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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간 Jul 18. 2023

실격 1

나무인간 44

2018. 3, 1 - 3, 21 사이 염소진 개인전 '실격', 스페이스 55(서울 은평구 소재)에 전시된 텍스트입니다.


실격

失格               


1. 표류하던 나는 기념비가 된다.     


 잃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의 흔적들은 저 어둠 속에서 새어 나오는 티브이 단막극의 빛과 같은 전개보다 더 빨리 사라져 갔다. 사실 손에 쥔 게 많지도 않았지만, 나는 내가 얻은 경험을 무척 소중히 여겼고, 또 그것들을 지킬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사건 이후, 나는 도무지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놓여버렸다. 나의 태도와 입장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인생의 개요와 과정을 설명하기엔 높고도 진부한 외곽의 공포를 마주해야 했다. 사람들은 검고 습한 벽이었다. 그 입들 사이에선 오로지 어느 동정받지 못할 인간을 향한 그들 각자의 상상이 난무했다. 사건과 배경은 사라지고 인물에 대한 자의적 해석만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이상한 플롯이었고 실패한 이야기였다. 그들이 알고 있다 믿는 사건 위에 또 다른 사건의 내가 등장했다. 나를 찾던 이들로부터 창조된 이야기들은 더 이상 나를 알려하거나 묻지 않았다. 나의 주변성은 완벽히 전소됐다. 나는 이제 새롭지 않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 주던 훈련된 이성이 자아와 함께 무너짐과 동시에 어린아이도 아닌 갓난아이 모양, 눈 뜨고 숨 쉬어도 다가올 내일도 거부치 못한 채 지금(now) 위에 부표가 된 나는, 말 그대로 이율배반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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