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소풍을 간 적이 있다. 당시 어디로 소풍을 갔고,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니도 양반은 못 된다”라는 선생님의 한 마디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까지도 양반은 못 되고 있다. 여전히 찢어진 청바지가 좋다. 딱 봐도 얌전하지 못한 옷들을 좋아한다. 징이 박힌 라이더 자켓, 덕지덕지 패치 혹은 물감으로 커스텀 된 청자켓 반항적인 문구, 욕설과 구설수를 달고 다닌 반골 기질이 다분한 밴드 티셔츠 등 엄마나 여자친구가 보면 질색을 할 옷들을 좋아한다.
양반은 못되지만 양아치도 아니다. 사실 그렇게 반항적이지도 않다 엄마가 좋아하는 90년대 미국에서 제작한 아크릴 소재의 가디건, 여자친구가 좋아하는 80년대 리바이스 스타 프레스트 바지 등 얌전한 옷들을 즐기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얌전한 옷을 입을 때에도 늘 반항적인 정신을 기반으로 한 서브 컬쳐를 참고한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옷은 깔끔하게 입고 다니자는 슬로건 아래에서 이태리 쓰리 버튼 수트를 입고 문제를 일으키던 모즈, 깔끔하다 못해 빛이 나는 헤어와 캐주얼한 스타일의 옷을 입던 스킨헤즈 등. 그야말로 양반인 척하는 것을 즐기는 셈이다.
사실 반항심을 표출하지 못해서 안달이난 것은 아니다. 나는 화가 많지도 불만이 많지도 않다. 반항심으로 똘똘 뭉친 서브컬처를 동경한다고 해도 과격한 행동까지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애초에 그들처럼 될 수도 없다. 당시의 시대상과 현재의 시대상은 너무 다르다. 기술, 문화, 사회 등등 수없이 많은 요인들이 나를 절대로 60년대 영국으로 갈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모두들 반항심이라고 하기엔 얌전하고 모범적이라고 하기엔 요란한 마음은 내면에 품고 있으니까.
이런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얌전한 방법은 역시 옷으로 표현하는 것이 제일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옷을 어떻게 입든, 남에게 상처 주는 것은 아니니까. 이런 생각으로 꾸역꾸역 찢어진 청바지에 다리를 넣고 있는 것을 보니 나는 역시 양반은 못 된다.