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억의 장소
저녁상을 물린 후 어스름한 어둠이 내리깔리면 엄마는 야반도주하듯 동생을 등에 업고 오빠를 앞세우고 한손엔 짐을 들고 하동역으로 나선다.
산중턱 언덕배기에 있는 할머니 댁에서 하동역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지만 초저녁이여도 거의 가로등도 없는 길을 이렇듯 피난 떠나듯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엄마에게 왜 우린 항상 집으로 돌아갈 때 밤기차를 타야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죄지은 사람도 아닌데 맨날 할머니 댁에서 이렇게 밤에 쫓겨나듯 가야하는 이유를 몰랐다. 그게 모진 시집살이 때문인지, 줄줄이 애가 셋 딸린 여자가 경제적 궁핍으로 인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임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명절과 방학마다 강릉에서 하동으로, 하동에서 강릉으로 긴 여정은 열일곱까지 계속되었다. 내가 할머니 댁에 가는 긴긴 여정의 기억은 초등학교 입학 전후로 생각이 난다. 일단 저녁에 하동역에서 기차를 타면 철로 변 주위로 켜져 있는 가로등을 끊임없이 쳐다본다. 깜깜한 밤기차 안에서 보이는 풍경은 그저 희미하게 비춰지는 가로등과 띄엄띄엄 새어나오는 집들의 불빛들이 전부였다. 아직도 나는 늦은 밤 고속도로를 달릴 때 보이는 가로등을 보면 가슴이 서늘하게 시려온다. 대전역쯤에 기차가 한참을 쉬면 오빠가 재빠르게 뛰어 내려가서 가락우동 두 그릇을 사가지고 올라온다. 어묵국물에 퉁퉁 불어있는 우동면발이지만 얼른 오빠의 젓가락질이 멈춰지고 내게도 그 따뜻한 국물이 목구멍에 넘어가길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대전역에서 영등포역에 내리면 날이 훤해지고 다시 고속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강릉 대관령 길을 넘어간다. 가끔은 작은 고모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내려 갈 때도 있었지만 사는 게 빠듯한 집에 군식구들이 머물러 있으면 주인집 눈치가 곱지 않았다.
방학시작하자마자 하동에서는 얼른 내려오라는 재촉전화가 연신 울려 된다. 엄마는 짐을 싸고 우리는 탐구생활이랑 방학숙제, 간단한 옷가지들을 각자 가방에 챙겨 메고는 고속버스 터미널로 간다. 아빠는 8남매 장남이고 막내 작은아버지랑 오빠는 겨우 2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하동에서 생선 장사를 하셨다. 시장 안에 가게도 있지만 보통 5일장을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하셨다. 고모들도 있었지만 일찍 결혼한 엄마는 시동생들의 보모역할을 해야만 했다. 하동에 도착하자마자 앉을 사이도 없이 부엌에 불 때서 밥하고, 때가 찌든 살림살이들을 청소하고 하고 밀린 빨래 냇가 가서 빨래하고.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 댁의 엄마의 모습은 대충 이랬던 것 같다.
철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할머니 댁에 가면 될 수 있는 한 엄마를 거추장스럽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딱히 도와드리는 일은 없었지만 할머니 댁에 있는 동안 오빠랑 동생이랑 싸움도 자제하고 억울한 일이 생겨도 그냥 꾹 참았다. 말해봤자 들어줄 어른도 없고 엄마는 늘 지쳐있었기 때문에 괜히 잘못 말 꺼냈다가는 욕만 얻어먹는 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작고 좁은 집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생활을 했는지 기적 같다.
적어도 열댓 명이 넘는 식구들이 두어 칸 넘는 집에서 칼잠을 자고 밥을 먹고 그래도 별로 불편해 하지 않았던 기억이 더 이상하게 느껴진다.
열일곱 고등학생이 되자 드디어 할머니 댁에 내려가는 면제권이 생겼다. 대신 명절 내내 나는 집에서 혼자 보내야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우리 집 전체를 나 혼자 독차지 하고, 보고 싶은 텔레비전 실컷 보면서 삼사일을 혼자 보내는 것도 괜찮았다. 대학교 들어가서는 거의 할머니 댁에 간 기억이 없다. 명절에도 방학 때도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아도 뭐라 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부모님은 더이상 자식들을 줄줄이 데리고 내려가지 않았다.
몇 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남부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하동으로 내려갔다. 남편은 해외출장이 잦았던 시기인데 이때도 국내에 없었다. 이삼일 동안 먹을 밥을 챙겨놓고 아이들에게 가스 불 조심하라고 단도리 시킨 후 집을 나섰다. 집에서 남부터미널까지 한 시간 넘게 걸렸다. 하동 가는 길은 생각보다 더 멀었다. 대략 6시간 정도 버스 안에서 바깥풍경을 쳐다보는데 참 생경하게 느껴졌다.
한낮에 보는 풍경은 어린 시절 어스름한 어둠속에서 본 풍경들과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결혼 후 처음으로 하동에 다시 갔으니 거의 이십년이 넘는 시간동안 가보지 못했던 곳이다.
시골시내도 모습이 변하고, 하동역에서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은 내가 기억하던 그 길이 아니었다. 논과 밭 사이 산비탈로 올라가던 길 옆에는 아파트가 우뚝 서있고 집은 리모델링해서 예전의 모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약간의 서글픔이 몰려왔다. 나의 유년의 기억들이 깡그리 무너져 내리는 심정이었다.
남편의 로망인 SUV차를 샀다. 새 차 산 기념으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통영과 남해를 지나 마지막으로 하동으로 갔다. 늦은 오후 평사리 최참판댁에 가서 너른 들녘을 바라보고 백숙을 거나하게 먹었다. 내가 기억하던 하동은 역을 중심으로 반경이 매우 좁았다.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로 제한이 되었기에 같은 하동이여도 최참판댁에 가거나 쌍계사에 놀러가는 호사 따위는 없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기도 했거니와 더 이상 아무 기억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는 할머니 댁은 가지 않았다.
기억의 편향일 수 도 있지만 내가 기억하던 하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내 기억 속 무덤에 묻어두고 돌아왔다. 더 이상 서글프지도 아련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