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에서 진짜 시작!
남편이 먼저 캄페체로 떠나 구해둔 새집의 사진을 여러 장 받아보았다. 화면 속 집은 싱그러운 초록빛 풀이 가득한 정원을 품고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색색의 부겐빌레아가 커다란 고무나무 잎사귀를 휘감고 올라가는 모습은 더없이 이국적이었다. 방도 그만하면 꽤 넓어 보였고,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던 그 정원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그래, 이 정도면 모든 게 괜찮을 거야.’ 나는 애써 희망적인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열다섯 시간의 우여곡절 끝없는 비행, 그리고 메리다 공항을 거쳐 회사에서 내어준 커다란 버스에 네 식구와 여덟 개의 캐리어가 겨우 실렸다. 버스가 캄페체 시내로 접어들었을 때는 이미 사방이 캄캄한 밤이었다. "자, 이제부터가 캄페체야." 남편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차창 밖으로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길게 쭉 뻗은 해변 도로를 따라 반짝이는 불빛들이 어둠을 수놓고 있었다. 그날 밤 말레꼰(해변 산책로)의 야경은, 마치 오랜 비행의 피로를 위로하듯 아름다웠고, 그 순간만큼은 캄페체의 첫인상이 참으로 깔끔하고 예쁘다고 생각했다. ‘살만한 곳이구나,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더.’ 다시 한번, 다 괜찮을 거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남편이 미리 구해둔 집은 ‘privada; 프리바다’라고 불리는 큰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작은 단지 안에 있었다. 입구에는 차단기가 있었지만, 예상과는 달리 자동이 아니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어스름 속에서 경비 아저씨가 직접 손으로 묵직한 차단 바를 힘껏 눌러 열어주는 모습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캄페체에는 이렇게 수동으로 차단기를 여닫는 프리바다가 꽤 많았다.)
드디어 우리가 탄 커다란 버스가 집 앞에 멈춰 섰다. 여덟 개의 큰 캐리어를 하나씩 집 안으로 옮기면서, 사진으로만 수없이 봐왔던 집을 실제로 마주하니 뭐라 설명하기 힘든 이질감이 밀려왔다. 분명 사진 속 그 집이 맞는데도, 핸드폰 화면으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무게감과 분위기가 느껴졌다.
주차장은 꽤 넓어 큰 SUV 한 대는 족히 들어갈 듯했고, 문밖으로 그 주차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성긴 쇠창살 대문이 우리를 맞았다. " 저렇게 성긴 대문이어도 위험하지 않은 걸까? 잠시 생각했다. 그저 어둠이 짙어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독특한 집 구조에 고개를 갸웃거릴 무렵이었다.
산더미 같은 짐을 버스에서 모두 내려 주차장 한쪽에 일렬로 세워두자마자, 앞집에서 중년의 부부가 환한 미소와 함께 걸어 나왔다. 그들은 우리가 살게 될 집을 렌트해 준 주인부부였다. 그들의 손에는 노릇노릇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플란(푸딩) 틀에 구운 듯한 바나나빵이 들려 있었다. 따끈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고, 달콤하고 부드러운 바나나 향이 피곤에 지친 코끝을 부드럽게 감쌌다.
“Welcome!”
그들의 힘찬 환영 인사에, 순간 얼떨떨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와, 정말 따뜻한 분들이시네…” 연신 “Gracias!(감사합니다!)”를 외치며 고개를 숙이는 내 얼굴에도 어느새 작은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정말 모든 게 괜찮을지도 몰라. 낯선 땅에서 받은 첫 환대가 불안으로 겹겹이 무장했던 마음을 조금은 녹여주는 듯했다.
짐을 대충 거실 한쪽에 몰아넣고 한숨 돌리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 눈을 의심했다. “… 세상에, 이 개미들은 다 뭐야?” 바닥 한가운데를 유유히 행진하는 검붉은 그림자들. 어릴 적 초등학교 운동장 구석에서나 봤을 법한, 통통하고 커다란 개미들이었다. 색깔만 검은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뀌었을 뿐, 그 위풍당당한(?) 모습은 똑 닮아 있었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마치 제집 안방인 양 거실 바닥 곳곳을 신나게 활보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생활하는 집 안에서 저런 개미를 본 기억이 없었기에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기 전 남편이 ‘개미가 좀 있다’고 지나가듯 말하긴 했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개미 약도 단단히 챙겨 오긴 했지만, 솔직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운동장이나 길바닥에서나 보는 개미가 집에 좀 다닌다고 해봤자 약 한 번이면 사라질 거라고, 아주 순진하게 믿었던 것이다.
“여보! 여기 개미가, 개미가 너무 많아!” 내 다급한 목소리에도 남편은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했다. “어, 여기 개미들 원래 많이 돌아다녀. 그래서 약 가져왔잖아.”
아, 망했다. 이게 현실이구나. 사진 속 아름다운 정원과 친절한 이웃들이 안겨준 잠깐의 안도감은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멕시코는 우리처럼 바닥에 앉거나 눕는 좌식 문화가 아니니 바닥에 개미가 좀 다닌다고 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땐 그런 문화적 차이를 헤아릴 경황이 없었다. 내게 집 바닥이란 맨발로 편히 딛고, 때로는 이불도 깔고 뒹굴 수 있을 만큼 깨끗해야 하는 공간이었기에, 그 위를 점령한 개미 군단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한동안은 그 공포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결국 그날 밤, 나는 침대 위로 개미가 기어오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큰아이를 부둥켜안고 최대한 침대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열다섯 시간이 넘는 비행으로 온몸이 천근만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에 한 번꼴로 화들짝 잠에서 깨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만 마리의 개미들이 나를 향해 진격해 오는 악몽을 꾸는 것만 같았다.
캄페체에서의 첫날밤은 그렇게, 달콤한 바나나빵의 여운 대신 개미에 대한 섬뜩한 공포로 얼룩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