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을 위해 '대역부도죄인'의 길을 갔으나 신의 나라에 들지 못한다면..
토굴에 숨어 두려움속에 써내려 간 간절한 호소
20여년전 우연히 충북 제천에 소재한 ‘배론성지’를 방문하기 전까지 황사영 알렉시오는 1801년 신유박해를 피해 도피하던 중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으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백서’를 淸 주재 프랑스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돼 ‘대역부도죄’로 거열형에 처해진 인물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아울러 그가 주교에게 군대를 이끌고 와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반민족적 발상을 했다는 것에 대해 다소 부정적 생각을 갖고 있었음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배론성지를 돌아보다가 우연히 황사영이 은둔했던 토굴유적을 살펴보게 되면서, 그리고 이후 교황이 방한해 조선말 순교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시복(諡福), 시성(諡聖)하는 모습을 보며 황사영에 대해 연민과 함께 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현재의 토굴유적은 배론성지의 한 부분으로 잘 정리되어 있지만 황사영이 숨어있을 당시에는 인적 드문 궁벽한 산골의 흙을 파내 만든 비좁고 휑한 공간에 불과 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 들어 앉아 숨죽여 지내며 동료 신자들의 참혹한 죽음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자신도 언제 발각되어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사실 황사영 백서의 대부분은 순교한 교인들 행적과 죽음을 기록한 내용이라 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조선의 교인들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의 사고를 압도했을 것입니다. 그의 항변이 아니더라도 임금과 국가에 반역할 생각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한 국가의 신민 으로서 외세를 끌어들이고 조선을 淸의 영향력아래 두려 했던 발상은 비판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마태복음 22장 21절, 마가복음 12장 17절)’라는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와 현실의 나라를 구분해 세속권력에 대해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되는 측면에서 본다면 교의에 어긋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유박해는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신민에 대한 잔혹한 국가폭력 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개념이 그 시절 조선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러한 관점에서 얘기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을 외면할 수 없겠으나, 보편적 가치인 인권보호라는 측면에서 동정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권위주의정권시절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탄압받을 때 국제사회의 구명과 도움을 요청했던 근래의 사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신유박해가 정조의 죽음을 계기로 노론벽파가 남인중심 시파를 축출하기 위한 정략적 목적이 있었다는 측면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인 이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안식이 있기를
개인적으로는 20여년전 배론성지를 다녀온 이후 황사영의 행위를 ‘특정국가에서 대규모 인권탄압 행위가 벌어질 경우 국제사회가 ‘간여’해 인류보편의 가치를 수호해야 한다’는 현대적 관점에서 재평가하게 됐습니다.
거열형으로 찢긴 황사영의 시신은 문중에서 수습해 묻었답니다. 황사영의 모친은 거제, 처 정명련은 제주의 관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살의 어린 나이로 인해 '교형(사형)'을 면한 아들 경한은 처 정명련이 제주로 가는 도중 추자도에 남겨 오씨성을 가진 집에서 거두어 키우게 했답니다. 그리하여 추자도의 오씨와 황씨는 一家라는 개념에 따라 혼인을 하지 않는다고 하고.. 본래 경한은 추자도에서 관비가 되어야 했으나 아들이 관노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관원을 매수해 죽은 것으로 꾸몄다는 이야기가 전해 집니다. 외딴 섬에 아들을 홀로 남겨놓고 떠나는 황사영의 처 정명련의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짠해 집니다.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가진 명련은 '난주'라는 이름으로 더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관비가 되면서 그 이름으로 불리워진 듯합니다. 그녀는 신유박해 이후 37년을 더 살았습니다. 대역부도죄인의 처이자 천한 관비로 온갖 수모속에서 살았을 그녀이지만, 덕행과 선행으로 많은 귀감이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세속적 관점에서는 모든 것을 잃었으나, 신앙인으로서. 구도자로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1980년 창원황씨 문중에서 황사영의 묘를 찾아냈습니다. 무덤에서는 십자가와 청화백자합, 그리고 청화백자합 속 비단천 조각이 나왔답니다. 1790년 임금인 정조가 황사영이 16세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한 것을 계기로 손을 잡으며 격려했고, 이후 황사영은 그 시절 관례에 따라 임금이 만진 손을 토시(비단천 조각)로 두르고 다녔다고 합니다. 붙잡히는 순간까지도... 황사영의 왕가에 대한 충성을 엿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천주교가 탄압받지 않고 허용됐다면 그는 한편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충실한 종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 나라의 충성스런 신민으로서의 두 삶을 훌륭히 살아갔을 것입니다.
황사영에게 연민을 갖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매국적 백서를 쓴 행위로 인해 비판받는 것 때문이 아닙니다. 황사영을 고고한 품성을 지닌 성인과 같이 그린 김훈의 소설 ‘흑산’ 내용처럼 그의 인품을 높이 평가해서도 아닙니다. 그 무엇보다 ‘백서’를 쓴 ‘매국적 행위’로 인해 천주교계로부터 조차 공식적 숭앙을 받지 못한다는 점 때문입니다. (물론 비공식적으로는...) 황사영은 젊은 나이였으나 분명 당시 천주교계의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교인으로서 모범적 행적이나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순교한 모습 등을 고려하면 마땅히 조선말기 천주교 박해로 순교한 희생자중 諡聖된 김대건. 정하상 등 103위까지는 아니더라도 124위 諡福者에는 포함돼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백서사건을 둘러싼 비판을 의식한 때문인 듯 한국의 천주교계에서 시복.시성 대상에 포함을 꺼려왔습니다. 신앙 때문에 매국.반역의 오명을 썼는데 교회로 부터도 존재를 거론하기 꺼려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현실의 나라로부터는 버림받았더라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인정받았으면 하는데...
‘황사영’이라는 이름은 그가 살았던 조선에서 대역부도죄로 처벌받음이 마땅하다고 제쳐놓더라도 그의 다른이름, ‘신의 나라’의 일원임을 꿈꿨던 ‘알렉시오’는 신의 구원과 신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으로는 늦게 나마 다행이다 싶게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지난 2021년 교황청에 제출한 133위 시복 예비심사 대상에
포함되었습니다. 물론 교황청도 황사영의 특별한 사정을 고려할 수 밖에 없기에 결과를 지켜봐야 하겠으나...
황사영은 다산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의 사위입니다. 한국의 천주교수용과 초기 성장과정에서 다산의 가문은 그 중심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맏형 정약현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습니다만, 그의 사위 황사영은 거열형에 처해 졌고 장녀 명련은 제주관비, 차녀와 사위 및 그 둘의 소생인 외손자까지 순교(명련의 여동생 가족은 명련이 사망한 1년후 있었던 기해박해때 순교)합니다. 다산과 둘째 형 약전은 배교했기에 살아남아 각각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물론 약전은 그곳에서 생을 마쳤습니다만..) 셋째 형 정약종의 집안은 정약종 본인은 물론 처 유씨, 자녀인 철상, 하상. 정혜 모두 순교합니다. 정약종과 철상은 시복, 처와 자녀 하상. 정혜는 시성되는 등 한집안 2대 5명이 諡福 諡聖되는 가히 유례없는 기록을 남깁니다. 다산의 매제(여동생의 남편)이자 한국 천주교 최초로 세례 받은 이승훈을 비롯 이른바 진산사건으로 첫 천주교 순교자가 됐던 윤지충(다산의 외사촌 형), 정약현의 처남인 이벽과 이승훈의 외숙인 이가환 등 남인과 천주교계의 지도적 인물 다수가 다산 가문과 얽혀 있습니다. 다산을 비롯하여 천주학을 새로운 학문으로 접하고 공부했던 탐구가 새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신앙으로, 순교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속세의 부와 특권을 초월한 한 젊은 죽음의 이야기... 그리고 그의 세례명에 담긴 종교와 문화의 융합
황사영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의 백서에 이름을 올린 특이한 한 인물에 얽힌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어 집니다.
김건순… 그는 1775년 태어난 황사영 보다 한해 늦은 1776년에 태어나, ‘백서사건’ 발각으로 은신해 있던 배론의 토굴에서 뒤늦게 압송돼 12월 10일 서소문(소의문)밖에서 거열형에 처해진 황사영에 비해 6개월 빠른 1801년 6월 1일 서소문 밖에서 참형에 처해집니다. 예. 그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인물입니다. 대부분 순교한 교인들의 행적과 죽음을 기록한 황사영의 백서에도 그의 순교에 대한 글이 있답니다
“그가 처형당할 때 사람들에게 '세상의 벼슬이나 명예는 모두가 헛되고 거짓된 것이오. 나 역시 약간의 명망이 있고 벼슬도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헛되고 거짓된 것이기에 버리고 취하지 않았소. 오직 하느님의 성교만이 지극히 진실한 것이기에 이것을 위하여 죽음도 사양치 않는 것이오. 당신들도 이 뜻을 자세히 알도록 하시오'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참수 당해 순교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였는데 장안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했습니다”라는…
김건순이 ‘나 역시 약간의 명망이 있고…’라고 말했다는 것에 그의 특별함이 담겨있습니다, 그는 집권세력이었던 노론 출신의 유일한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무엇보다 세도정치로 잘 알려진 안동 김씨 출신으로, 김상헌의 7대손이며 순조의 장인인 세도가 김조순과 같은 항렬이었습니다.
그는 노론임에도 권철신, 이가환 등 남인들과 교유하며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고, 주문모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게 됩니다. 그는 유가와 도가, 불교는 물론 병가(부국강병을 위한)를 깊이 연구했고, 신유박해로 중단됐으나 정약종과 함께 천주교 전도를 위해 교리를 체계적이고 정리하는 ‘성교전서’ 저술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천주교 입교 이후 안동 김씨 일족으로부터 배척당하고 배교를 위협받았음에도 신앙을 지켰고, 결국 참형을 당한 후 집안 종손의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합니다.
김건순과 관련해 눈에 띄는 점은 그의 세례명 입니다. ‘요사팟(Josaphat)’. 요사팟 성인 이야기는 7세기 다마스쿠스의 ‘성요한’이 그리스어로 기록한 ‘발람과 요사팟(Barlaam and Josaphat)’이라는 책에 처음 등장합니다.(중국과 페르시아 문헌에는 2-3세기부터 ‘요사팟’의 이야기가 등장한답니다) 이 책은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유럽 각지에 소개됐고, 요사팟은 은수자(속세를 떠나 은둔하며 고행과 기도 등으로 사는 수도자) 성인으로 굳건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테오 리치의 뒤를 이어 명나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롱고바르디(Nicolas Longobardi, 1565~1655)가 1602년 ‘성 요사팟시말(聖若撒法始末)’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해 소개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사팟 이야기는 뭔가 이상합니다. 내용을 보면 요사팟의 삶은 석가모니의 삶 그것입니다. ‘안서니 새튼’이 저서 ‘노마드’에서 주장했듯 불교가 유라시아 초원과 중.근동 지역에 소개되면서 부처의 삶이 기독교 성인의 삶으로 개작된 것으로 평가됩니다. 아랍어로 ‘학교’, ‘학당’ 등으로 번역되는 이슬람권 교육기관 마드라사(madrasah; 숙식 등 편의를 제공하면서 교리연구와 공부, 수양 활동을 하도록 합니다)가 보시를 받아 승려들의 수양과 공부, 교리연구에 편의를 제공했던 불교 시스템의 영향을 받아 중앙아시아에서 처음 시작된 것과 같이 동서양 문화와 종교교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건순은 ‘요사밧’이라는 세례명을 주문모 신부가 지어줬다고 밝혔습니다. 세례명이 본인 또는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그에게 바라는 바를 투사해 지어준다는 면에서 주문모 신부가 노론 출신의 특권 양반층인 김건순에게서 부귀영화를 뿌리치고 믿음에 헌신한 요사팟 성인(석가모니)의 삶을 보았고, 나아가 요사팟과 같은 신실한 교인이 되기를 바랐다는 의미로 생각됩니다. 초기 천주교인 가운데 요사팟이라는 세례명을 받은 사람은 김건순이 유일
하다고 합니다.
기원전 6세기 인도에서 새로운 종교인 불교를 개창한 고다마 싯타르타의 삶에 얽힌 이야기가 유라시아 대륙으로 퍼져나가 600여년 후 지중해 동쪽 땅에서 등장한 기독교와 어우러져 두 종교가 던지고자 했던 유사한 가르침과 함께 기독교 성인의 이야기가 되고, 그것이 또다시 동쪽으로 퍼져 종교적, 문화적 충돌로 박해 받고 죽임을 당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연결된다는 것은... 2,400년의 시간과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남쪽과 서쪽, 그리고 동쪽 끝이 연결되는 공간이 어우러지는 여정... 불과 몇 줄의 이야기... 그러나 그 몇 줄의 이야기에는 광대한 시.공간을 살아낸 수많은 사람의 삶와 죽음, 기쁨과 슬픔, 고통과 참회, 평화와 투쟁의 여정이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며 스러진 두 사람 황사영과 김건순도 그 기나긴 여정 속에서 보면, 그리고 그들이 믿은 우주적 진리나 그들이 꿈꾸었던 새로운 이상사회의 차원에서 보면 (물론 애잔한 감정을 갖게 하지만) 더할 수 없이 작은 존재로 여겨집니다.
아울러 ‘대역부도’ 등등 그들의 선택에 대한 속세 인간들의 평가가 의미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