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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세상 낯선 파티 고군분투

용기만이 살 길이다!

by ElenaLee


낯선 파티 초대장, 그리고 엄마의 용기



결국 나는 가기로 마음먹었다. 순전히 작은아이 때문이었다. 낯선 땅, 낯선 유치원에서 이제 막 첫발을 내딛는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리고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엄마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속으로는 ‘아, 정말이지 애만 없었어도 절대 안 했을 일인데…’ 하는 불평이 잠시 고개를 들었지만, 이내 접어두었다. 어쩌면 이런 소소한 일로 고민하고 망설이는 것 자체가 지금 처한 현실에 비하면 사치일지도 몰랐다.


문제는 RSVP였다. 뭐라고 써야 할까. 다른 엄마들이 올린 답장을 여러 번 훔쳐보며 따라 쓰려다, 너무 티가 날까 싶어 혼자 얼굴을 붉혔다. 길게 썼다, 짧게 지웠다를 반복하며 한참을 끙끙댔다. 결국 최대한 간단하게, "El estará allí. Gracias." (작은아이 참석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겨우 적어 올렸다.

그 짧은 스페인어 문장 하나에도 심장이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그 후로 파티 날짜가 하루 이틀 다가올수록, 내 신경은 온통 그곳에 쏠려 예민하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텅 빈 파티장, 엉망인 나의 스페인어



드디어 파티 당일, 남편이 차로 약속 장소까지 데려다주었다. 약속 시간은 오후 5시 30분. 나는 당연히 한국인의 미덕(?)을 발휘해 정확히 5시 30분에 작은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파티 장소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넓은 파티장에는 나와 작은아이, 단둘뿐이었다. 시간을 잘못 알았나 싶어 황급히 왓츠앱 채팅창을 다시 확인했지만, 시간도 장소도 정확했다. 어리둥절해하며 멀뚱히 서 있는데, 어디선가 긴 갈색 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진 여성이 다가와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Welcome! I am Mom of Cons."


순간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적어도 이 한 사람에게만큼은 어설픈 스페인어로 버벅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녀는 파티장을 제공해 준 콘스의 엄마, 알레(Ale)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알레는 회계사로 일하면서 자신이 소유한 이 멋진 파티 장소를 대여해 부수입을 얻고 있었고,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 부활절 같은 특별한 날에는 반 아이들과 엄마들을 위해 기꺼이 무료로 장소를 내어주는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알레는 자신도 영어를 완벽하게 하지는 못한다며 겸손해했지만, 우리 사이의 대화는 다행히 영어로 이어졌다. 곧이어 알레의 남편과 어머니, 그리고 딸인 콘스가 차례로 나왔다. 작은아이와 콘스는 만나자마자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어울리더니, 커다란 성 모양의 점핑 에어벌룬으로 달려가 함께 뛰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알레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여덟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원탁 테이블에 어색하게 홀로 앉았다. ‘왜 사람들은 오지 않는 걸까? 나는 여기서 뭘 해야 하지? 혹시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온 건 아닐까?’ 온갖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파티 장소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알록달록한 장식들로 꾸며져 있었지만, 내 눈에는 그저 낯선 풍경일 뿐이었다.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며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에 다정한 얼굴을 한 알레의 어머니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스페인어로 어디에 사는지 물어보셨다. 그때 내 스페인어 실력은, 한국에서 시원스쿨 3개월짜리 기본 코스를 겨우 듣고 와서 "Me llamo Lee."(내 이름은 이입니다.) 정도나 간신히 말할 수 있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 영어 문법과 스페인어 문법 구조가 비슷하다는 어렴풋한 지식은 있었기에, 아는 스페인어 단어들을 영어 문장 순서에 맞춰 겨우겨우 꿰맞춰 대답했다. "Estoy en… Kanisté." (저는 카니스테에… 있어요.)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이 그곳에 많이 산다며 연이어 무언가를 물어보셨다. 머릿속은 이미 ‘멘붕’ 상태였지만,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못 알아들어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고,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척하며 간신히 대화를 이어가는 시늉을 했다. 그 순간에는 스페인어로 한마디라도 더듬거렸다는 작은 성취감조차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저 이 어색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6시가 다 되도록 오지 않는 걸까?’ 속으로 이런 의문이 한계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마침 알레의 여동생이 나타나 자신이 영어를 할 줄 안다며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THANK GOD! FINALLY!" 나도 모르게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어둠 같던 스페인어의 압박감에서 벗어나, 드디어 내가 알아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언어로 대화의 물꼬가 트이니 숨통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과달라하라는 곳에서 꽤 오래 일하다가 결혼을 하며 가족이 있는 캄페체에 다시 돌아와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중이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녀는 내가 어색하게 얼어붙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나를 편안하게 해 주려고 노력해 주었다.


그리고 6시가 넘어도 초대받은 학부모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 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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