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랑의 싹을 잘라버린 한 사랑의 죽음, 그리고 광신의 흔적
1914년 6월 28일 한 사랑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그 죽음이 아니었다면 세상을 수 놓았을
수 많은 아름다운 사랑이 피어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조피, 조피, 죽지마. 우리아이들을 위해 살아줘!”
그가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힘들게 이 말을 내뱉었을 때 그의 아내는 이미 총탄을 맞고 즉사한 뒤였습니다. 한
사내의 아내에 대한 사랑이 유럽의 역사에서 한 세대를 사라지게 한 참혹한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첫 단추였다는
것은 무수한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도 눈에 띄는 장면일 것입이다.
그날 오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에서 19살의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발사한 두발의
총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조피 초테크 폰 초트코바 여공작
이 사망합니다. 잘 알고 계시듯 이 사건은 유럽내 3국동맹과 3국협상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던 강대국들의 갈등
과 대립을 격화시켜 결국 8월 1일의 제 1차세계대전 발발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왜 6월 28일이었을까요?
그날은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14번째 맞는 결혼기념일 이었습니다. 그들은 20세기의 첫해인 1900년 6월
28일 결혼했습니다. 페르디난트 부부는 그날에 맞춰 사라예보에 갔던 것입니다. 그날에 맞춰 가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앞서 제가 이 부부의 죽음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의 사망’이라 하지 않고 ‘프란츠 페르디
난트 대공과 조피 초트코바 여공작의 사망’이라고 표현한 것에 그 이유가 담겨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페르디난트의 아내 조피가 황태자비의 지위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황제인 프란츠 요세프 1세의 조카였습니다. 프란츠 요세프 1세의
동생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장남이었지요. 황제에게는 아들인 루돌프 황태자가 있었기에 정상적 상황이었다면
페르디난트가 후계자가 될 일은 없었을 터였으나, 루돌프가 어린 연인과 자살(영화나 문학 작품 등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진 두 남녀의 비극적 동반자살로 미화 하기도 하나, 고압적 아버지와 사이가 극히 나빴고 방탕
했던 루돌프는 자주 어울렸던 매춘부에게 동반자살을 권유하기도 했었습니다. 자살과정에 많은 의문을 남겼기에
타살 설 등 다양한 유언비어가 양산되기도 했습니다)함으로서 황제의 후계자가 됐던 것입니다.
그가 합스부르크 황가의 분가인 프리드리히 대공 집을 자주 방문하자, 주변에서는 대공의 딸 중 한 명에게 관심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정작 대공녀들의 시녀인 조피를 좋아했던 것이었습니다. 시녀
라고 하지만 조피가 종이나 하인 같은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엄연히 백작 작위를 가진 상류 귀족가문 출신 여성
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카페왕조 정도나 명함을 내밀 만한 유럽최고 황실인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황태자를
일반 귀족의 딸과 결혼시킨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페르디난트가 조피를 아내로 선택한데
대한 격렬한 반대가 이어졌고 황제와도 극심한 반목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페르디난트가 결혼을 고집하자 황제를 비롯 합스부르크 황실은 어쩔수 없이 두사람의 결혼을 허용하되
‘귀천상혼(貴賤相婚-morganatic marriage; 왕족 또는 귀족 남자와 그보다 신분이 낮은 여자 사이에서 여자나
자녀가 그 남자의 위계, 칭호, 재산을 물려받을 수 없다는 조건아래 이루어지는 결혼)을 전제로 합니다
이로 인해 조피는 ‘호엔베르크’ 여공작 작위를 받았을 뿐 대공부인도, 향후 황후도 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공식
석상에서 황태자와 나란히 자리하지 못한 채 낮은 의전서열을 부여받게 됩니다. 자녀들도(2남 1녀, 페르디난트
황태자부부가 피살 당한 후 고아가 된 이들은 호엔베르크 공작가문의 일원으로만 취급돼 처음에는 황실 연금지급 조차 거부됐었습니다) 계승권이 포기되는 등 사실상 황실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됩니다.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배우자가 황태자가 참석하는 어떠한 공식적 자리에서도 자신의 옆자리에 앉지 못하는 등
홀대받는데 대해 미안함과 괴로움이 컸습니다. 그런 그에게 상황을 우회할 방법이 하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황태자로서 그는 육군원수 겸 검열총감 직책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배우자 조피가 황태자비로
예우받게 할 수는 없었으나, 군 최고위직 장교의 아내로서는 예우받도록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1914년 6월 28일 페르디난트는 황태자로서가 아니라 보스니아 주둔 육군을 감찰하는 검열총감
으로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했습니다. 페르디난트는 결혼기념일에 자신의 배우자 조피와 오픈카에 나란
히 앉아 시내를 돌아보면서 시민들의 환호를 받고 공식행사에서 아내가 영광스런 예우를 받도록 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6월 28일은 사라예보를 방문하기에 불길하고 적절하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제국의 정보당국
과 주요인사들은 세르비아인들의 민족감정이 격화되고 있는 시기임을 들어 보스니아 방문의 위험성을 거듭 제기했습니다. 그날이 6월 28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성 비투스'의 날
그날은 1389년 6월 28일 ‘검은 새들의 들판(코소보)’에서 세르비아 연합군이 오스만 투르크군에게 패배한 날
(500여년간 오스만제국 지배를 받게 되는 분수령이 된 것으로 인식)을 기리는 ‘성 비투스’의 날이었습니다.
특히 1914년의 ‘성 비투스’의 날은 1913년 2차 발칸 전쟁을 통해 코소보가 해방된 후 처음 맞는 ‘성 비투스’의
날이었기에 특히 열성적인 분위기가 퍼져 있었습니다. 당연하게 세르비아인들에게는 비극적인 민족적 기념일에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한 '남슬라브인들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목표에 최대 걸림돌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보스니아를 방문한데 대한 반감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페르디난트와 조피 부부는 사라예보에 도착전
보스니아내 휴양지에 머물면서 기동훈련을 참관하는 등 여유로운 일정을 보냈고, 주민들의 환영분위기에 고무돼
주변 경고에 대해 괘념치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평소 황태자가 경호에 대한 거부감이 크기도 했고, 배우자와 느긋
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까지 겹쳐서인지 비극적 사건을 막을 수 있는 경호체계가 매우 허술했었다
합니다.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의 암살과정을 읽다보면 대공부부에게는 더 할 수 없는 불운(운전기사가 길을 잘못 들어 방향전환을 하려고 하필이면 암살범 프린치프 바로 앞에서 멈춰서게 되고, 단 두발로 정확하게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프린치프에게는 더할 수 없는 행운이 비현실적이라는 느낌마저 갖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드는 지점입니다.
그 작은 우연이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꾼 대사건으로 이어진다는 것도... 암살단원인 차브리노비치의 1차암살
시도가 수행장교 몇몇에게 부상만 입힌 채 실패한 후, 사라예보 시청에 도착해 보스니아의 무슬림 여성대표단을
접견한 조피는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빈에 남겨둔 자녀들 걱정을 했답니다. 그들은 이때까지 자녀와 그만큼 오래 따로 있던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병원을 방문해 부상당한 수행원들을 위문 하겠다고 고집하지만 않았어도, 조피 여공작이 총독 관저로 따로 가기로 한 계획을 번복해 돌연 황태자와 병원에 함께 가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상황은 달라
졌을 것입니다. 그들의 고집으로 인해 부부는 함께 사망하게 됩니다.
제 1차세계대전사를 쓴 A. J 테일러의 표현이 (상황에 맞지않게) 멋있습니다.
부제가 ‘유럽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의 탄생’인 책 첫부분에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된 페르디난트 황태자부부 암살
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를 죽게 만든 것은 사랑이었다”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법상 사형선고가 가능한 20세에 못미쳐 사형선고를 면합니다.
그는 3년 넘게 복역하다가 자신이 도화선의 불을 당긴 제1차 세게대전이 끝나기 7개월전인 1918년 4월 18일
체코 테레진(Terezin)의 교도소에서 결핵과 영양실조로 사망합니다. 이런 저런 엇갈리는 얘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는 얘기도 있고, 힘들어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자신으로 인해 자신과 동년배의 젊은
이들을 '사라진 세대'로 만든 참옥한 전쟁이 야기된데 대해 그는 진심 어떠한 마음이었을까요?
세르비아에서는 프린치프를 민족영웅으로 기린답니다. 大세르비아 제국을 꿈꿨던 그들은 그런 존재로 평가할 수
있겠으나, 그들의 민족적 야망일 뿐 1차 세계대전과 유고슬라비아 붕괴이후 벌어진 비인도적인 참상을 보면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세르비아인의 자민족 중심주의적 발상에 불과한 것임은 유고슬라비아 내전당시 사라예보가
위치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있었던 반인도적 인종청소와 대량학살 범죄에서 여실히 증명되었습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울린 총성은 결국 인류역사에서 예외적인 이른바 '벨 에포크'의 시대를 끝장낸
광신집단의 그릇된 신념에서 빚어진 것에 불과하다 생각됩니다.
인류에게 불행을 몰고온 그릇된 신념... 그 신념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합니다
물론 프린치프 같은 이들의 이른바 ‘大義를 위한다’는 허상으로 인하여 수 많은 인간의 유혈과 비극이 반복되는
역사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의 안타까운 면이겠지요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밝은 미래, 그리고 사랑이 사라지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첫 희생이 정략적 계산이 일반적이었던 왕실의 결혼에서 매우 예외적이었고 정확하게 14년간
이어진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사랑과 미래였습니다.
* 사라예보에는 라틴교 옆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암살현장과 박물관, 그들이 머물렀던 시청사(유고
슬라비아 내전 당시 파괴됐다가 유럽연합 지원으로 복원), 프린치프 등 암살단원들의 묘 등 1914년 6월
18일의 사건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아울러 반인도적 범죄와 대량학살 박물관(Museum of
Crimes Against Humanity and Genocide)을 비롯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참상을 알리는 더 많은 공간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