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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영 Good Spirit Nov 15. 2024

여름의 모자

일상 一想

 나는 따스한 봄이 되면 뜨거운 여름에 쓸 모자를 샀다. 하지만 진짜 여름이 오기도 전에 잃어버리곤 했다.


 한 번은 지역축제에서 손바느질로 만든 직물 모자를 샀다. 뒤집어서 양면으로 쓸 수 있는 모자인데 한쪽은 연보라색 무지, 다른 쪽은 여러 톤의 보라색 꽃무늬가 가득한 모자였다. 나는 이 모자가 참 마음에 들었다. 곧 다가올 여름에 쓰겠다는 기대에 부풀어 옷장 한쪽에 잘 보관해 두었다. 하지만 막상 여름이 되었을 때, 한 번도 쓰지 못했다. 온 집안을 다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6년 전의 일이다.  

   

 또 한 번은 인사동 천연염색 의류 매장에서 카키색과 갈색이 조화롭게 섞인 수공예  천연염색 모자를 샀다. 머리를 넣는 부분이 깊고 챙의 너비가 한 뼘이 훌쩍 넘어 빛으로부터 꽁꽁 숨기에 좋았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모자라고 했다. 나는 이 모자가 너무 마음에 들어 곧바로 쓰기 시작했다. 초여름인 6월 제주도에 가서도 여행기간 내내 잘 썼다. 하지만 돌아오는 비행기에 탑승했을 때, 모자가 보이지 않았다. 렌터카 업체, 마지막 숙소 등 모두 연락해 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한동안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듯 그 모자를 그리워하였다. 사실, 5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했다.     


 그리고 3년 전 담양 메타 프로방스, 처음 들어선 모자 가게에서 머리 윗부분이 뚫려있는 보닛 형태의 민트색 모자를 샀다. 그런데 다른 기념품 가게를 들를 때마다 똑같은 모자를 팔고 있을 정도로 흔하디 흔한 모자였다. 나는 이 모자를 가장 오래 썼다. 이 모자도 결국 그해 가을에 잃어버렸다.  

   

 어차피 잃어버릴 거 안 사는 게 나았을까? 사지 않았다면 잃어버리지도 않았을 터이니 모자를 잃어버림으로 느꼈던 상실감, 그리움도 없었을 거 아닌가.  한데 나는 모자를 샀던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잠깐이었을지언정 함께한 추억이 있으니까. 모자 하나가 그러하듯, 지금은 곁에 없는 수많은 인연들은 더욱 그러하다. 좋은 추억이 있으면 족하다.  세월이 흘러 시간이 발효시킨 추억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이번 봄에도 여름에 쓸 베이지색 모자를 샀다. 그 모자는 아직까지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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