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인간 3
2020년 9월 16일
보통의 여름이었다. 다니던 37년 전통의 미술 잡지는 망했고, 나는 취재만 다닌 채 내 이름 걸고 쓴 원고 한 장 출력하지 못하고 미술품 회사로 이직했다. 그 괴랄한 곳에서 나는 곧바로 평범해졌다. 그게 싫어 회식자리에서 푸념하면 이제 막 친해진 마케팀장은 회사는 다 그렇다고 했다. 늦게 시작한 회사생활이라 왜 그렇게 모두 전형적인지 궁금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 직함은 에디터였다. 정작 회사에선 다들 날 작가라고 불렀다. 내 글이 그곳 모양새엔 퍽 어색했던 모양이다. 나는 어떤 작가를 위해 거짓 썰을 풀고, 이런 때일수록 미술품 구매가 왜 필요한지를 사람들에게 역설했다. 하필 시기적으로 여기저기 다들 비슷한 발언을 하고 있었다. 웃겼다. 나는 미술애호가 수준도 안 되는 강남투자꾼들 앞에서 거짓말 장인이 되어 갔다. 그토록 혐오하던 직장인간말종이 된 것이다. 코로나 시대 이후 예술시장의 미래 가치를 설득하는 일은 역겨웠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과정을 회사의 안정을 꾀해 나의 목표인 스타트업을 준비해야 하는 까닭이라 정당화시켰다. 나는 공유경제의 선순환구조가 적용된 새로운 미술시장의 가능성을 믿었다. 기성 시스템에 변혁이 생기면 예술가들이 보다 나은 삶을 가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내가 꿈꾸던 이상은 아무것도 현실이 되지 않았다. 나는 무엇으로도 내 거짓을 위로할 수 없자 어느샌가 주변에 양심 운운하기 시작했다. 가책이 심장에 꾸역꾸역 들어찼다. 타자를 향해 신념을 역설하는 것이 사람 목숨보다 중요한 일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그림 사기엔 바로 적기라고 말하는, 나 스스로를 여느 옥션이나 갤러리의 스페셜리스트들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속이 매스꺼웠다. 어떤 위기이고 무슨 기회란 말인가. 이 모든 게 달걀이 우선인지 닭이 우선인지 헛갈리기 시작하면서 내게 일어났다. 와중에 회사 사정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우선 두 큐레이터가, 그다음엔 정을 많이 붙인 마케팀장이 사직서를 냈다. 그때 알았다. 대표의 이상이나 조직 따위는 사람과 신뢰가 없다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그때 나의 최선은 단지 회사가 사라지는 광경,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뿐이었다. 한 여름밤의 꿈처럼, 그렇게 또 하나 지우고 싶은 경력이 생겼다. 그리고 집에서 며칠 홀로 보냈다. 과하지 않게 술과 잠을 청했고, 냉장고를 비우며 머리를 영화로 채웠다. 영화가 먼저인지 술이 먼전지 헛갈리는 통에 결제하고 잠들어 대여기간 내 보지 못하기도 하였다. 막연히 아무 영화나 보고 싶었다. 이상하게 편안해졌다. 생각해 보니 작년 봄 이후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극장 간지도 꽤 되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이 상실을 겪으면 왜 무협지나 영상만화에 몰입하는지 이해되었다. 숨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독하게 힘들면 산과 바다가 아닌 상상과 이야기 속으로 숨는다. 때로 그 가운데 예술이 있다.
그렇게 망한 회사 사무실과 겨우 2.5미터 거리에 불과한 개인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야기가, 글이 쓰고 싶었다. 앉아서 하얗고 침침한 천장 아래서 보낸 여름을 떠올렸다. 거기엔 영국집과 똑같은 사무실 조도 속 혹시나 미래를 잃을까 전전긍긍하던 내가 있었다. 공유오피스나 런던집도 내게는 유리감옥 같아 더 그리 느꼈을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나는 무언가를 위해 향한 어디에서나 곧잘 숨어 있었다. 나로부터 숨기에 익숙한 것이다. 익숙한 것은 어렵지 않다. 이를테면 믿음을 저버리고 사람을 떠나보내거나 내 욕심에 스스로 무너지는, 그런 경험 탓인지 갈수록 어떤 것을 정리함에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미안하다. 나는 견고하지 않다. 지난여름 내가 잃은 건 돌이킬 수 없는 에너지가 아니다. 무엇으로도 꿈을 대처할 수 없을 거라 믿던 단단한 미련이다. 그것이 사라지니 내게서 여름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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