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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리고 스타벅스의 자비

아이스커피 한잔이 이렇게 어려울 일이야?

by ElenaLee


낯선 집에서의 첫 아침, 그리고 나 홀로 현실 육아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냉정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남편은 새로운 일터로 분주히 떠나야 했고,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초등학교 5학년 큰아이와 이제 겨우 네 살인 막내를 데리고 전화도, 차도 없는 이 낯선 집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버텨내야’ 했다. 마음을 다잡고 한국에서부터 바리바리 싸 온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아이들이었다. 한국에서처럼 맨발로 바닥 생활을 하는 데 익숙했던 녀석들은 자꾸만 맨발로 다니며 타일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려고 했다. 어젯밤 개미 군단의 공포가 생생했던 나는 질색하며 아이들을 다그쳤다. 거실 한쪽에 놓인, 구멍이 송송 뚫린 라탄 스타일의 2인용 소파. 그나마 개미로부터 안전해 보이는 유일한 가구였다. "얘들아, 여기! 이 의자 위에 발까지 다 올리고 앉아있어, 알았지?" 그 소파는 한국에서 쓰던 푹신한 가죽 소파와는 질감부터 달랐다. 이국적이긴 했지만 딱딱했고, 어딘가 불편했다. (그때는 더운 나라에서는 통풍이 잘되는 이런 가구를 선호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그야말로 ‘무지한 이방인’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향한 처절한 사투



아이들을 간신히 소파에 봉인(?)하고 나니, 다음은 나 자신을 위한 생존 물품을 챙길 차례였다. 그때 당시 하루 한 잔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나에게 생명수와도 같았다. 당연히 커피 가루는 한국에서부터 공수해 왔고, 심지어 얼음틀까지 야무지게 챙겨 왔다. ‘며칠은 못 마실 수도 있겠지’ 각오했지만, 물과 얼음만 있다면 나의 소중한 루틴을 성공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뿔싸, 냉장고엔 얼음이 없었다. ‘괜찮아, 나에겐 얼음틀이 있으니까!’ 짐더미 속에서 얼음틀을 찾아내 남편이 미리 사다 놓은 생수를 채웠다. 네 시간 뒤면 이 덥고 후덥지근한 곳에서 나만의 작은 평화를 안겨줄 시원한 커피를 마실 수 있을 것이다! 희망에 부풀어 뚜껑까지 꼭 닫은 얼음틀을 냉동실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사이 아이들은 긴 여행의 여독과 찜통 같은 더위에 지쳐 낑낑대기 시작했다. 노트북을 꺼내 만화를 틀어주니 그제야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너무 더워하는 아이들에게 정원에 나가서 물놀이라도 하라며 긴 호수와 작은 물총을 건네주었다.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는 사이 이제 슬슬 점심 준비를 해야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조그만 검은색 압력밥솥에 쌀이라도 안치려고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에서 밥솥을 씻기 위해 수도꼭지를 힘껏 틀었는데… "……응?"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물이 ‘콸콸’이 아닌 ‘쫄쫄 쫄’ 흐르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세게 틀어도 수압은 바뀔 기미가 없었다. 이걸로 어떻게 설거지를 하고, 요리를 하란 말인가.


망연자실한 채 고개를 들자, 그제야 어제는 미처 보지 못했던 싱크대의 적나라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나는 남편이 보내준 사진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일까?' 한국의 일반적인 인조 대리석 상판이 아니었다. 낡은 나무판 위에 얇은 유리가 위태롭게 깔려 있었고, 물이 나오는 개수대 부분만 스테인리스였지만 그마저도 나무 위에 어설프게 끼워진 형태였다. 가뜩이나 물도 졸졸 나오는데, 조심한다고 해도 사방으로 물이 튀어 나무 상판을 적시고 있었다. "아…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물도 제대로 안 나오고, 싱크대는 나무에, 바닥에는 개미가 들끓는 이곳에서, 기약도 없이 살아야 한다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너지는 일상, 터져버린 웃음



‘큰일이다, 정말 큰일이야.’ 애써 마음을 다잡고 다시 짐 정리를 이어갔다. 그리고 정확히 네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구원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영접할 시간! 나는 거의 경건한 마음으로 냉동실 문을 열고 아침에 넣어둔 얼음틀을 꺼냈다.


그러나 나의 모든 기대와 희망은 그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얼음틀 안에는 내가 넣었던 그대로의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얼음은커녕, 냉기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가 1년 동안 렌트한 그 집의 냉장고는, 냉동 기능이 고장 나 있었던 것이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모든 불편함과 불안함이 한꺼번에 절망으로 바뀌며 나를 덮쳤다. 나도 모르게 “푸하하!”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 어이가 없고, 너무 서글퍼서 나오는 실소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고사하고, 시원한 물 한 잔 마실 수 없다는 사실. 한국에서는 숨 쉬는 것처럼 당연했던 그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는 하나하나 체크리스트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결국 이 고장 난 냉장고는, 훗날 내가 캄페체 월마트에서 생애 첫 ‘냉동고’를 구입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사건의 서막이 되었다.)



절망 끝에 만난 한 잔의 자비



그날 저녁, 퇴근한 남편에게 나는 쌓였던 모든 불평불만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얼음이 안 얼어! 물도 안 나와! 더워 죽겠는데 커피도 못 마셔서 나 정말 돌아가실 것 같다고!”

묵묵히 나의 하소연을 듣던 남편은, 다음 날이었던가, 일이 끝나자마자 지친 기색도 없이 우리 가족 모두를 픽업해서 캄페체에 단 하나 있다는 스타벅스로 데려가는 ‘자비’를 베풀었다.


캄페체에 하나뿐이 없는 백화점인 Liverpool이 있는 큰 몰 안에 테이블이 열개 남짓정도 되는 아주 작은 스타벅스, 말레꼰 해변을 바라보며 스타벅스 야외에서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그 순간만큼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달콤하고 감사했다. 어쩌면, 아주 조금은, 이곳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작은 희망이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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