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가야할 길을 갔던 망국의 황제들... 그리고 감내해야 할 희생
나라를 잃은 왕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하나는 왕의 자리를 유지한 채 개인적 안락을 누리며 정복자들의 뜻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성공 확률이 극히 낮은 ‘나라를 되찾는 투쟁’에 나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후자가 멋있어 보이긴 할 것이나 실제 역사에서는 후자보다 전자를 택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그리고 냉정히 따져보면 그것이 합리적 선택일 것입니다
프랑스 식민지가 된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황제(국왕)들 가운데 흔치 않게 후자를 택해 왕위를 빼앗기고 추방당해 머나먼 알제리와 인도양 외딴 섬 레위니옹에서 살다가 죽은 왕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프랑스에 항거하다 왕위에서 쫓겨났을 때 그들의 나이는 불과 13살과 16살이었습니다. 그 한 많은 사연이 왕국의 수도 ‘후에’ 황궁에 서려 있습니다. 이들은 왕위에서 쫓겨났기에 조선시대 연산군이나 광해군 처럼 사후 추증되는 묘호도 없이 국왕 즉위시 채택한 연호로 불리웁니다.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파괴된’ 황궁 ‘자금성’
응우옌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 그 ‘후에’를 상징하는 황궁을 접하면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에 한번, 곳곳이 파괴되고 폐허로 방치된 모습에 또 한번 놀라게 됩니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강녕전, 교태전과 같은 존재였던 황궁 중심부의 근정전, 건성전, 곤태전이 있던 자리는 흔적만 남은 풀밭 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자연스럽게 야은 길재의 시조가 떠오르게 합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개인적으로 곳곳이 파괴된 채 남아 있는 이 후에 황궁에 얽힌 애틋함은, 그 파괴 보다 무너진 황궁에서 있었던 응우옌왕조 왕의 삶과 분투, 좌절의 이야기 때문에 더 컸습니다. 비록 패배하고 추방당하는 비극으로 끝났으나 강압에 순응하기 보다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승산 없는 싸움에 나섰던 이들,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머나먼 타국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한 그들의 이야기는 이곳을 베트남 독립운동의 요람으로 만들었고 끝끝내 독립을 쟁취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후에 황궁은 그 ‘인걸들이 사라진’ 폐허로 남아 ‘태평연월의 꿈’을 이야기함으로써 더 큰 울림을 주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응우옌 왕조를 존치시킨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배 체제
응우옌 왕조의 황제들이 프랑스의 지배에 항거하다가 구금되고 추방당하는 상황이 빚어진 것은 우리와 달랐던 식민지배체제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일본이 한반도 전역을 직접 식민지배 한 것과 달리 프랑스는 베트남을 완전 장악한 1880년대초부터 영토를 크게 셋으로 나눠 지배했습니다. 경제적 수탈가치가 가장 높았던 사이공 등 남부의 코친차이나는 총독(Gouverneur)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했던 반면, 베트남 중부 이북은 보호국화 해 명목상 베트남 황제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간접 통치방식을 취했습니다. 다만 베트남 왕국에 대한 간접통치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영토 특성과 정치.군사적 중요성 등을 고려하여 왕조의 수도인 후에와 하노이 두 곳에 각기 고등판무관(Résident supérieur)을 두고 이루어집니다.
달랏(사이공). 바나힐(다낭과 후에). 싸파(하노이) 3곳이 프랑스인들의 피서지로 개발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① ‘反프랑스 투쟁’의 출발인 ‘깐부옹(Can Vuong: 근왕) 운동’의 기치를 든 황제, 함응이…
권신들에 의해 13살 어린 나이에 황제로 추대되다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벌어지기 6개월여 전인 1884년 6월 6일 체결된 ‘갑신조약’으로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배 체제(3분할)가 완성된 2개월후인 1884년 8월 2일 함응이(Ham Nghi: 咸宜; 1871.8.3 ∼ 1944.1.14)가 13세 나이로 황제위에 오릅니다.
갑신 조약으로 지배권을 강화한 탓인지 프랑스는 그의 즉위때부터 ‘국왕추대 관련 사전 논의가 없었다’는 등 시비를 제기하며 후에 조정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했고, 이에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권신(權臣) 톤닷투옛과 응우옌반뚜엉이 강력 반발합니다. 이에 프랑스는 궁정내부문제와 거리를 둬왔던 기조를 바꿔 궁정을 장악하고 反프랑스 노선을 주도한 톤닷투옛 등을 제거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1885년 7월 3일 지휘하는 병력을 수도 후에에 파견합니다. 이들은 의도적으로 톤닷투옛 등을 자극했고, 운명의 7월 5일∼7월 6일밤 사이 톤닷투옛 등은 프랑스군 병영과 고등판무관이 주재하는 프랑스 대사관을 공격합니다. 역사가들이 덫에 걸린 것으로 평가하는 이 선제공격은 곧 실패로 끝나고, 반격에 나선 프랑스군은 황성을 공격해 궁궐을 약탈합니다.
베트남의 反프랑스 독립투쟁의 시작 ‘근왕 운동’을 이끌다
황성이 공격받기 전 톤닷투옛 등은 함응이 왕과 함께 탈출해 후에 북서쪽 꽝찌(Quang Tri : 廣治)성의 탄소(Tân Sở: 新所)에 대규모로 조성한 요새에 자리잡은 후 ‘국왕을 지켜 프랑스와의 투쟁에 나설 것’을 독려하는 황제명의 칙서를 공포(7월 13일)합니다.
함응이 왕 칙서를 계기로 베트남왕국 곳곳에서 반프랑스 ‘근왕(깐부옹)군’이 봉기하고, 이후 근왕운동은 1888년 9월 26일 라오스에 인접한 꽝빈(Quảng Bình: 廣平)성 민호아(Minh Hoá)의 험한 산악지대에 은신하던 함응이가 부하의 배신으로 체포되기 까지 거세게 이어집니다.
함응이 왕이 프랑스군에 체포된 이후에도 깐부옹 운동의 가장 성공적 사례였던 흐엉케(Huong Khe: 香溪) 봉기는 지도자인 판딘풍(Phan Dinh Phung : 潘廷逢, 1847–1895.12.8)이 사망할 때까지 10년을 버텨 냅니다.판딘풍은 깐부옹 운동이 낳은 가장 영웅적 인물로; 엄정한 기강과 효율적인 게릴라 전술로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디엔비엔푸 승리를 이끈 보응우옌지압은 그를 ‘근대 베트남의 군사 전략가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깐부옹 운동은 프랑스의 침탈에 대한 베트남인들 투쟁에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됩니다. 내부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있던 베트남 지배계급을 결속시킴은 물론 국왕이 백성들 속에 들어가 관민이 함께 프랑스에 맞서 투쟁하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이후 베트남 독립투쟁의 기반을 확충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물론 한계도 분명했습니다. 각 지방 단위의 소규모 봉기를 한데 묶어내 조직적으로 투쟁하는 체계를 갖추지 못했고, 식량조달 등을 위한 약탈행위로 반감을 사거나 베트남인들에 의해 차별 받던 소수민족이 프랑스를 지원하는 상황이 빚어졌습니다. 특히 ‘親서구세력’이라는 생각으로 카톨릭 신도를 대거학살(4만여명 추산)해, 이들이 프랑스군과 협력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군에게 사로잡혀 알제리로 추방당하다
‘깐부옹 운동’에 맞서 프랑스는 체계적 진압작전을 벌입니다. 우선 후에에 남은 조정 관료들과 협력해 함응이 왕 폐위를 선언하고 9월 19일 친형인 ‘동칸 왕’을 즉위시킨후,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의 다수(3만 5,000여명)를 점하고 있던 하노이 지역 프랑스군을 본격 동원합니다 아울러 베트남 군을 토벌에 앞장 세움으로써 근왕군을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세력’으로 몰아갑니다.
함응이 왕은 탄소 요새가 공격에 취약해 지자 꽝찌, 꽝빈, 하틴, 응에안 성 등 베트남 중북부 산악지대를 옮겨가며 항거를 계속합니다. 그는 프랑스측이 ‘하틴 등 4개성 국왕으로 임명’을 제의하며 깐부옹 운동 중단을 설득했으나 ‘프랑스의 허수아비가 되느니 숲에서 죽겠다’며 거부합니다.
결국 4년여 도피투쟁 끝에 함응이 왕이 체포된 후, 프랑스는 對프랑스 항전의 상징적 존재로서 베트남인들의 높은 존경을 받게 된 그가 베트남에 머물 경우 식민통치에 부담이 될 것을 우려해 국외추방을 결정합니다.
그가 꽝빈성 동허이를 거쳐 후에 인근의 항구에 잠시 들렀을 때 프랑스 고등판무관이 모친이 위중함을 알리고 원한다면 상봉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나라를 잃고 감금된 몸으로 무슨 낯으로 부모와 형제자매를 생각할 수 있겠느냐”며 사양했다고 합니다. 그의 나이 불과 18살 때 였습니다. 결국 1888 12 년 월 12일 함응이 왕은 사이공에서 ‘비엔호아 호’에 탑승, 한 달여의 항해 끝에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식민지 알제리의 수도 알제이에 도착합니다. 애써 의연한 모습을 보이던 그도 고국 땅이 멀어지는 순간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알았기에… 그는 알제이 도착 11일후 프랑스총독으로부터 모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알제이 인근의 엘 비아르(El Biar) 마을에 있는 저택을 구입하여 1944년 사망할 때까지 거주합니다. 프랑스 정부는 그가 편안하게 살 수 있을 만큼의 연금을 지급했고, 그는 자신이 거주하는 저택을 지아롱 빌라(Gia Long Villa)로 명명했습니다.
응우옌 왕조를 개창한 초대 황제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프랑스인으로 살다가 프랑스인으로 죽어 프랑스에 묻히다.
베트남의 왕이었던 함응이는 프랑스인으로 죽었습니다. 알제리 도착 초기에는 베트남을 침공한 프랑스어 사용을 거부하고 전통복장을 고집했습니다. 그러나 우호적인 프랑스인의 모습에 마음을 열고, 프랑스어와 문화를 익히게 됩니다. 이후 예술에 재능이 있어 화가로 활동하면서 미술작품을 남기기도 했고, 폴 고갱이나 로댕 등과 교류하기도 했습니다.(함응이는 지아롱 빌라에서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살았기에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알제리독립전쟁 기간 대부분 소실됐다고 합니다. 프랑스에 맞서 싸우다가 추방당한 왕의 그림이 또 다른 독립투쟁 와중에 사라졌다는 사실은 묘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는 1904년에는 알제리 주재 프랑스 고위관료의 딸인 마르셀 랄로예(Marcelle Laloe: 1884.7.2 ∼ 1974. 9.5)와 결혼해 1남 2녀를 남깁니다.
그와 아내, 장녀 응우옌 푹 누 마이(Nguyen Phuc Nhu Mai: 阮福女梅; 1905∼1999) 공주, 아들인 응우옌 푹 민 득(Nguyen Phuc Minh Duc: 阮福明德; 1910∼1990 는 프랑스 남서부 도르도뉴지방 또냑(Thonac)에 묻혔습니다. 장녀 누마이 공주가 농학 및 생물학을 전공하고 1930년 또냑 소재 로세 성(Château de Losse)을 매입해 어머니가 사망할 무렵까지 성을 관리하며 아름다운 정원을 조성했던 인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현재도 ‘안남공주’ 투어 등이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들인 민득 왕자는 프랑스의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장교로 임관했습니다. 프랑스 외인부대 장교로 대령까지 진급한 그는 1946년 소령으로 복무시 일본군에 의해 밀려났던 베트남에 再진주하는 프랑스군 일원으로 파견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설사 군법회의에 회부돼 처벌받는 한이 있더라도 베트남 식민지배를 위한 군 일원으로 활동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완강하게 버텨 알제리에서 근무를 하게 되고, 이곳에서 역시 생시르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중위로 근무하던 베트남의 마지막 왕 바오다이(Bao Dai: 保大)의 아들이자 조카뻘인 응우옌 푹 바오롱(Nguyen Phuc Bao Long)왕세자와 조우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는 베트남 왕가의 자손들이 프랑스 식민지배의 선봉에 서있던 외인부대 장교로 근무하게 되는 아이러니는 그러나 프랑스에게 좋은 홍보거리였을 듯 싶습니다.
베트남 곳곳에는 반 제국주의 투쟁에 앞장섰던 함응이 왕의 이름을 딴 거리와 건물들이 있습 니다. 그의 유해를 고국으로 송환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가 베트남인으로 살았던 18년 보다 긴 55년을 프랑스인으로 살았기에, 그리고 자손들도 프랑스인으로 살고 있기에 아름답고 목가적인 또냑에서 아내 및 자녀들과 영면하는 것이 맞다고 여겨집니다
② 베트남 독립운동 세력과 교감아래 反프랑스 봉기에 나섰던 두이 탄(維新) 황제
부친인 탄 타이 왕이 反프랑스 정책으로 쫓겨나다
함응이 왕의 뒤를 이은 동칸 왕이 1889년 불과 25세 나이로 3살 어린 아들을 남기고 사망하자 후에 조정은 프랑스 고등판무관실에 후임국왕 선정문제를 문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왕이 되기 어려웠던 탄타이(Than Thai: 成泰; 1879.3.14∼1954.3.20)가 뜻밖의 황제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름이 응우옌 푹 부 란(Nguyen Phuc Buu Lan: 阮福寶隣)이었던 탄 타이는 1883년 폐위돼 굶어 죽은 둑둑 왕의 아들이었고 외조부는 함응이왕을 지지하며 동칸왕을 비판하다 죽임을 당했기에 왕위는 커녕 자칫 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고모부인 디엡 반 쿠옹(Diep Van Cuong)이 이시기 고등판무관실의 통역관으로 있었고, 그가 불우한 처조카가 국왕으로 등극할 수 있도록 공작을 합니다.
탄 타이가 국왕으로 추대될 때 과거 남편의 비참한 죽음의 충격이 컸던 모친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왕으로 추대하지 말 것’을 간곡하게 호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는 즉위후 왕실역사에서 지워진 존재였던 선친 득득 왕에게 쿵통(Cung Tong: 恭宗)이라는 묘호를 내려 신원을 회복하고 왕릉을 조성해 새롭게 매장했습니다
불과 10살에 즉위한 탄 타이가 명민한 인물이라는 데는 의견이 일치합니다. 그는 베트남 국왕 중 최초로 머리를 짧게 깎고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다양한 건축사업과 더불어 서구식 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등 근대화에 힘썼습니다. 또한 궁을 벗어나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고 대화를 하는 등 전통적인 유교군주의 모습을 탈피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많은 프랑스측 기록은 그는 괴팍하고 충동적이며 방탕하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결국 1907년 강제 퇴위로 이어지게 되는데, 많은 역사가들은 탄 타이 왕의 권위를 실추시키려는 조작이거나 탄 타이 왕이 자신의 反프랑스 노선을 은폐하고 경계심을 약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장한 것이라는 평가를 합니다.
그가 은밀하게 민족운동을 지원하고 봉기를 준비하였다는 정황 증거가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가 對프랑스 항쟁을 위해 중국 망명을 꾀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의 실체가 어떠했던 탄 타이는 프랑스의 관리임명안을 거부하는 등 점차 反프랑스 성향을 공개적으로 드러냈고 프랑스는 정신적 문제를 명분으로 1907년 9월 3일 親프랑스 관료들을 앞세워 자발적 퇴위를 이끌어냅니다.
탄 타이 왕은 신하들이 서명한 퇴위 요구서를 읽은 후 희미한 미소와 함께 ‘재가’라는 두 글자를 쓴 후 등을 돌려 자리를 떴다고 합니다. 그 순간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탄 타이의 왕위를 계승한 것이 불과 7살의 아들 두이 탄(Duy Tan: 維新; 1900.9.19∼1945.12.26)이었습니다
상왕이 된 탄 타이의 신병처리를 고민하던 프랑스 식민당국은 직할 식민지인 코친차이나 지역으로 옮겨 현재의 붕타우(Vung Tau)에 소재한 저택 박딘(Bach Dinh)에 가택 연금합니다. 탄 타이는 이곳에서 그의 아들과 함께 국외로 추방되는 1916년까지 갇혀 지내게 됩니다.
베트남 독립운동단체인 ‘베트남 광복회’와 反프랑스 봉기를 꾀했으나 실패하다
베트남 민족주주자들은 탄 타이 왕의 뒤를 이어 프랑스에 의해 추대된 어린 왕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꼭두각시 역할에 머물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프랑스도 어린 데다 수줍은 성격에 똑똑해 보이지 않았기에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일 것이라는 생각에 그를 왕으로 선택했으니… 그러나 그들 모두 두이 탄 왕을 잘못 판단했습니다. 프랑스측은 두이 탄 등극 후 주변을 친프랑스 관료로 둘러싸고 프랑스인 교사를 측근에 두는 등으로 프랑스에 우호적 인물로 키우려 합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노력은 실패합니다.
두이 탄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통제에 점차 강한 거부감을 나타냅니다. 불과 12살∼13살 나이에 프랑스의 수탈에 맞서 후에 황궁 폐쇄를 명령, 하노이주재 프랑스 고등판무관이 갈등 해결을 위해 후에를 직접 방문하도록 하는가 하면, 베-프랑스간 조약내용 검토한 후 불평등 조항 수정을 위한 재협상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1916년 4월에는 판보쩌우 등이 설립한 베트남 광복회와 비밀리에 만남을 갖고 프랑스가 1차 세계대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을 활용해 5월 3일 밤 1시를 기해 반프랑스 봉기를 계획합니다. 두이 탄과 베트남 광복회의 계획은 봉기군으로 하여금 황성과 다낭등 꽝남성과 꽝응아이성 주요거점을 장악토록 한 후, 독일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군을 축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이 동남아에 위치한 베트남을 지원할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하튼 5월 2일 밤 두이 탄 왕은 계획에 따라 평민으로 변장한 채 측근 관료와 경호원 등 4명만 대동하고 궁을 빠져 나와 베트남 광복회 지도자 쩐 까오 반(Tran Cao Van)과 타이 피엔(Thai Phien)를 만나 봉기가 시작되길 기다립니다. 그러나 이들의 봉기 계획은 이미 4월말 프랑스측에 포착되었고, 후에 주재 프랑스 고등판무관은 봉기에 동원될 베트남 병사들 이동을 금지하는 한편 병영의 무기고도 봉쇄한 상태였습니다.
두이 탄 왕 등은 5월 6일 체포되었고, 쩐까오반. 타이피엔과 왕의 측근관료 2명은 다음날 처형됩니다. 쩐까오반 등이 마지막까지 왕을 보호하면서 두이 탄 왕은 떠밀려 봉기에 참여한 것으로 마무리되고, 프랑스측은 조용한 수습을 위해 왕좌에 복귀할 것을 권유합니다. 그러나 두이 탄은 프랑스와 대등한 위치에서 자유롭고 실질적 통치권이 보장되지 않는 왕위복귀를 거부합니다.
인도양 레위니옹에서 귀양생활 끝에 권토중래를 꾀했으나…
결국 두이탄 왕은 11월 3일 9년여간 붕타우에 가택 연금상태에 있던 부친 탄 타이 왕과 함께 인도양의 작은 프랑스령 섬 레위니옹으로 추방됩니다. 두이 탄 가족은 프랑스정부의 지원을 일절거부하고 함응이와 달리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1916년 5월 18일 국왕으로 등극한 동칸 왕의 아들 카이 딘(Khai Dinh: 啓定)왕이 뒤늦게 이를 알고 부정기적 재정지원을 해주면서 상황이 나아집니다) 두이탄은 이곳에서 라디오 수리 등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한편 법률을 공부하고 글을 쓰는 등 소박한 삶을 이어갑니다. 그는 프랑스정부에 프랑스군에 복무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과 레위니옹을 벗어나 프랑스에서 체류를 허용해줄 것을 거듭 요청하기도 했으나 그가 매우 다루기 어렵고 베트남 왕위를 되찾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부정적 평가에 따라 좌절됩니다.
제2차대전이 발발하고 프랑스가 항복한 시기에 그는 드골이 이끈 자유프랑스군에 참여합니다.무선통신을 통해 외부정보를 입수해 레위니옹섬의 자유프랑스 활동조직에 은밀히 전달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전개해 비시정부 행정당국에 의해 구금되기도 했던 두이 탄은 1942년 레위니옹 섬이 수복된 후 전함의 무선송수신 담당 부사관을 거쳐 자유프랑스군 장교로 근무하게 됩니다.
그가 라디오 수리점을 운영한 사실 등으로 볼 때 재위시절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지식을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프랑스 수복후 자유프랑스군 대위계급을 달고 있던 두이탄은 파리소재 샤를 드골 장군 사령부로 전출명명을 받게 됩니다. 이후 식민지보병사단 참모본부 등에서 근무한 두이 탄은 정식 프랑스군 중령이 되어 12월 14일 드골과 회담까지 하게 됩니다.
두이 탄의 존재는 프랑스 정부에게 정치적 격변기에 놓인 베트남 문제의 돌파구를 열 유용한 카드로 받아들여진 듯합니다. 1945년 8월 베트남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베트민(Viet Minh: 越盟-베트남 독립동맹)은 일본의 항복을 계기로 바오다이(Bao Dai: 1926.1.8∼1945.8.25)왕의 퇴위를 이끌어낸 후 베트남 독립을 선언한 상황이었습니다. 제 2차대전으로 상실한 식민지를 되찾겠다는 목표를 세운 프랑스는 순순히 물러날 의사가 없었기에 공산주의세력이 주도하는 베트민 정권을 몰아내기 위한 대안이 필요했고, 독립운동으로 아직까지 국민적 인기가 높았던 두이 탄을 국왕을 적임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두이 탄도 귀국해 베트남 국왕으로 복귀하겠다는 의지가 강하여 양측이 이해를 같이 하게 됩니다. 일정기간 프랑스에 외교와 국방을 위임하되 ‘독립적이고 통일된 베트남’ 건설을 위해 긴밀 협력한다는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 집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에 대해 냉소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베트남 왕위를 되찾기 위해 프랑스에 굴복하여 스스로 이용당하는 선택을 했다고 폄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지나친 비판이라 여겨집니다. 그의 마지막 5년의 삶은 자신이 정한 길을 따라 분투한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언뜻 부정적으로 생각될 수 있으나 그 이후 전개된 역사를 볼때 고려할 때 베트남과 베트남인을위해 나름 현실적이고 합리적 선택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접촉한 베트남인들에게 “프랑스 연방내에서 자치를 확대해 나가는 것은 국익에 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반프랑스 투쟁의 결과가 어떠하였는지 경험했고, 나는 성마른 성품의 희생자가 됐었습니다. 또다시 결과를 알 수 없는 참혹한 전쟁을 치르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는 뜻을 밝혔다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고 있다시피 두이 탄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운명의 신, 역사의 신의 짖궃은 장난. 그는 12월 24일 자신에게 부여된 과업을 수행하기에 앞서 레위니옹의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가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파리를 출발합니다. 그리고 12월 26일 저녁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추락해 동승한 조종사 등 9명과 함께 사망합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두이탄 본인은 물론 많은 사람들의 삶과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베트남과 베트남인들에 대한 애정이 깊었기에 그의 구상이 현실화 되었다면 오랜 유혈과 투쟁을 불러온 불행한 베트남의 역사가 바뀌었을 수 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는 사망하기 얼마전 친분인사에게 이런 말을 남겼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모든 베트남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고, 독립한 베트남을 건설하는 동력으로 삼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형제애를 일깨워 베트남인으로서 의무를 다하게 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근왕주의 등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분단의 재앙으로부터 베트남 국가를 구하는 것입니다…”
에필로그… 가족이야기
두이 탄 왕은 반프랑스 봉기를 꾀하다가 추방되던 해인 1916년 1월 16일에 결혼했습니다. 왕비는 남편과 함께 레위니옹으로 추방될때 임신 3개월이었습니다. 아마도 폐위와 추방이라는 고난에따른 마음고생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유산했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프랑스 정부에 청원해 레위니옹을 떠나 베트남으로 혼자 귀국합니다. 9년후 두이 탄은 황실에 이혼을 청원합니다. 그가 레위니옹 현지에서 혼인할 여성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왕비는 생이 다할 때까지 이혼을 거부하고 침묵속에 지냈습니다. 쫓겨난 왕의 왕비라는 자리에 의미를 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의 마음 알 듯 싶습니다
두이 탄은 왕비와 이혼을 하지 못했기에 정식재혼을 하지 못한채 레위니옹에서 현지 여성들과 사실혼 관계를 맺었습니다. 태어난 그의 자녀들은 모두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았고 가톨릭 의식에 따라 세례를 받았습니다. 두이 탄은 자녀가 베트남어와 베트남에 대해 배우는 것을 권하지 않았 습니다. 그로 인해 자녀들 중 누구도 베트남어를 구사하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과 씁쓸함이 생깁니다. 그가 사망한 후인 1946년, 그의 자녀 7명중 5명이 법원판결에 따라 부친의 성을 물려 받았습니다.
후에의 초라한 왕릉 ‘안랑(An Lang; 安陵)’을 찾게 되는 이유
두이 탄의 유해는 추락사한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 안장됐다가 1987년 3월 유족과 통일베트남 정부의 노력으로 고국을 떠난 지 71년만에 후에로 돌아와 그의 부친이 조성한 조부 둑둑 왕의 묘 안랑에 안장됩니다. 이곳에는 그가 사망한 후 1947년 5월 귀국해 붕타우에서 살던 부친 틴 타이도 1954년 3월 20일 사망해 안장됐습니다. 후에의 안릉에는 3대 3명의 왕이 묻혀있는 것입니다.
안릉은 화려한 응우옌 왕조 왕들의 묘들과 비교할 때 초라합니다. 관리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습니다. 31세 나이로 투둑을 계승해 황제가 됐던 둑둑(Duc Duc)은 불과 3일만에 폐위된 후 구금되어 있다가 10월 6일 굶어 죽습니다. 그의 시신은 돗자리에 싸여 들판에 묻혔고 아들인 탄 타이(Than Thai: 成泰)가 묘를 조성하고 德宗이라는 묘호를 올리기까지 역사에서 삭제된 존재였습니다. 함응이, 탄타이, 두이탄이라는 이름이 그들이 즉위할 연호에서 비롯된 것인데 비해 연호조차 없던 둑둑의 이름은 그가 머물던 황궁내 전각에서 따온 이름이었습니다. 그의 아들과 손자는 외세에 의해 쫓겨나 타향을 떠돌아야 했고…
아들보다 오래 살았던 틴 타이는 사망 1년전에야 후에의 부모 묘를 참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인도양 외로운 섬에서의 유배생활, 28세 젊은 나이에 유폐된 후 74세의 노인이 돼 부모 묘를 찾았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