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레타로 : '죽기좋은 날' 처형당한 한 이상주의자

역사에 오명을 남긴, 어리석었을 지라도 선량했던 황제

by 미네르바의 올빼미

“날씨 참 좋군! 늘 이런 날에 죽고 싶었지”


‘거 참 죽기 딱 좋은 날이네’...

2013년 개봉한 영화 ‘신세계’보셨습니까? 다소 잔인해서 거부감이 들기도 했지만 나름 흥미진진했고, 특히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도 박성웅 배우의 이 대사는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 보셨을 수 있다 생각됩니다. 조폭 내부 세력다툼에서 주인공과 대립하다 죽음(공사중인 고층건물에서 내던져지는)을 맞이하게 된 중구(박성웅 분)가 죽음을 앞두고 담배 한 모금 얻어 피우며 내뱉는 대사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명대사는 작가의 순수한 창작일까? 아니면 과거에 읽었던 글에서 착안한 것일까? 궁금합니다. 그 궁금증은 불운했던 한 인물이 유사한 말을 남겼음을 알게 되면서 비롯됐습니다.

그가 한 정확한 말은 “날씨 참 좋군! 늘 이런 날에 죽고 싶었지” 입니다.

1867년 6월 19일 처형장으로 향하면서 한 얘기라 합니다. 처형을 앞둔 상황에서 더할 수 없는 의연함이 엿보입니다. 그의 삶, 알고 보면 참 매력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처형장에서 병사들에게 금화를 나눠주며 ‘자신의 어머니가 얼굴을 알아볼 수 있도록 얼굴 만큼은 총을 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죽음을 맞이했답니다.

그는 한때 멕시코 황제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세프 1세의 동생이자, 제 1차대전의 도화선이 됐던 사라예보 암살 사건의 희생자 페르디난트 대공의 숙부)출신 막시밀리안입니다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


세계사나 국내 출판된 멕시코 등 중남미 역사서를 보면 막시밀리안은 정세에 어둡고 황제직에 욕심을 내 프랑스 나폴레옹 3세에게 이용당한 무능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저도 오랫동안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냉혹한 현실정치에서 살아남기에는 너무 순진했고 멕시코 정세에 어두워 황제 직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을 지라도 권력욕으로 황제자리를 탐한 무능한 인물이라는 평가는 너무 박하다 생각됩니다. 그는 자유주의 성향의, 그 시절 유럽 왕실 인사들 중에는 드물게 신민에 대해 애정을 지닌 교양인이었고, 비록 현실을 도외시한 이상적인 생각이었을 지라도 멕시코 민중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선의도 있었습니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해 거대한 식민제국을 건설한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과 같은 뿌리로서, 멕시코 등 중남미 인민들의 복지와 번영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를 몰락으로 이끈 것도 어찌 보면 그의 이런 낭만적 성향이 작용한 때문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역사는 종종 그리 영악하지 못하거나 순진한 인물을 희생양 삼아 나아가는 비정함으로 동정심을 자아냅니다.

‘여하튼 아무 연고도 없는 멕시코 황제자리를 받아들여 내전과 혼란을 초래한 인물을 미화하는 것 아니냐. 순진함도 무능 아니냐’는 생각도 듭니다만, 인간적 동정심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막시밀리안의 비극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야심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는 백부를 닮은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기 위해 모험적인 대외정책을 펼칩니다..

프랑스의 멕시코 개입도 그 일환이었습니다. 타당함은 논외로 하고, 처음에는 그 나름 논리와 역사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했었고, 나폴레옹 1세가 재위하던 1803년에는 전쟁비용 마련 필요성과 해양을 장악한 영국으로부터 방어 어려움 등을 고려해 현재 미국영토의 1/4을 넘는 광대한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식민지를 미국에 매각하기도 했습니다. 양측 모두 ‘영국 견제 필요성’이라는 공통의 이해가 있었기에 우호적 관계를 맺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팽창이 계속되자 프랑스는 새로운 강대국 등장에 경계심을 갖고 신대륙에서의 세력균형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특히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나폴레옹 3세는 미국의 손발이 묶여 대외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는 호기로 보고, 멕시코를 미국의 세력확장을 종식시키는 핵심 축으로 육성하는 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나폴레옹 3세가 강력하고 통일된 ‘군주제 국가’ 멕시코를 건설해 미국에 대항토록 한다는 구상아래 황제로 선택한 인물이 바로 막시밀리안이었습니다. 막시밀리안은 훌륭한 인품과 리더십으로 인기가 높았으나, 이것이 형인 프란츠 요세프 1세의 경계심을 유발, 견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의 장인인 벨기에 왕 레오폴드 1세의 지원으로 잠시 이탈리아 지역 총독 직을 맡기도 했었으나 형의 ‘반오스트리아 세력에 대한 강경탄압’ 지시를 따르지 않아 해임된 상태였습니다.

1861년 12월 프랑스군이 프랑스정부와 은행이 제공한 대출금을 회수한다는 명분아래 멕시코를 침공하고 1863년에는 군주정을 지지하는 멕시코의 보수파 대표단이 오스트리아를 방문해 황제직 수용을 공식 요청하면서 막시밀리안의 멕시코 행이 본격적으로 추진됩니다. 나폴레옹 3세는 군사적 지원을 약속합니다.(형인 프란츠 요세프 1세는 미온적 태도를 보이면서 멕시코 황제직을 수락하려면 합스부르크 가문 일원으로 누렸던 권리와 칭호를 포기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의 멕시코 황제 즉위는 큰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이미 멕시코에는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이 이끄는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군 4만여명이 막시밀리안이 멕시코에 도착하기 전 수도를 점령하고 공화파 정부를 무력으로 축출했습니다만, 여전히 지방에서 항전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막시밀리안은 불안감을 표출하면서도 결국 멕시코 황제에 즉위합니다. 막시밀리안은 주요법령을 토착언어로 발표토록 하거나, 정파를 초월하는 공정한 인사, 초등교육 의무화, 아동노동 폐지 등 각종 개혁정책은 물론 공화파가 추구했던 근대화 계획까지 수용하면서 국정 안정에 애썼으나, 애초에 외세가 무력으로 강요한 외국인 군주에 대한 멕시코인들의 뿌리깊은 반감을 극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1865년 美 남북전쟁이 끝나면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공화파 군대의 군비확충이 수월해진 반면 나폴레옹 3세는 미국정부의 강력한 철군 압박과 1866년 오스트리아와 전쟁에서 승리한 프러이센과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에 직면, 병력을 철수시키게 됩니다.


‘멕시코 황제’로 죽음을 택한 막시밀리안


막시밀리언은 황후는 물론 나폴레옹 3세 등으로부터 멕시코를 떠나 유럽으로 돌아올 것을 설득받았으나 자신을 ‘따르는 지지자들을 외면할 수 없다’며 거부합니다. 멕시코군 공세로 결국 고립무원의 처지에 몰린 막시밀리언은 1867년 2월 남은 1만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멕시코시티 북쪽의 케레타로(Santiago de Querétaro)로 이동해 최후의 항전을 벌입니다. 후아레스의 멕시코 공화국 군이 곧 케레타로를 포위하게 되고, 2개월 넘게 버티던 막시밀리안은 5월 15일 함락과 함께 체포됩니다.

당시 멕시코에서는 사형제가 폐지돼 있었고 ‘붉은 셔츠단’을 이끌고 이탈리아 통일에 헌신했던 주세페 가리발디(가리발디는 이탈리아 통일운동 참여전 브라질과 우루과이 혁명전쟁에 참여하는 등으로 미주지역에서 인기가가

높았습니다), 레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 등 자유주의자들은 물론 교황, 프러이센의 비스마르크 수상 등 유럽 각국의 인사들이 베니토 후아레스에게 사형만은 면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후아레스는 향후 유럽국가의 내정간섭 시도를 차단하기 위해 강력한 의지를 부각할 필요가 있다는 차원에서 간단한 재판절차 후 앞서 얘기했듯 6월 19일 처형을 집행합니다.

총살 직전 막시밀리안은 최후 연설에서 ‘그대들중 일부의 요청으로 이 나라의 복리를 위해왔지 야심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 내가 흘린 피에 힘입어 이 불행한 나라가 다시 태어나길 기도한다’며 ‘멕시코만세! 독립만세!’를 외쳤다 합니다. 그 순간 진심이었을 겁니다. 그가 재위 중 신민들을 위한 소명을 갖고 있었음도... 그러나 그의 선의와 무관하게 아무 연고도 없는 국가에 지배자로 얹혀진 선택부터 근본적으로 시대착오적이었고 잘못이었습니다. 스스로 비극을 자초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에두아르 마네는 막시밀리안의 처형을 묘사한 그림 몇 점을 남겼습니다. 그림 대부분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은 멕시코군 군복이 아닌 프랑스군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막시밀리안이 죽음에 이르게 된 가장 큰 책임이 나폴레옹 3세에게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에필로그 : 10년의 사랑과 60년의 유폐생활, 그리고 멕시코


막시밀리안의 비극적인 죽음은 가슴 찡한 에필로그를 남깁니다. 그의 아내 샤를로트 황후. 벨기에 왕가와 합스부르크 황가의 정략적 결혼에서 맺어졌겠으나, 둘은 애정이 깊었답니다. 프랑스군의 철군이 시작되자 샤를로트황후는 유럽으로 돌아와 나폴레옹 3세에게 철수연기를 간청하고 유럽왕가는 물론 교황에게도 남편의 구명을 호소합니다. 그러나 의미 없는 노력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녀는 정신이상이 됩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남편과 살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미라마레성, 나중에는 친정인 벨기에의 메이즈성에 유폐되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처형된 지 60년이 지난 1927년 87세로 숨집니다. 죽는 그날까지 그녀는 남편과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지냈답니다. 그녀는 17살에 남편과 결혼해 정확히 10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남편과 함께한 10년의 세월을 60년에 걸쳐 회상하며 살아간 순애보.. 그녀가 오랜 기간 정신이상이었던 것이 다행이다 싶습니다. 웃픈 역사 얘기 하나. 1차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와 동맹관계였던 독일군이 벨기에를 공격했을 때 오스트리아 황제의 동생인 막시밀리안의 아내가 살고 있었기에 그녀가 머물던 메이즈는 공격받지 않고 안전했답니다.


막시밀리안이 처형당할때 양옆에는 끝까지 그에게 충성을 다한 ‘미겔 마라몬’과 ‘토마스 메히아 카마초’ 장군이 함께 했습니다. 그들 중 ‘미겔 마라몬’은 막스밀리언이 멕시코 황제로 즉위하기 전 멕시코내 보수파가 베니토 후아레스 정권에 맞서 내세운 대통령이었습니다. 예. 멕시코는 막스밀리안을 황제로 내세우기 이전 이미 내전을 겪었습니다. 베니토 후아레스가 보수세력을 누르고 내전에서 승리한 것은 국민 지지를 넘어 미국의 적극적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멕시코 민중의 뜻에 반해 황제위에 오른 막시밀리안을 타도했던 후아레스 또한 외세인 미국의 힘을 빌어 보수파를 몰아낸 전력이 있었고, 막시밀리안을 최종적으로 몰락시키는 과정에서도 외세인 미국 지원에 크게 힘입었다는 점은 쉽게 간과됩니다. 그러한 한계는 멕시코의 이후 운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됩니다. 막스밀리안의 마지막 바람과 달리 그의 처형 이후에도 멕시코의 혼란과 분열, 유혈은 계속됩니다.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장기집권과 부정부패로 다수 민중들의 고통이 커졌고, 결국 군부의 쿠데타, 판초 비야와 에밀리아노 사파타 등의 ‘실패한’ 멕시코 혁명운동 등이 반복해서 이어지며 내전과 혼란이 거듭된 것입니다.

막시밀리안이 35년의 짧은 삶을 마치고 ‘죽기 좋은 날’ 스러진 것이 멕시코 역사의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가 계속 재위했다면 더 나은 나라를 건설해 나갔을 수도, 그의 고종사촌이며 국민적 신망이 높았던 브라질 페드루 2세와 황제 대 황제로서 협력 해 중남미 제국 역사를 다르게 써나갔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지만…


기념이라 하기엔 모욕적인 듯 한…


멕시코에서 처형된 막시밀리안의 유해는 1868년 1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카푸친 성당의 합스부르크 가문 봉안당에 안치됩니다. ‘어머니가 알아볼 수 있도록 얼굴은 쏘지 말아달라’던 그의 안쓰러운 부탁이 무색하게 그의 시신은 방부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엉망인 상태로 도착했다고합니다.

그리고… 막시밀리안 1세가 처형당한 케레타토의 ‘께로 데 라스 캄파나스(Cerro de las Campanas - Hill of the Bells-) 국립공원내 처형집행 장소에는 1900년 멕시코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왕국간 국교가 정상화된 후 막시밀리안 황제를 기리는 작은 ‘막시밀리안 폰 합스부르크 채플(Capilla Maximiliano de Habsburgo)’이 세워집니다. 1901년 3월 10일 봉헌된 그 작은 교회의 제단과 제단 뒤쪽 장식은 케레타로 예술공예학교에서 제작했고, 제단 중앙의 십자가는 막시밀리안 황제 부부가 타고 왔고 나중에는 그의 유해를 오스트리아로 운구한 군함 노바라(Novara)호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 합니다.

패자를 추모하는 작은 채플옆 넓은 광장에는 채플을 압도하는 승자 베니토 후아레스의 거대한 기념 巨像이 세워져 있습니다. 오랜 인류의 역사에 기록된 국가원수 가운데 가장 작은 신장인 137cm의 베니토 후아레스의 거상이 180cm 후반의 막시밀리안 황제를 추모하는 소박한 채플을 내려다 보는 모습은 역사의 승자와 패자의 모습을

극명하고 상징적으로 대비해 줍니다. 막시밀리안을 추모하는 채플은 묘하게 그를 모욕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막시밀리안이 체포돼 총살당한 케레타로(Santiago de Querétaro)는 1531년 건설된 멕시코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 중 하나입니다. 막시밀리안이 마지막까지 버티다 처형된 도시로서 뿐아니라 1810년 멕시코의 독립투쟁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인 ‘케레타로의 음모’(케레타로 지역 주요인사들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퇴위당한 페르디난트 7세 이름아래 권력을 장악할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 이후 뉴스페인으로 불리던 멕시코 해방을 위한 무장투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가 있었던 곳이며, 1917년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28년여 장기집권에 항거해 발생한 멕시코 혁명을 수습한 후 ‘멕시코 합중국 헌법’을 공포한 곳으로 멕시코 헌정사에 있어 큰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원주민과 스페인 정복자가 공존하며 살았던 도시유적과 17-18세기의 많은 바로크 양식건물들이 보존되고 있는 케레타로 역사기념지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기도 합니다

이 도시를 방문한다면 잠깐 짬을 내 세계사의 한 줄에 ‘황제가 되려 했던 어리석은 인물’로 그려진, ‘죽기 딱 좋은 날’ 스러진, ‘어리석은 선택을 했으나 선량했던 한 이상주의자’의 교훈과 흔적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을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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