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의도가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
‘삶은 태어남(Birth)과 죽음(Death)사이의 끝없는 선택(Choice)’, ‘삶은 선택의 문제이다. 매 순간의 네 선택이 너를 만든다’같은 표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중요한 고비에서 선택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나름 옳은 판단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결정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많고, 때로는 선의를 갖고 많은 이들을 위해 올바른 길이라고 믿은 선택이 배반당하고 비극적 결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스플리트에 가게 되면 하고 싶은 것
누구에게나 꼭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가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세계일주여행을 꿈꾸기도 하지만 그같은 거창한 꿈을 떠나 구체적으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몇 곳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곳이 아드리아해에 면한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운 도시 스플리트 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게 된다면 아드리아해의 따사로운 햇볕을 즐기기 보다 우선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을 찾아, ‘황제의 방’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생의 마지막에느꼈을 슬픔과 회한에 대해 상상속에서 그와 대화를 해보고 싶습니다.
아마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삶의 마지막 1년여의 하루하루를 자신의 선택에 대한 후회와 분노, 배신감에 치를 떨며 보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삶을 갉아 먹었을 수도, 삶에 대한 의지를 잃게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로마의 중흥을 이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놀라운 결정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현재 스플리트 인근의 미천한 가정(부모가 해방노예였다는 설도 있습니다)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군인으로 복무했습니다. 뛰어난 역량과 성실함으로 승진을 거듭해 근위대장에 오른 얼마 후, 공교롭게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던 황제가 벼락에 맞아 사망하고, 황제 자리를 이어받은 아들도 곧이어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일약 황제로 추대됩니다. 황제가 된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자리를 둘러싼 내전과 게르만족 침략을 빠르게수습하고, 피폐해진 로마를 재정비 해 나갑니다. 군제개편, 화폐개혁 및 일종의 가격통제 정책을 비롯한 다양한 개혁노력을 통해 쇠퇴해 가던 로마의 안정과 중흥의 기반을 다진 그는, 특히 광대한 로마를 효율적으로 방어하고, 통치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황제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아래 4황제 체제(동방정제-부제와 서방정제-부제; 서열상 동방정제-서방정제-동방부제-서방부제 순)를 도입해 권력을 나누게 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와 같은 개혁과 통치를 계속 이어갔다면 개인적 불행이나 그의 생전에 로마제국이 또다시 내전에 휘말리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예기치 않은 결정은 제국은 물론 스스로에게 비극이 되는 큰 후폭풍을 불러옵니다. 로마의 황금기였던 오현제 시절 황제들이 유능한 후계자에게 제위를 넘겨줬던 역사를 본보기로 삼은 것인지 정확한 배경은 알 수 없으나 재위 20년이 되던 해 돌연 은퇴를 선언(서방정제였던 친구 막시미아누스까지 설득해 공동으로)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스플리트에 조성한 이른바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 은둔합니다.
두 정제가 물러난 자리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위인 갈레리우스(동방)와 막시미아누스의 사위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서방;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부친)중심 新 4두체제로 재편됩니다. 절대권력을 쥔 지배자가 자신의 권력을 나누고, 또다시 깨끗하게 물러난 사례는 역사에 기록을 찾기 어려운 이례적인 결정이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에 안정적 시스템이 구축된 만큼 사심 없이 막강한 권력을 내려놓는 선례를 남기고 싶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판단의 옳고 그름을 떠나 한 국가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대단한 인물이다 싶기는 합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이러한 결정은 애초에 그의 구상대로 될 수 없는 함정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황제들의 아들들.. 오현제 시기 유능한 인재를 후계자로 세웠던 것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딸이 있을 경우 사위로 삼고, 그것도 아니면 양자로 들여 자신의 황제위를 잇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외동딸 발레리아만 두었기에 이런 지도체제를 추진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오현제중 마지막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들 콤모두스가 있었기에 전임 황제와 달리 자질과 역량이 부족했음에도 아들에게 황제위를 물려줬습니다. 영화 글레디에이터를 비롯해 로마제국 몰락을 다룬 많은 영화들이 아우렐리우스와 콤모두스 시기를 담고 있는데, 콤모두스가 역사적으로 로마제국 몰락의 분기점 으로 얘기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하튼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구축한 4황제체제는 그가 퇴위한지 불과 1년후 서방정제였던 콘스타티우스 클로루스가 사망하면서 일차 붕괴됩니다. 콘스탄티우스에게는 장성한 아들(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막시미아누스의 딸과 결혼시키기 위해 이혼시킨 헬레나와 사이에 태어난) 콘스탄티누스가 있었고, 부하 병사들이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추대한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도 황제를 칭하고 아직 혈기왕성했던 막시미아누스까지 일선 복귀에 나섬으로써 로마는 6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내전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앞서 얘기했듯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구상한 후계체제의 가장 큰 약점은 황제의 아들들이 누구 보다 지도자로서 훈련받고 경력을 쌓을 기회가 많았으며, 특히 능력을 갖춘 경우 ‘황제감’으로 비쳐져 자연스럽게 추종세력이 형성되게 마련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을 인위적으로 후계구도에서 배제하려 할 경우에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거나, 권력의 속성상 새로운 황제와 갈등이 빚어지는 구조적 위험성을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발상은 이론적으로는 훌륭했으나 현실을 도외시함으로써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막센티우스와 콘스탄티누스가 전형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처음 혼란이 빚어졌던 시기까지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전임황제’로 권위와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신속히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이때라도 ‘제국안정을 위해 함께 제위에 복귀하자’는 막시미아누스의 제안(308년)을 받아들였다면 불행은 막을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완강히 복귀를 거부하고 4황제체제를 재정비한 후 다시 스플리트에서 칩거합니다.
‘인간사의 모든 중대한 결정은 칼날 위에 놓여 있다’- 로버트 카플란의 ‘현명한 정치가’
결국 퇴위한 지 5년여가 지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영향력이 크게 약해진 311년, 사위이자 동방정제였던 갈레리우스가 병사하면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갈레리우스의 죽음으로 미망인이 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딸 발레리아는 ‘전임 황제의 딸’로서, 황제 직위의 정통성 확보에 매우 매력적인 카드였습니다. 이를 노린 갈레리우스의 외조카이자 동방 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청혼을 합니다. 그러나 발레리아가 거절했고, 화가 난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마침 딸을 방문하기 위해 와있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내 프리스카까지 감옥에 가둡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사자를 보내 항의하고 석방을 요청하자, 감옥에서 풀어는 줬으나 모든 재산을 몰수한 후 오리엔트 지방으로 추방해 버립니다.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305년 직접 동방 부제로 삼았던 인물이었음에도 비정한 배신을 한 것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아내와 딸이 정처 없이 힘든 유랑생활을 강요당했음에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남편과 아버지의 곁으로 가지 못하고 떠돌던 모녀는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동방정제 리키니우스와의 전투에서 패배해 사망하게 되자 리키니우스 진영을 찾아갑니다. 리키니우스가 갈레리우스의 친구였고, 무엇보다 308년에 갈레리우스의 추천과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승낙으로 서방 정제로 발탁(갈레리우스 사망후 상위서열인 동방정제로 등극)됐던 각별한 인연이 있었기에 자신들을 도와 줄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리키니우스는 이들을 만나주지도 않고 쫓아 보냅니다. 결국 이들은 힘들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있는 스플리트의 궁전으로 향해갑니다만, 그리스 테살로니키에서 리키니우스가 사형집행 영장과 함께 보낸 병사들에게 체포돼 중앙광장에서 처형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검은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大로마 제국의 황후였던 두 모녀가 물고기 밥이 된 것입니다
아마 리키니우스는 '전임 황제의 딸'의 존재가 두고두고 정치적 불안요인이 될 수 있기에 싹을 잘라버리는 선택을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20년간 로마제국의 최고권력자였고, 스스로 퇴위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결과적으로 ‘국가를 위한 선택이라고 믿은 고집스런 결정’으로 아내와 외동딸을 비참한 죽음으로 내몰리게 했던 것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처와 딸이 죽은 같은 해에 68세로 숨을 거둡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정확한 사망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처와 외동딸이 처형을 당하기 전 일수도, 후 일수도 있습니다. 만일 모녀 처형 후 사망했다면.. 그의 심경이 어떠했을까요? 참담했을 겁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후회와 배신감, 절망감을 곱씹으며 죽음을 맞았을 것입니다. 황제로서의 온갖 영화와 막강한 권력을 스스로 내려놨는데, 힘없는 노인이 돼 아내와 외동딸 조차 지키지 못한 회한. 만일 모녀가 처형당하기 전이었다 하더라도 깊은 회한속 마음 졸이면서 무사귀환을 간절히 바라며 죽어갔을 것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에 대한 글을 읽으며 그의 업적 같은 역사기록 보다 개인적 비극이 훨씬 더 기억에 남습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최고권력자의 지위를 스스로 내려 놓는다는 누구도 하기 힘든 결단을 내린 사람과 그의 가족이 그로 인해 그토록 참혹한 비극을 겪어야 한다는 것은 참... 또다른 역사의 비극이며 아이러니라 생각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은혜를 입었음에도 인간적 배신행위를 한 막시미누스 다이아나 리키니우스와 같이 권력 논리와 이해득실에 따라 역사 속에서 반복된 수많은 비정함도 새삼 씁쓸한 감정을 갖게 합니다.
무엇보다 후세 권력자들에게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비극이 미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권력은 꼭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진리로 보여지게 했을 터이니...
디오클레티아누스 퇴위후 벌어진 18년에 걸친 혼미는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를 패배시키고 최종적 승자가 되면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그의 왕조는 콘스탄티누스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사촌인 율리아누스 한명을 제외한 혈육을 모두 제거한 데 이어 율리아누스 마저 젊은 나이에 사망하며서 명맥이 끊깁니다. 이후 또다른 혼란이 이어지고…
역사는 신중할 것을 권합니다. 로버트 카플란은 허먼 멜빌의 소설 ‘빌리 버드’의 한 구절을 빌어 ‘따뜻한 가슴이 차가워야 하는 머리를 배신하게 둬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개인적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비극과 관련하여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그가 황제가 되기 위해, 그리고 권력을 확고히 다지기위해 보여줬던 냉혹한 권력자의 모습과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는 결정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쟁과 정치의 영역은 종종 ‘의지와 의지’가 치열하게 맞서는 투쟁의 공간으로 묘사됨은 잘 아실 것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휘하 군단병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후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최후의 승자로서 황제위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누구보다 강한 권력의지를 보여줬습니다. 그 같은 그의 모습에서 스스로 최고권력을 내려놓고 은퇴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결정에 어떠한 배경이 있는지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으나, 20년간 로마 재건을 위해 분투한 데 따른 심신의 피로, 시스템이 잘 갖춰진 만큼 자신이 물러나도 로마의 안정이 유지될 것이라는 믿음, 퇴임 후에도 막후 영향력을 발휘해 자신의 구상과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될 경우 언제든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 등이 어우러져 그와 같은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경이 무엇이든 그의 결단은 참담한 개인적 비극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그가 어렵게 안정시켰던 로마도 또다시 제위를 둘러싼 내전에 휘말려 고통을 겪게 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때문에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황제로서’ 그의 결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그의 비극은 세익스피어 고전 ‘리어왕’의 비극을 연상시킵니다. 고전의 위대함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경험과 지혜가 담겨 보편성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리어왕의 잘못된 선택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선택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자신이 옳다는 독선와 오만,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는 그 독선과 오만에 대한 경고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운명(Moira: 각자에게 주어진 몫)이 존재하므로 결코 오만(Hubris)해서는 안됨을 경계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0년의 성공적인 통치로 오만해 졌습니다. 모든 권력을 틀어쥔 황제로서 자신을 신과 같은 절대적인 위치에 놓았고, 때문에 누구의 충언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휴브리스를 '역사를 바꾸는데 성공한 창조적인 소수가 그 성공으로 인해 교만해져 남의 말에 귀를 막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다 판단력을 잃게 되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그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만일 크로아티아를 여행하게 된다면 디오클레디아누스 선택에 대한 평가는 내려놓고 남쪽끝 두브로브니크까지 이어지는 아드리아해 연안 여행 일정 중 꼭 들르게 될 스플리트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과 지금은 도미니우스 성당(Saint Domnius Cathedral)이 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묘를 방문, 황제가 아닌 한 인간의 비극과 비정한 역사의 한 장을 추억해 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 황제가 되기까지, 그리고 황제가 된 후에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을 한 인간에게, 자신이 태어났던 푸른 하늘과 푸른 아드리아해 연안에서 노후를 즐기다 조용히 생을 마치려 했던 선의를 가진 한 역사적 인물에게 마음속 위로를 건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