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페루즈: 돌아가지 못한 이들...
그리고 모이라...

인간에게는 누구나 '각자가 받은 몫(모이라)'가 있을 지니...

1793년 1월 21일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던 날 아침, 루이 16세는 처형장으로 끌려 가기에 앞서 ‘라 페루즈의 소식은 없는가?’를 물었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루이 16세가 궁금해 했던 ‘라 페루즈’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였습니다


‘라페루즈’라는 지명의 유래


호주 보타니만 북쪽에 위치한 라페루즈(Laperoues)에 가게 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영화 ‘미션임파서블 2’

에서 나오는 목조다리 위 오토바이 추격신을 촬영한 ‘베어 아일랜드요새(Bare Island Fort)’를 관광하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요새가 위치한 지역이 라페루즈였습니다.

시드니 센트럴역에서 트램을 타고 종점인 ‘주니어스 킹스퍼드’에서 내린 후 다시 버스를 갈아 타야 하는 1시간 30여분 여정 끝에 다다른 라페루즈는 초원이 펼쳐진 탁 트인 해변과 19세기 세워진 고풍스런 요새와 건물들,

그리고 독특한 해안지형이 어우러진 멋진 곳이었습니다


만.jpg 라페루즈의 선셋 하이브에서 바라본 보타니만 입구(1770년 4월 제임스 쿡이 진입한 곳)
라페루즈에 위치한 맥쿼리 감시탑(Macquarie Watchtower)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 문득 왜 이곳에 ‘라페루즈’라는 지명이 붙여졌을까 궁금해 졌습니다.


주민들은 줄여서 ‘Lapa’라고 부르는 이곳의 정확한 표기는 ‘La Peroues’ 입니다. 정관사 ‘La’와 고유명사 ‘Perouse’가 결합된 프랑스어 지명..

라페루즈의 작은 해변인 ‘프렌치맨즈 비치(French man’s Beach)’등 이곳에는 프랑스와 연관성을 암시하는 이름이 곳곳에 있습니다. 사실 ‘라페루즈’라는 이름은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와 오랜 동안 프랑스 해군의 주요 기지였던 브레스트에 그 이름의 거리가 있으며, 하와이제도 마우이섬의 작은 만과 샌프란시스코 해안의 작은 곶, 현재는 ’소야 해협’으로 많이 불리는 사할린섬과 홋카이도섬 사이 해협에도 그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울릉도에는 ‘라페르주’라는 이름의 리조트도 있습니다.

베어 아일랜드의 요새((Bare Island Fort)

모두 이 곳들을 방문했던 한 사람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프랑스 해군장교 '라 페루즈 백작(Comte de Lapérouse)' '장 프랑수아 드 갈로(Jean-François de Galaup; 1741.8.23∼1788 ?)제독

입니다. 피레네 산맥 인근 알비(Albi)시 인근 페루즈의 영주가문(화가로 유명한 앙리 툴루즈 로트렉-프랑스의 명문귀족인 툴루즈 가문 分家출신-의 가문영지였던 ‘로트렉’마을도 지역에 있습니다)에서 태어난 그는, 카톨릭학교를 졸업하고 1756년 불과 15세 나이에 해군장교로 임관합니다. 복무 첫 해부터 7년전쟁(1756∼1763)과 비롯된 영불전쟁(Anglo-French War; 1778∼1783)에 참전하여 크고 작은 전투에서 활약한 전쟁영웅이었으며, 항해 경험이 풍부했던, 그 시기 프랑스해군의 가장 우수한 지휘관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제임스 쿡’의 세계일주 탐험과 얽힌 운명-1 : 라 페루즈 탐험대의 세계일주 항해


그의 이름이 세계 곳곳에 새겨지게 된 배경에는 제임스 쿡 선장의 세계일주 항해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제임스 쿡은 라 페루즈의 마지막 운명까지 좌우하게 됩니다

훗날 프랑스 혁명으로 목이 잘리게 되는 루이 16세는 대항해 시대를 연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 이어 경쟁국인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세계일주 탐험을 통해 국가 위상을 높이는 데 자극 받아 1785년 국가차원의 세계일주 탐험을 지시합니다.

이 시기 유럽국가들의 세계일주 탐험은 단순한 大洋 탐사나 군사 목적만이 아니었습니다. 천문학과 생물. 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과 함께 항해하면서 수많은 표본과 데이터를 수집하는 과학탐사, 항해 경로상에 있는 대륙과 섬들의 해안선을 정확히 측량하고 지도제작을 통해 상세한 해양지도를 제작하는 지리적 탐사, 세계 곳곳에 진출해 있는 유럽국가나 현지 통치집단과의 외교 및 정보수집 임무 수행 등 다양한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서구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직접 이어지게 되고 과학탐사 성과 등을 부각함으로써 국위선양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루이 16세가 직접 추진한 세계일주 탐험대의 지휘관으로 발탁된 인물이 바로 라 페루즈 백작 이었습니다. 범국가적 준비를 거쳐 선발된 과학자. 해양측량사. 화가 등 225명의 인원과 ‘라 부솔(La Boussole)’및 ’라스트롤라브(L’Astrolabe’)’로 명명된 2척의 배로 구성된 세계일주 원정대는 1785년 8월 1일 프랑스 해군의 핵심 기지였던 브레스트에서 출항합니다. 이후 함대는 카나리아 제도와 리우데자네이루를 거쳐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단을 돌아 태평양으로 진입, 스페인령 칠레와 이스터섬 –> 하와이 제도(유럽인으로는 마우이섬 첫 상륙) -> 알라스카(해양측량을 하던 보트가 거센 풍랑으로 전복, 21명 실종) -> 스페인령 캘리포니아 연안(샌프란시스코와 몬테레이 등 방문)을 항해합니다.

캘리포니아를 떠난 라 페루즈 원정대는 태평양을 횡단하는 100여일의 항해를 거쳐 포르투갈의 식민지 마카오에 도착, 알라스카에서 수집한 모피를 판매해 수익금을 대원들에게 분배하기도 합니다. 브레스트항 출발 당시 대령 이었던 라 페루즈 백작은 이 무렵 해군제독으로 승진합니다. 1787년 3월 마카오를 떠난 함대는 스페인 식민지 마닐라에 일시 정박 후 동중국해를 따라 북상, 대한해협 -> 홋카이도섬 -> 사할린섬 -> 8월 15일 ‘라페르주 해협(소야 해협)’을 통과, 1787년 9월 7일 캄차카 반도의 러시아 거점인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요새에 도착합니다.


‘퀠파트(Quelpart) 섬, 다즐레(Dagelet) 섬’이라는 이름 들어보셨습니까?


유럽 국가들이 활용한 퀠파트섬(제주도) 지도

‘퀠파트 섬’은 1653년 나가사키항으로 향하던 중 풍랑으로 좌초해 13년간 조선에서 억류생활을 했던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의 표류기로 서구사회에 널리 알려진, ‘제주도’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서구사회에서는 6.25를 계기로 한국이 국제사회에 알려지기까지 통용된 명칭이었답니다.

라 페루즈 탐험대는 캄차카 반도로 북상하는 과정에서 이곳 제주도를 지나 1787년 5월 21일 부터 31일까지 남.동해안을 항해하며 연안 곳곳을 탐사(수로와 수심 측량 등)했습니다. 조선후기 실록에 등장하는 ‘수상한 배’에 관한 기록 가운데 한 장이 ‘라 페루즈 함대’ 였습니다.

그리고 동해를 항해하던 중 서양인들로는 처음으로 울릉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날씨 탓으로 상륙하지 못했으나 섬을 관찰한 기록을 남겼고 처음 섬을 발견한 탐험대의 천문학자 조셉 다즐레(Joseph Lepaute Dagelet)의

이름을 따 ‘다즐레 섬’으로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이 명칭도 20세기초까지 국제적으로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라 페루즈 함대’가 우리 역사와 연관되는 부분입니다.

울릉도에 ‘라 페루즈’라는 프랑스식 이름의 리조트가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리조트 명칭으로 역사적 배경까지 엮어 그 이름을 착안해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제임스 쿡’의 세계일주 탐험과 얽힌 운명-2 : 라 페루즈 탐험대의 호주 ‘라페루즈’ 상륙


페트로 파블로프스크에 도착한 이들에게 국왕 루이 16세의 지시가 하달돼 있었습니다. 프랑스를 출발하기 전 이곳을 방문하기로 예정돼 있었기에 프랑스 외무성이 러시아를 통해 전달한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호주 동부에 건설되는 영국의 개척지를 조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명령에 따라 재정비를 마친 탐험대는 서태평양을 남하하여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하게 됩니다.

라 페루즈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도 제임스 쿡 선장이 유럽인으로서 첫 발을 딛은 것을 계기로 시작된 영국의 식민지 건설 때문이었던 것입니다(오스트레일리아 개척은 제임스 쿡 선장이 1770년 4월 보타니만 남쪽 ‘커넬’에 발을 내디디며 시작됩니다. 쿡 선장은 커넬 해안가 한 지점에 닻을 내린 후 상륙했고, 그 상륙지점에는 현재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1788년 1월 24일 ‘라 페루즈 탐험대’는 보타니만에 도착해 만의 북쪽지역인 현재의 ‘라페루즈’ 해안에 닻을 내립니다. 그리고... 이곳에 먼저 정박해 있던 11척으로 구성된 영국 왕실해군 함대와 조우합니다.

훗날 ‘첫 함대(First Fleet)’로 불리게 되는, 초대 총독 아서 필립(Arthur Phillip)대령이 인솔하는 호주 이주민단(1,030명중 죄수 726명과 군인 300여명)이었습니다.

각기 고국에서 지구를 반바퀴 돌아 제임스 쿡선장 일행이 한번 방문했던 기록 외에는 알려지지 않은 곳에 같은 시기에 도착해 조우하게 된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매우 가능성 낮은 일이었습니다. 더우기 아서 필립의 함대가 이미 1월 18일 정착지로 권유 받은 보타니만에 도착했으나, 곧 정착지로 부적합함을 깨닫고 대체 정착지를 물색, 현재 시드니 지역에 자리잡기로 결정한 상황이었기에... 시드니(Sydney)라는 이름은 영국 내무상(Home Secretary)으로 뉴사우스웨일즈 식민지 개척을 주도한 시드니 자작(토마스 타운젠트)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First Fleet’은 곧 출발하려 했습니다. 그러했다면 두 함대의 만남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때마침 ‘라 페루즈 탐험대’가 보타니만으로 진입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했던 강풍이 몰아쳤고, ‘First Fleet’은 출항을 미루게 됩니다. 결국 아서 필립 함대는 1월 26일(현재 Australia Day로 기념)에야 시드니로 향하게 되는데, 만일 강풍으로 인해 출발이 지연되지 않거나 라페루즈 함대가 1월 26일 이후 도착했다면 이들은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시드니 만이 매우 좁은 해로를 통해 대양과 연결되고, 특히 새 정착지는 만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 온 곳에 자리 잡았기에 라 페루즈 원정대가 정착지를 찾기 위해 수색했다고 하더라도 발견하기 쉽 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국 독립전쟁이 끝나고 프랑스 혁명전쟁이 시작되기 이전 평화시기였으므로 양측은 우호적인 분위기아래 교류합니다.(이 시기 프랑스는 스페인.러시아와도 우호관계 였기에, 라페루즈 함대는 미주 대륙과 캄차카 반도를 어려움 없이 탐사하고 정박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라 페루즈 백작은 영국측에 캄차카 반도를 떠난 이후 탐사 내용과 항해일지 등 보고서를 전달을 요청, 駐英 대사를 통해 본국에 전달 되도록 했고; 이에 따라 본국을 출발한 후 보타니만까지 라 페루즈 함대의 모든 여정이 상세한 기록으로 남겨져 책자로 출판될 수 있게 됩니다.

라 페루즈 함대는 보타니만 북쪽해안에 캠프를 설치하고 6주간 과학적 조사를 시행하는 한편 보트를 새로 건조하거나 부상당한 대원을 치료하는 등 뒤에 상술할 매서커 만에서 피해를 추스릅니다. 이 기간 부상이 악화돼 사망한 '루이 르사보(Louis Receveur)' 신부를 매장하기도 했는데, 앞서 얘기한 ‘프렌치맨즈 비치(Frenchman’s Beach)’와 그 해변 앞 작은 만에 ‘프렌치맨즈 코브(Frenchman’s Cove)’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입니다. 낭만적 뉘앙스의 이름이 사실은 부상당해 사망한 사람을 묻은 곳에서 연유한다는 아이러니…


실종… 수색… 그리고 40여년후 드러난 그들의 최후


‘라 페루즈 탐험대’는 1788년 3월 10일 보타니만을 떠납니다. 영국을 통해 루이 16세에게 보고된 항해계획에 따르면 탐험대는 호주대륙 동쪽의 남태평양 지역을 북상한 후 동남아를 거쳐 인도양으로 진입해 모리셔스섬 -> 레위니옹섬 -> 희망봉을 돌아 1789년 6월까지는 귀국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보타니만을 떠난 후 라 페르주 함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프랑스 정부는 영국에게 협조를 요청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라 페루즈 탐험대’의 행방을 찾습니다. 1791년 ∼ 1793년에는 브루니 당트르카스토(Bruni d’Entrecasteaux)제독이 지휘하는 함대를 직접 파견해 보타니만 -> 바누아투 -> 뉴기니 -> 인도양 해역을 수색하기도 했으나 아무 흔적도 찾지 못합니다

루이 16세가 처형 당일 아침 라 페루즈 소식을 물었던 것은 아마도 당트르카스토의 수색대가 ‘사라진 함대’의 행방을 찾고 있는 시기였기 때문인 듯합니다. 비록 어리석은 군주로 비판 받지만, 자신의 명령으로 위험을 감수했던 신민들을 죽음의 순간에도 챙기는 모습이 애틋합니다.

‘라 페루즈 탐험대’의 최후는 실종후 40년이 흐른 1828년 프랑스해군 장교 뒤몽 뒤르빌 (Jules Sébastien Dumont d'Urville)이 이끈 탐사대에 의해 최종적으로 드러납니다. 라 페루즈 함대는 솔로몬 제도의 바니코르(Vanikoro)섬 유역에서 폭풍에 휘말려 산호초에 좌초되었던 것입니다.

원주민들 증언을 종합하면, 생존한 대원들 중 일부는 좌초 9개월여후 난파선에서 수습한 목재 등으로 작은 배를 건조해 출항했으며, 구조를 기다리며 남은 대원 가운데 2명은 아일랜드출신 선장 피터 딜런(Peter Dillon)이 1826년 이 지역에 오기 몇 년 전까지 바니코르에 머물다가 어디론가 떠났다 합니다.(1825년부터 영국해군 등에 의해 바니코르 인근해역에서 라 페루즈 제독이 수여받은 ‘성 루이 십자가’를 비롯한 탐험대 흔적이 잇따라 발견, 수색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시절 해양제국을 건설해간 영국 해군의 대단함…


‘라 페루즈 함대’의 마지막 행적이 드러나면서 비판섞인 아쉬움이 제기됩니다. 1791년 8월 13일 유명한 ‘바운티(Bounty) 호의 반란자’들을 수색하던 영국 해군의 판도라(Pandora) 호가 바니코로(Vanikoro)섬 인근을 항해하던 중 섬에서 연기 ‘신호’가 피어 오르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결과론적으로 그 연기가 살아남은 라 페루즈 원정대원들이 피운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지고, 판도라호가 섬에 정박했다면 이들을 구조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운티호 반란자 수색이라는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던 에드워드 에드워즈(Edward Edwards) 선장은 ‘선상반란자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노출할 연기를 피울 리 없다’는 판단아래 무시합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새는 듯하지만... 대단한 영국 해군... 1789년 4월 28일 ‘타히티섬에서 빵나무 묘목 확보' 등의 임무를 띤 바운티호에서 선상반란이 발생합니다. 고난 끝에 생환한 블라이(William Bligh) 선장으로부터 반란사실을 보고받은 해군 지휘부는 반란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1790년 8월 6일 에드워드 선장에게 판도라호의 지휘를 맡기고 남태평양을 샅샅이 뒤져 반란자들을 잡아들일 것을 명령합니다. 에드워드는 남태평양에 산재해 있는 수 천여개 섬을 하나하나 수색해 나갑니다. 바운티호의 항로를 추정, 반란선원 10명을 찾아낸 후에도 남은 9명을 계속 찾아 다닙니다. 범선의 시대에 선상 반란자 20여명 찾겠다고 기약없이 광활한 태평양을 수색하도록 한 영국 해군... 더없이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한 판도라호의 선장 에드워드...

항해 1년을 넘겨 여전히 수색을 이어가던 시기 바니코르 섬을 지나간 선장에게 ‘바운티호 반란자’일 가능성이 낮다고 여겨지는 멈춤은 있을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판도라호는 바니코르 섬을 지나친 16일후인 8월 29일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에 좌초해 침몰합니다. 생존한 선원들은 작은 보트를 타고 온갖 어려움 끝에 네덜란드령 바타비아(자카르타)에 도착합니다. 승무원 134명중 78명, 반란자 10명중 6명만 살아서.. .


‘라 페루즈 함대’의 유산

항해.jpg 라 페루즈 함대가 거쳐간 항해 경로


앞서 얘기했듯 ‘라 페루즈’라는 이름은 세계 곳곳에 남겨져 있습니다. 그가 항해했던 알라스카와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주의 산은 물론 그가 가지 않은 '뉴질랜드 알프스'의 산에 이르기까지... 기념비도 호주 라페루즈 해변과 캄차카반도, 바니코르 섬에 이르기까지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남겨진 곳 중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영국의 호주 식민지 개척사의 결정적 순간을 함께 했던 보타니만 북쪽 해안일 것입니다.

호주 정부는 1989년 양국의 역사적 유대를 기념하는 의미로 ‘퍼스트 플릿’과 ‘라 페루즈 탐험대’ 만남 200주년을 축하하는 ‘라 페루즈 백작’의 청동흉상을 제작해 기증, 에펠탑에 인접한 센강 남쪽 ‘오스트레일리아 산책로(Promenade d'Australie)’에 자리하게 됩니다.

바니코르.jpg 바니코르 섬의 '라 페루즈 함대' 기념비

또한 ‘라 페루즈 함대’가 출항한 브레스트의 국립해양박물관(Musée national de la Marine de Brest)에는 탐험대 남긴 각종 유물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그가 태어난 지역을 기념해 프랑스 알비(Albi)에도 그의 동상과 그를 기념하는 박물관 등이 있습니다


에필로그 1 : 살아남은 사람들


처음 ‘라 페루즈 탐험대’에 참여한 225명중 3명은 살아남았습니다. 페르로파블로프스크에 도착한 ‘라 페루즈’ 백작은 러시아어 통역관 ‘바르텔레미 드 레셉스(Bartelemy de Lesseps)’ 등 3인에게 그동안 자신들의 항해와 과학탐사 결과를 본국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깁니다. 이에 따라 레셉스 등은 1787년 10월 7일 페트로파블로프스크를 떠나 1년여에 걸쳐 시베리아와 러시아를 횡단, 1788년 9월 22 러시아의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그 도착합니다. 한겨울 혹한의 시베리아를 횡단한 레셉스 일행의 여정 자체도 모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살아 남았습니다. 1834년까지 생존했던 레셉스는 바니코르 섬에서 발견된 탐험대의 유품을 직접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레셉스 일행의 시베리아. 러시아 횡단 경로

‘레셉스’라는 이름 익숙하실 것입니다. 레셉스 가문은 전통적으로 외교관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바르텔레미의 부친도, 동생도, 그리고... 수에즈 운하건설을 이끌어내 ‘레셉스’라는 성을 세계사에 남긴 동생의 아들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de Lesseps)도…



에필로그 2 : 각자에 주어진 ‘모이라(운명)…’ 세계사를 바꾼 결정


라 페루즈 원정대는 국왕이 직접 관심을 갖고 추진했던 국가사업이었기에 과학자를 비롯 원정대에 참가할 각계 우수 인력을 선발했습니다. 당연히 많은 인재가 참가 신청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 사관학교를 막 졸업한 16세의 코르시카출신 햇병아리 소위도 있었습니다.

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입니다. 수학에 능했던 포병장교 나폴레옹 소위는 자신의 전문 분야인 수학과 포술이 육군에서 보다 해군복무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 지원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선택 받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가 라 페루즈 원정대의 일원으로 선발됐다면, 솔로몬 제도의 한 작은 섬에서 다른 대원들과 함께 최후를 맞았을 것이고... 유럽을 뒤흔든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에필로그 3 : 어렵게 쟁취한 사랑… 그러나 짧았던…


라 페루즈 백작은 33세가 되던 해 인도양의 작은 섬인 프랑스령 모리셔스에서 루이즈-엘레노어라는 혼혈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그 녀와 결혼하려 했으나 뼈대 있는 귀족가문에서 족보도 없는 혼혈 여성과 결혼을 허락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8년의 세월이 흐른 1783년, 세계일주 항해를 떠나기 2년전에야 승락을 얻어내 결혼합니다. 라 페루즈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보여주는 아내와의 결혼생활은, 그러나 그의 실종으로 불과 2년만에 끝납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죽는 날까지 실종된 남편의 생환을 믿고 기도하며 홀로 살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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