그런 날이면 잠을 한숨도 못 잤다.

부작용은 그런 내 죄의 대가였다. 다음 날 아침이면 입술이 심하게 마르고 혀와 기도가 말하기 힘들 정도로 부었다. 나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라면을 먹었다. 한심하게 들리겠지만 라면의 매운맛과 유탕면의 기름이 목의 부기를 가라앉히는데 정말 도움이 됐다. 그렇게 봄을 난 나는 조금씩 아침에 라면 줄이기로 했다. 굳이 먹더라도 국물은 먹지 않고 채소를 많이 넣어 먹기로. 달라지려는 노력이었다. 저녁 약 역시 술을 먹더라도 술과 함께가 아닌 시간 차를 두어 몸이 차분히 가라앉았을 때 물과 함께 먹었다. 정말 나름대로 선방했다고 우기고 싶다.

 최근엔 부작용도 없고 약도 감량했기 때문에 일상에 지장이 없다. 나는 언제부턴가 “괜찮아,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을 입에 자주 담기 시작했고 몸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세로토닌의 내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분 탓인지 약을 먹어도 예전 같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러면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원장이 말했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야 할 때라고.

 문득 이런 생각이다. 내 생의 의지는 어디에 있을까? 나로부터 벗어난 게 분명한데 아무리 살펴봐도 주변에선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의지를 찾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찾고 싶지 않다.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 원장에겐 유감이지만 여전히 내 귀에 박히진 않는다. 내가 살고 싶어 세로토닌에 의지하는지 아니면 단지 현세에 멈춘 존재로만 스스로를 내팽개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알고 싶으면서 한편으로 알고 싶지 않다. 찾아가지 않더라도 생의 의지가 있는 곳이 어딘지만 알고 싶다. 어쩌면 그곳이 내 헤테로토피아일지도 모르니까. 그것만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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