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웨크웨: 세계를 뒤흔들었던 한 가문의 쓸쓸한 퇴장

남아프리카 황야의 한 그루 '자카란다'가 기리는 비극적 사건의 현장

by 미네르바의 올빼미

황량한 초원 위 한 그루 자카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콰줄루-나탈(KwaZulu-Natal)주. 과거 줄루 왕국 수도였던 울룬디 동쪽 70여km지점 황량한 들판이 펼쳐진 곳에, 허름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작은 마을 우크웨크웨(Uqweqwe)가 있습니다.

작은 관목조차 없이 풀 밭만 펼쳐진 이 마을 남쪽의 황야 한 지점에, 멀리서도 눈길을 잡아 끄는 한 그루 자카란다 나무가 서있습니다. 그리고 나무 바로 옆에는 작고 하얀 십자가가 세워진, 누가 봐도 누군가를 추모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예. 황량한 벌판 위에 외롭게 서서 봄이 되면 더없이 아름다운 보라색 꽃을 피워 이 공간을 슬프고 쓸쓸함으로 물들이는 그 자카란다 나무는 1879년 6월 1일 이곳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을 기리기 위한 것 것입니다


이 공간이 추모하는 인물은 ‘나폴레옹 외젠 루이 장 조제프 보나파르트(Napoléon Eugène Louis Jean Joseph Bonaparte; 1856.3.16 ∼ 1879.6.1)’라는 긴 이름을 가진,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외아들 ‘황태자’ 루이-나폴레옹(Louis-Napoléon, Prince Imperial)입니다.

프랑스 제국 황제의 아들로 태어난 루이-나폴레옹은 불과 23세의 젊은 나이에 이곳 아프리카 남쪽 끝 이름없는 황야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자카란다.png 우크웨크웨 마을 남쪽 황야에 조성된 루이-나폴레옹 '황태자' 추모공간과 만개한 보랏빛 자카란다 꽃


추방당한 황태자


그의 아버지 나폴레옹 3세(Charles-Louis Napoléon Bonaparte; 1808.4.20 ∼ 1873.1.9). 그는 나폴레옹의 동생인 네덜란드 왕 루이 보나파르트와 나폴레옹의 의붓딸(나폴레옹의 첫 아내 조세핀과 전남편과 사이에서 출생)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Hortense Eugénie Cécile de Beauharnais)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나폴레옹 1세 몰락 후 스위스와 영국 등지를 전전하며 성장한 그는, 나폴레옹 1세의 아들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 후 (직계후손이 없는) 나폴레옹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하며 끊임없이 프랑스 통치권자의 자리에 도전

합니다. 끝내 1848년 2월 혁명으로 수립된 공화정의 대통령으로 선출(1848년 12월)되고, 4년 후인 1852년 12월에는 친위 쿠데타를 통해 황제로 즉위합니다. 나폴레옹 3세는 황제 즉위 한달 후 18살 연하의 스페인 명문

귀족가문 출신 외제니 드 몽티조(Eugénie de Montijo; 1826.5.5 ∼ 1920.7.11)와 결혼합니다.

이 둘 사이에서 1856년 3월(나폴레옹 3세가 48세때) 태어난 귀한 아들이 루이-나폴레옹 입니다. 그 아들은 태어난 해에 ‘황태자’로 봉해집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나폴레옹 3세는 1870년 프러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며 폐위됩니다. 프러이센 포로로 억류됐다가 풀려난 나폴레옹 3세와 가족들은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고, 마지막 순간까지 ‘프랑스 황제로 복위’를 꿈꿨던 나폴레옹 3세는 망명 생활 2년이 채 안돼 병으로 사망합니다.

이미 보불전쟁시 14세의 나이로 제국근위대 장교가 돼 부황을 수행하기도 했던 ‘명목상’ ‘황태자’ 루이-나폴레옹은 나폴레옹 3세 사망 후 추종자들에 의해 ‘명목상’의 ‘나폴레옹 4세’로 추대됩니다. 명실상부하게 ‘보나파르트 가문’ 적통 계승자가 된 루이-나폴레옹은 가문 특유의 열정적이고 무모하리 만치 모험심 강한 청년으로 성장해, 킹스 칼리지를 거쳐 영국 왕립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대영제국 장교로 임관합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모이라(운명)의 힘


운명의 1879년… 남아프리카 식민지 확장에 나선 영국은 1월 11일 강력한 군사국가 줄루 왕국을 침공합니다. 중위 계급으로 영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루이-나폴레옹은 줄루전쟁이 발발하자 참전을 신청합니다. 그러나 하나뿐인 아들의 안위를 걱정한 모친 외제니 황후는 강력 반대합니다. 모자간 갈등이 깊어 지는 가운데 빅토리아 여왕이 나섭니다. 외제니 황후에게 ‘황태자를 보호하고 결코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할 것’임을 약속하며 남아프리카 행을 허락하도록 설득한 것입니다.


결국 외제니 황후가 남아프리카행을 허락했고, 황태자 루이-나폴레옹은 2월 27일 영국군 최고사령관 케임브리지 공작의 소개장을 들고 영국을 출발, 사령관인 첼름스퍼드 남작(Baron Chelmsford)의 참모부에 배속됩니다.


첼름스퍼드 남작은 전투현장에서 활약하기를 바라는 ‘황태자’의 뜻을 반영,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여겨진 왕립 공병대에서 근무토록 합니다. 공병대 지휘관에게는 ‘황태자’가 항시 강력한 호위대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지시가 내려졌고,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자힐 캐리(Jahleel Brenton Carey) 중위가 보호 임무를 맡게 됩니다.

첼름스퍼드 남작은 황태자를 위한 최선의 안배를 했다고 여겼을 것이나, 그는 야심만만하고 무모하리 만치 모험심 강한 ‘황태자’의 성향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공병대에는 수송임무와 더불어 예정된 진격(수송)로를 정찰하는, 상황에 따라 위험할 수 있는 임무가 있음을 간과했습니다. 황태자는 6월 1일 이전 4차례 정찰임무에 투입됐고, 한번은 줄루군 진영으로 무리하게 침투했다가 거의 매복에 걸린 뻔하기도 했습니다. 불행한 사건의 전조가 이미 있었던 것입니다.

운명의 6월 1일 아침… 전날 저녁 왕립 공병대를 지휘하던 해리슨 대령은 전방에 줄루 전사들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아래 황태자가 아침 일찍 출발하는 전초부대에 합류하는 것을 승인합니다. 그의 판단이 그릇된 것이었으나 예정된 보호가 작동했다면 참사는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부터 조급해하는 황태자로 인해 정찰대는 충분한 호위 없이 출발하게 됩니다. 황태자는 선임인 캐리 중위가 맡아야 하는 지휘권도 자신이 행사합니다.


정오 무렵 루이-나폴레옹은 버려진 촌락에 도착, 지형을 스케치하는 등 주변 정찰을 했습니다. 위험은 없어 보였습니다. 한 시간여 체류후 그곳을 떠나려 할 무렵 돌연 40여명의 줄루 전사가 나타나 괴성과 함께 맹렬히 돌진해 옵니다. 황태자는 급히 말에 오르기 위해 달려가 안장에 달린 권총집을 움켜 쥐었으나, 그가 말에 오르기 전 놀란 말이 달려 나가려 하면서 안장의 끈이 끊어집니다. 뒤이어 말이 황태자의 배를 뒷발로 가격하고, 충격으로 넘어져 말 밑에 깔리게 된 황태자의 오른팔은 말굽에 밟혀 뭉개집니다. 그가 일어나 왼손에 권총을 쥐고 달아나려 했으나 줄루전사들에 의해 이내 따라 잡혔고 줄루족 특유의 짧고 날카로운 창(이클와)에 여러 차례 찔려 사망합니다. 그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뇌까지 관통했던 일격이 치명상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그는 격렬하게 싸웠다고 합니다. 그는 왕립 군사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특히 승마와 펜싱에 있어서 동기들 중 일등을 했습니다.

위험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돌파해 나갈 자신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동경로.png ‘황태자’ 루이-나폴레옹의 마지막 여정과 그가 전사한 곳을 담은 지도


어머니의 슬픔, 그리고 자카란다로 남은 恨


그의 시신은 다음날 옷이 벗겨지고 배가 갈라진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됩니다. 줄루족은 사망한 사체가 부패하며 복부가 부풀어 오르는 것을 영혼이 갇힌 때문으로 생각했답니다. 때문에 전사한 적의 배를 갈라 영혼이 자유롭게 떠나게 해주는 것이 용맹하게 싸운 적에 대한 최대한의 예우라 여겼으나, 유럽인들에게는 야만적 사체 훼손일 뿐이었습니다.

‘프랑스의 황태자’ 루이-나폴레옹의 전사 소식은 참혹한 시신 훼손까지 겹쳐져 전 유럽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전 유럽차원에서 야만적인 줄루족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분노가 이는 가운데 ‘황태자 보호’를 다짐했던 빅토리아 여왕과 영국 정부도 궁지에 몰립니다. 특히 그의 죽음이 그의 존재로 인해 프랑스와 껄끄러운 관계를 우려한 빅토리아 여왕의 계략에 의한 것이라는 음모설까지 확산되는 가운데, 영국군은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줄루 왕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합니다.

예기지 못한 ‘프랑스 황태자’ 살해에 당황한 것은 줄루 왕국측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국왕 체티와요(Cetshwayo)는 ‘전투중 낙마해 낙오된 영국군으로 생각했을 뿐 프랑스 황태자임을 전혀 몰랐으며, 알았다면 죽이지 않고 적절한 예우아래 포로로 삼았을 것’이라고 거듭 해명하고 외제니 황후에게도 애도와 유감의 뜻을 전했다 합니다.

줄루 전쟁은 루이-나폴레옹의 전사 한 달여 후인 7월 4일 울룬디가 함락되면서 끝납니다.


일찍이 남아프리카 더반에 도착해 20여일간 머물던 기간에 루이-나폴레옹은 ‘르 피가로’지 기자와 인터뷰를 했답니다. 그의 무모한 듯한 행동이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한 애씀이었을 수 있겠다 여겨지는 장면입니다. 위험을 회피하지 않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 영광스런 전공을 세운 군인의 모습을 프랑스인들에게 환기시켜 나폴레옹 시대 향수를 자극하려는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사망한 1년후 홀로 남겨져 상실감에 빠져 있던 어머니 외제니 황후가 아들을 기리기 위해 남아프리카 순례에 나섭니다. 1880년 4월 더반에 도착한 그녀는 아들의 동료장교를 비롯한 영국정부의 각별한 배려아래 아들이 거쳐간 길을 따라 아들이 최후를 맞이한 곳을 향합니다. 그녀가 가는 길. 줄루족 전사들은 ‘용맹한 전사’의 어머니에게 최대의 예우를 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사망한지 정확히 1년 되는 1880년 6월 1일, 그녀는 아들이 전사한 바로 그 장소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아들이 전사한 그 자리를 쓰다듬은 후 말없이 무릎 꿇고 오랜 시간 기도를 올렸답니다. 동행했던 프랑스 기자의 기사에 따르면 밤이 되자 수행했던 장교들이 텐트를 준비했으나, 그녀는 ‘아들의 피가 떨어진 이 땅에서 밤을 보내고 싶다’며 조용히 홀로 몸을 뉘어 아들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하늘을 바라보며 밤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녀는 이때 아들이 전사한 곳에 아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를 세울 것을 희망했고, 이를 계기로 빅토리아 여왕의 직접 후원아래 황량한 벌판 위에 오늘 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공간이 조성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공간을 멀리서도 알아 볼 수 있도록 자카란다 나무가 심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보랏빛 자카란다 꽃을 매우 좋아합니다. 한국에는 드물지만 자카란다 꽃은 남아프리카 곳곳에 피어 납니다. 그 아름다움에 더해 전통적으로 귀했던 ‘보라색’의 꽃을 피움에 따라 지혜와 고귀한 정신을 상징하기도 하고, ‘잎이 나기 전 꽃이 먼저 피고, 꽃이 진후 잎이 나는’ 특성으로 인해 삶에 대한 사색과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상’을 하게 한다는 의미와 연결돼 ‘추억. 그리움. 사랑. 회한’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장소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꽃이라 여겨집니다.‘황태자’ 루이-나폴레옹의 유해는 영국으로 운구돼 빅토리아 여왕까지 참석한 성대한 장례식을 거쳐 가족이 영국망명 후 거주했던 캠든 플레이스(Camden Place)가 있는 런던 남서쪽 치즐허스트(Chislehurst)의, 아버지 나폴레옹 3세가 묻힌 세인트 메리 가톨릭교회에 묻힙니다.

9년이 흐른 1888년 1월, 외제니 황후가 남편과 아들의 안식을 위해 잉글랜드 남부 판버러의 ‘성 미카엘 수도원(St Michael's Abbey)’에 조성한 영묘로 이장되고, 외제니 황후도 1920년 94세까지 장수한 후 남편과 아들 옆에 나란히 묻힙니다.


에필로그 :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

남편인 알버트 공을 일찍 여읜 빅토리아 여왕은 미망인이라는 정서적 공감대까지 작용해 외제니 황후를 '여왕의

사적 귀빈'으로 예우하며 돈독한 친분을 맺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외제니 황후는 아들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줄 영국 왕실과 혼사를 성사시키려 애썼고, 빅토리아 여왕도 프랑스 제위를 주장할 수 있는 루이-나폴레옹을 그보다 한 살 어린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의 배필로 고려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빅토리아 여왕은 그가 줄루전쟁에 참전해 영광스런 군 경력을 쌓음으로써 부족함 없는 사윗감이 되기를 바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일기에 ‘베아트리스 공주가 루이-나폴레옹의 전사소식이 적힌 전보를 전하며 몹시 비통해 했다’는 기록을 남겼답니다. 만일 루이-나폴레옹이 남아프리카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며 자연스럽게 정이 쌓이기도 했을 둘의 결혼이 성사 됐을 가능성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만일 그리되었다면 유럽역사가 어떻게 변했을까 상상하게 됩니다. 물론 루이-나폴레옹이 제위에 오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나 세계사에 많은 족적을 남겼을 것입니다. 독일제국 프리드리히 3세와 결혼한 장녀 빅토리아공주에 이어 막내 공주가 프랑스 황제의 후계자와 결혼했다면 적어도 영국이 대륙정책에 있어서 사용할 수 있는 카드도 많아졌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또다른 후일담...

루이-나폴레옹이 죽임을 당한 정찰임무에는 황태자 이외에 그를 보호할 임무까지 부여 받았던 캐리 중위를 포함, 8명이 투입됐습니다. 황태자와 함께 있던 3명은 그와 함께 전사합니다. 반면 그들로부터 50여m 거리에 있었던 캐리 중위를 포함한 5명은 현장을 빠져 나옵니다. 이로 인해 캐리 중위는 황태자를 구원하지 않고 도주한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됩니다. 그는 자신이 ‘황태자’ 신분을 가진 존재를 예우해야 하는 모순된 처지에 놓인 하급장교였기에 지휘권을 효율적으로 행사하기 어려웠음을 호소했습니다. 그는 외제니 황후와 빅토리아 여왕까지 ‘선처’ 를 당부한 데 힘입어 풀려났고, 대위로 정상적 진급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프랑스에 인접한 작은 섬 ‘저지’ 출신 인 이 장교의 경력은 ‘황태자를 죽게 내버려 두고 도피했다’는 오명으로 사실상 끝납니다. 식민지 인도로 보내진 그는 얼마 안돼 36세의 나이로 봄베이에서 사망합니다.


특히 전쟁사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우크웨크웨의 황야를 방문, 19세기 유럽을 넘어 세계사를 좌지우지 했던 한 가문의 마지막을 장식한 죽음을 기억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이 부근에 수도 울룬디를 비롯한 줄루 왕국의 유적들, 줄루전쟁 과정에서 세계 전쟁사에 큰 교훈을 남긴 이산들와나전투와 로크스드리프트 전투현장, 줄루전쟁에 뒤이어 발발한 보어전쟁의 전투현장들도 산재해 있습니다. 그리고 방문한다면 가급적 보랏빛 자카란다 꽃이 만발할 남반구의 봄인 9월부터 10월 사이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불안한 치안상태를 고려해 가이드를 동반해서 여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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