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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과 싫어하는 마음

뚜벅이의 끄적끄적

by 달바다

좋아한다는 마음은 숨길 수가 없다. 그리고 싫어하는 마음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가 아무리 숨겼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눈치를 채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난 어릴 때 우리 막내 이모가 싫기도 하고 좋기도 했다. 그 이유는 이모는 아프니까 내가 이해를 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말씀 때문인 것 같다. 우리 막내 이모는 20대에 조현병이 발병하셨다. 그래서 오랫동안 입원과 퇴원을 병행하셨고 거의 일상생활이 되시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도 나와 같이 있을 때는 그런 거 상관하지 않았던 나랑은 스스럼없이 친구처럼 잘 지냈다.

그런 내가 이모에게 감출 수밖에 없었던 마음은 싫어하는 감정이었다. 좋아하는 감정은 감추지 않아도 되지만 이제 와서 말을 하는 거지만 난 나 살기도 힘든데 어린 마음에 이모를 이해를 하고 잘 대해야 된다는 마음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모가 이해가 되는 순간이 왔었다. 그건 내가 정신과 상담을 받고 난 이후인 것 같다. 이모가 20대 초반에 이모 스스로 많이 외로웠구나 하고 생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약과의 싸움에서 이모는 졌던 거라 생각이 되었다. 사실 화자도 20대 초반에 약을 먹어야 한다는 처방을 받았을 때 충격을 받았었다.

'내가?'라는 생각이 많이 앞섰던 것 같았다. 그리고 약과의 타협점을 찾는 건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거의 13년에서 14년 사이의 시간이 걸렸으니 말이다. 어떻게 보면 짧다고도 볼 수 있는데 나에게는 매우 힘든 시간이었다. 한 번에 약을 다 털어 넣기도 하고 별별 짓을 다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는 것 보면 삶은 질긴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약과의 타협점을 찾을 때 이모는 이모 나름대로의 자신의 삶에 대한 고뇌가 많았을 거라 생각이 되었다. 이모가 항상 하던 말이 있는데... "이모는 오랫동안 병원에 있었어. 그러니 네가 이해를 많이 해줘야 해. 왜냐하면 그동안 이모가 약을 먹으면서 바보가 되어 버렸거든." 이 말이었다.

내가 보는 이모는 정상이었지만, 이모 스스로 이걸 인정을 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지 생각하면 진짜 마음이 안 좋아진다. 나 스스로도 약을 인정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이모는 20대 초반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쭉 약과의 싸움을 어떻게 하셨을지 감히 판단을 하기 힘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좋아하는 마음과 싫어하는 마음은 종이 한 장 두께처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생각한다. 왜냐하면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도 어느 한순간 갑자기 싫어지는 순간이 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을 하면 나에겐 막내 이모가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이모 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이모 이야기를 할 때면 마음이 좋지 않을 때도 있다. 이모는 돌아가실 때도 자신의 오빠에게까지 어떻게 보면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이 되셨다. 왜냐하면 이모의 기초수급자로 받는 돈과 당시 장애인 1급으로 받는 돈 그리고 우리 어머니와 다른 두 분 이모들에게 받아낸 돈까지 합하면 상당한 액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모가 돌아가신 날 관을 빨리 태워 달라고 외삼촌이 장례식 측 사람에게 말을 했고 오죽하면 그분이 여기 상주가 누구냐며 원래 법으로도 돌아가신 당일에는 화장이 안 된다고 말씀을 하셨다고 전해 들었다.

그러자 그제야 외삼촌이 아무 말 못 하고 잠잠해지셨고 다른 두 분 이모들까지 와서야 화장이 진행이 되었다. 외삼촌의 어이없는 행동의 이유는 그거였다. 조금이라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와 동시에 그동안 이모를 대한 외삼촌의 행동들이 가식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함께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이모의 모습을 보기 위해 병원으로 갔었을 때의 모습이 진짜 가식처럼 느껴졌고 진짜 사람이면 자기 동생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동안 막내 이모라는 이유로 뜯어간 돈으로 해외여행이며 여러 곳을 많이 다니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그것을 이모가 알고 떠났다는 게 너무 슬펐고 그걸 모르고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했다. 이모는 죽기 전에 그 흔한 '계란찜'을 너무 먹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해서 가기에는 서울과 부산은 너무 멀었고 병원에서 그걸 하기에는 너무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또 외삼촌에게 부탁을 하자니 삶은 계란 오래된 거 비쩍 마른 거 하나 달랑 가져다 두셔서 진짜 부탁을 하니 못했다. 생각을 해보니 이모는 정말 자기 오빠에게 마저 사람대접을 못 받고 가셨다. 그래서 따뜻한 우리 집을 많이 그리워하셨다.

그래서인지 이 글을 쓰면서 혹시 내가 어릴 때 이모를 싫어했던 마음이 티가 나지 않았을까 생각이 가끔씩 떠오른다. 만약 그렇다면 언젠가 이모를 다시 볼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의 철이 없었던 내 행동을 사과를 하며 늦게나마 이모를 이해하게 되었다며 말을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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