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일간의 수영
수영을 시작한 지 80일이 지나며 오랜 오해가 하나 풀렸다. 나는 남들보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오해가 있었다. 사람마다 잘하는 것이 다르고 어떤 것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이 있으니까 수영을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게 있을까? 이 부분에서 의문이 든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잘하는 이유는 그 무언가를 좋아하고 열심히 시도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무언가를 못하는 데는 아예 시도하지 않았거나 충분히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타고나길 수영에 소질이 없었던 게 아니라 충분히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성장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오는 게 아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와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다. 나는 어제보다 더 나아졌는가. 한 번의 시도가, 한 번의 노력이 더 있었다면 분명 더 나아진 것이리라. 성장은 반복되는 시도에서 형태를 잡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도 없이 반복된 시도들이 모여 이제 접영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발차기 연습부터 따지자면 한 달 정도 되어 접영킥은 감을 잡았다. 하지만 팔동작은 왼쪽 어깨 통증으로 양팔을 쫙 펼쳤다가 모아서 입수하는 동작이 다소 약하지만 입수와 출수 박자는 잘 맞는다. 왼쪽 어깨통증은 팔을 앞뒤로 올리는 동작은 전혀 문제가 없고 옆으로 나란히 동작에서만 나타나는 거라 일상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접영을 배우면서 문제가 되었다. 어깨통증이 악화될까 봐 심적 부담을 느끼다 보니 동작의 완성도가 떨어졌다. 실제로 접영을 몇 번 하고 나면 그날은 왼쪽 어깨가 더 아팠다. 하지만 하루이틀이면 회복되었다. 그래서 악화되는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내려놓으려 한다. 해서 안 되는 것이라면 몸이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할 것이니 마음은 내려놓고 몸에게 맡겨보려 한다.
이제 나는 수영장이 아닌 바다로 나가는 나를 자주 상상한다. 서핑과 프리다이빙을 하며 바다 위와 바닷속을 누비면서 해양생물들을 만나는 일을 상상한다. 그렇다 보니 프리다이빙 영상을 자주 검색해서 보고는 하는데 며칠 전 넷플릭스 검색창에 '바다'를 입력해서 찾은 하나의 다큐가 마음에 와닿았다.
SBS에서 만든 4편짜리 고래를 담은 다큐멘터리 <고래와 나>이다. 2편까지 보았는데 20개국 30개 지역을 찾아가 여러 종의 고래들의 일상을 영상에 담았다. 향고래가 바닷속에서 몸을 길게 세운 상태에서 잠을 자는 모습이라든가 혹등고래가 물 위로 튀어올라 첨벙 뒤로 떨어지는 브리칭, 수컷무리 속의 치열한 경쟁 속에 암컷의 짝이 된 암수 한쌍이 마치 왈츠를 추듯 서로의 움직임을 따라 하는 모습, 아기 혹등고래가 모유를 먹는 모습, 그리고 고래들마다 다른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노래하는 모습 등 참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반면 기후변화로 빙하를 일찍 잃은 북극곰들이 빙하 대신 바다 위 바위에 올라 물개 대신 벨루가를 사냥하려는 모습이나 비닐봉지를 음식으로 착각한 혹등고래들이 서로 경쟁하듯 비닐봉지를 입에 넣으려는 장면,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사체로 발견된 보리고래의 사인을 찾기 위해 해부한 결과 위에서 발견된 테이크아웃 플라스틱 뚜껑을 보면서 환경에 대한 인간으로서 책임이 느껴져 서글펐다. 어쩌면 수영을 배운 계기로 제주로 가면 바다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다큐를 보며 가장 큰 여운을 준 장면은 40년 이상 해양 다큐멘터리 촬영 경험이 있는 베테랑 임완호 촬영감독이 혹등고래들과 조우하는 장면이었다. 스쿠버 장비 없이 프리다이빙으로 수중 촬영을 아름답게 담아냈던 임완호 감독은 카메라가 아닌 자신의 두 눈에 혹등고래를 오롯이 담고자 하는 열망으로 카메라 없이 바다로 뛰어든다. 잠수복이 아닌 반팔티와 반바지를 입은 일상의 자신의 모습으로 혹등고래 앞에 자신을 내보인다. 혹등고래와 감독은 서로를 마주 본다. 마치 'I See You'라고 말하는 아바타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나는 수영장에서 어제보다 오늘 빠른 속도로 수영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에게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닿고자 하는 곳은 수영장 너머의 바다에 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는 속도보다는 물과의 친화력이 더 중요할 것이다. 얼마나 오래 바다 위와 아래를 오가며 지낼 수 있는지 말이다. 폐호흡을 하는 고래들처럼. 고래와 인간은 참 닮았다. 고래는 인간에게 바다에서의 많은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리가 같은 포유동물이어서일까. 그래서 인간은 다른 어떤 해양생물보다도 고래에게 더 끌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래와의 조우는 인간이 만들지 않고, 고래가 허락한 것이라고 한다. 프리다이버와 고래의 만남은 ‘접근’이 아니라 ‘기다림’의 결과다. 그 기다림의 순간을 나는 지금부터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